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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부터 시작된 스레브레니차 학살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5-20 02:24:46

스레브레니차 학살은 공식적으로 8,37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의 대량 학살 사건이다. 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의 스르브스카 공화국에 속하는 산악 마을이다. 인구조사에 따르면 중심가 인구 약 3,000명, 광역권까지 따져도 14,400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도시이다. 보스니아 전쟁 종료 이전까지 이 지역의 주된 민족은 보슈냐크인이었다. 1991년 10월 15일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4월 6일 유럽 공동체(EC)와 바로 다음날 미국으로부터 국가로서 승인을 받았다. 

1995년 발생한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Srebrenica genocide) 희생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신원 미상 유해에서 수습한 의복을 기록하고 있는 법의학 조사 과정을 담고 있다. 출처 : El Mundo con Ella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에서는 3개의 인구 집단, 즉 보스니아인으로 불리는 무슬림,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 간에 치열한 영역 전쟁이 발생했다. 세르비아와 가까운 보스니아 동부에서는 특히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 간의 갈등이 심했다. 중부 포드린제의 보스니아인들이 거주하던 영역인 스레브레니차 주변 지역은 세르비아인들이 전략적으로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지역으로, 새로운 정치적 정부가 될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경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곳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보스니아 동부와 중앙 포드린제의 보스니아인 거주 지역에서 대규모적인 인종 청소를 단행하였다. 


이웃 지역인 브라투나츠에서는 보스니아인들이 학살당하거나 스레브레니차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1,156명이 학살당했다. 이 외에도 수천 명의 보스니아인이 포차(Foča), 즈보르니크(Zvornik), 체르스카(Cerska)와 스나고보(Snagovo)에서 집단 학살당하면서 스레브레니차 근처에서부터 인종청소가 자행된다. 동부 보스니아 및 세르비아에 집결해있던 세르비아 군은 1992년 초 몇 주 간 스레브레니차를 강제로 장악한 다음 보스니아인들을 죽이고 추방하였다. 1992년 5월, 보스니아 정부군을 이끄는 나세르 오리치(Naser Orić)가 다시 스레브레니차 지역을 수복하였다. 


이후 1993년까지, 스레브레니차의 보스니아 정부군은 통제 지역을 늘려갔으며, 1993년 1월에는 남쪽으로 제파(Žepa)까지 서쪽으로는 체르스카까지 수복하게 된다. 당시 스레브레니차 영토는 900 평방 km에 달했으나, 보스니아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은 지역에서 고립되었다. 당시 ICTY의 즈장을 보자면 “세르비아의 지배를 받는 무방비 상태의 섬”과 같은 마을이 되었다. 다음 몇 달 간, 세르비아 군은 콘예비치 폴예(Konjević Polje)와 체르스카를 다시 공격하여 스레브레니차와 제파 사이의 연결고리를 차단했다. 따라서 스레브레니차 지역은  150 평방 km로 줄어들었다. 외곽 지역의 보스니아인 주민들은 계속 스레브레니차로 모여들어 인구 수는 5~6만으로 불어났다. 


이후 프랑스의 필리페 모리용 장군은 유엔 보호군(UNPROFOR)의 사령관이 되어 1993년 3월 스레브레니차를 방문하게 된다. 그 당시 스레브레니차는 그 인구가 초 만원 상태로 이미 공급 과잉 상태에 놓여있었다. 세르비아 군이 마을의 수도 공급원을 파괴한 후로 수돗물도 거의 나오지 않았으며, 전기는 임시 발전기가 있어야 했고, 음식과 의약품 등 다른 생필품의 부족도 심각하였다. 모리용 장군은 주민들에게 이 마을은 UN의 보호 하에 있으며 자신은 절대 주민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93년 3~4월에 수천명의 보스니아인들이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 사무소(UNHCR)의 도움으로 스레브레니차에서 구출되었다. 


이 작전은 사라예보의 보스니아 정부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이는 이후 인종 청소를 돕는 요인이 되었다. 세르비아 고위 관리들은 영토 확장에 계속 집중하였다. 1993년 4월 13일, 세르비아인들은 UNHCR 대표들에게 보스니아인들이 항복하고 스레브레니차를 비우지 않으면 마을을 공격하겠다고 전하였다. 보스니아인들은 항복하기를 거부했다. 1993년 4월 1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모든 세력들은 스레브레니차를 안전 구역으로 간주하며, 무장 공격이나 적대적 행위를 취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결의안 819호를 통과시켰다. 1993년 4월 18일, UNPROFOR 군의 첫 번째 부대가 스레브레니차에 도착하였다. 


스르브스카 공화국 군 드라나 군단 예하 여단에 속한 1,000~2,000명의 군인들이 탱크, 장갑차, 각종 총기와 박격포로 무장하여 스레브레니차를 포위하였다. 당시 그 지역에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군은 28산악사단으로 무기는 물론 군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등, 정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토마스 카레만스 중령은 세르비아 군 때문에 탄약이나 장비들, 군인들이 스레브레니차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ICTY에 증언하였다. 스레브레니차는 1995년에만 학살이 진행된 것이 아니고 1992년부터 이미 학살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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