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어떻게 그리고 왜 시작되었느냐의 문제와 누구의 책임이냐의 문제는, 국제정치학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논쟁의 중심이 되어 왔다. 냉전 기원론이 바로 그것이며, 이러한 연구에 관한 책들이나 논문들은 일일히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그러나 이것들을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전통주의 학파(The traditionalist school)와 수정주의 학파(The revisionist school)로 분리된다. 전자는 냉전의 책임을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에서 찾고, 후자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경향에서 찾는다. 두 나라 사이의 냉전이 확실해지는 1947년 봄과 가을의 시점까지 두 나라 관계는 3단계를 거친다.

흐루시초프 시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 양식으로 제작된 전형적인 구소련 시대의 선전화(Propaganda Poster), 출처 : Окна соцреализма
제1단계, 곧 1945년 추축국의 패전으로부터 1946년 초까지의 시기에서 소련은 미국을 상당히 자극하는 대외 행태를 보였다. 동유럽과 발칸에서 서유럽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확고한 결의를 보였고, 또한 동지중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났으며, 이란과 만주에서의 계속적인 소련군의 주둔은 소련이 이 지역에 대해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자아냈다. 1946년 2월에는 소련이 미국의 원자폭탄 비밀을 훔친 사실이 공식적으로 밝혀졌으며, 스탈린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서로 물과 기름임을 강조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두 체제 사이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암시했다. 이러한 소련의 대외 행태에 대해 미국에서는 진정한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는 강경론과 협조론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2단계, 곧 1946년 초부터 1947년 초까지의 시기에서는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해 미국이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쪽으로 미국 정부 안의 의견이 모아졌다. 주소 미국 대리 대사 케난은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과 체제의 유지를 위해 대외적 긴장을 필요로 하는 만큼 서유럽은 강경히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매우 긴 전보를 본국 정부에 보냈는데, 이것이 미국 정부가 소련에 대해 강경히 대처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1946년 봄과 여름 사이에 미국의 대소 정책은 굳어졌다.
제3단계, 곧 1947년 봄부터 1947년 가을까지의 시기에서 두 나라 사이의 냉전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스탈린의 팽창 정책이 노골화되고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소련과의 협조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리는 대신에 케난의 봉쇄 정책을 채택하여, 그 일환으로서 서유럽에 대한 경제 지원과 방위 조약 및 동맹 체제를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947년 3월 12에 트루먼 독트린의 자극적인 선언 속에 구체화되었다.
미국 외교사에서 혁명적인 획기적 사건으로 불려진 이 선언은 미국이 소련의 팽창 정책을 저지하겠다는 결의의 명백한 입장 표명이었다. 이에 따라 6월 5일에 마셜(George C. Marshall) 국무장관의 유럽 부흥 계획, 이른바 마셜 플랜이 발표되었다.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새로운 정책을 공산팽창주의의 장애로서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여기에 스탈린은 9월 말과 10월 초 사이에 바르샤바에서 유럽의 공산당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코민포름(Cominform)을 창설하여 서유럽의 단결에 대항하게 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행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즈다노프의 연설은 서방세계에서는 '서방에 대한 영원한 냉전을 선언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 연설을 서방세계는 '즈다노프 노선'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전후의 두 나라 관계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베를린 봉쇄 사건이 일어났다. 1948년 2월에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 등 독일의 서부를 점령한 연합국이 그 점령지를 통합하여 독립된 독일 국가를 형성하기로 결정하자, 스탈린은 소련 점령 아래 있는 동독에 위치한 베를린 가운데 연합국 부분인 서부 베를린에 대한 육상 접근을 봉쇄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것에 강경히 맞서서 공수를 통해 서부 베를린 시민에게 물자를 공급했다. 1949년 5월에 가서 스탈린은 마침내 육상 접근에 대한 봉쇄를 해제했다. 전후 처음으로 두 나라를 전쟁 한 걸음 직전에까지 가게 한 이 사건은 서유럽으로 하여금 1949년 4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결성과 서독 국가의 수립, 1949년 9월 독일연방공화국(FRD)의 수립으로 치닫게 되었다.
흐루시초프가 그의 집권기에 추진해 나간 일련의 정책들과 계획들을 두고 이것을 "흐루시초프 프로그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흐루시초프가 추진한 소련 사회의 광범위한 개혁 정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흐루시초프는 인민주의와 평등을 강조하면서 일종의 유토피아적 성향을 강하게 보였다. 우선 국내 문제에서 흐루시초프의 프로그램은 경제 우선 순위의 재조정, 곧 소비재 공업을 앞세우고 생활 수준에서의 전반적 개선을 시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 노동자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아파트를 많이 지었으며(흐루쇼브까 아파트의 탄생), (2)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주 42시간으로 줄였고, (3) 노인들의 연금을 2배로 올렸으며, (4) 농민들에게도 연금을 주었고 농민들이 전국을 여행하고 거주지를 바꿀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흐루시초프는 교육 분야에서도 개혁을 추진했다. 그 핵심은 학생들에게 노동의 중요성을 심어 주고 공부로만 점철된 엘리트주의를 버리게 한다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1958년에 새 교육령을 발표하고 고등학생들이 적어도 2년 동안 공장을 중심으로 기술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침은 학부모들의 집단 반발을 샀으며 1960년대 초에 조용히 철회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안드로포프의 시대까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을 취함과 동시에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시대의 공산주의적 경제 정책의 상징이던 농기구공급처(Machine Tractor Station, MTS)의 개혁 또는 폐지를 추진했다. 농기구공급처라고 번역될 수 있는 MTS라는 곳은 농기구들을 경작을 위해 집단 농장들에게 빌려 주는 기관이다. 그런데 이 기구들은 실제로 농민들에 대해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따라서 농민들을 오히려 착취하는 핵심적인 관료 기구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은 이 기구를 매우 싫어하고,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농업 행정이 실시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흐루시초프는 이 기관을 폐지할 것을 제의했던 것이다. 스탈린 사망 후, 뒤를 이은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등장해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면서 해빙기가 도래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소비에트 영화계 역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영화 검열 제도가 일부 폐지되어 소련 영화인들은 보다 자유로운 제작 환경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고, 영화 학교에서 교육받은 젊은 영화인들의 유입으로 소련 영화계에는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영화들이 속속 등장한다. 1957년에 개봉한 미하일 칼라토초프의 <학이 난다>는 그러한 점에서 흐루시초프 체제의 해빙을 알리며 소련 영화의 국제적 성공을 시작하는 영화로 꼽힌다.
특히 1962년 제작된 SF 컬트 영화 <앰피비언 맨> 이 그 일례라고 할 수 있다. 기존에 제작되던 역사, 문학 관련 작품들 역시 성행하였는데, 주요 소재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1940년대와는 다르게 이 당시 전쟁을 묘사한 작품들은 국민 선동과 이데올로기적 요소에서 탈피해 보다 사실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그리고리 추흐라이의 1959년 작품인 <병사에 대한 발라드>로, 이 영화의 줄거리는 전쟁 중 포상으로 휴가를 받게 되자 고향으로 잠깐 돌아가 어머니를 뵙고자 하는 병사의 이야기이다. 예술 영화의 거장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이반의 어린 시절로 데뷔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러나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이후로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처럼 가혹한 탄압을 받은 사례도 있다.
당시의 소련 영화는 비교적 값 싼 영화관람료로 시간을 때우기 족하다는 이유도 있기 때문에 대단히 높은 관객수를 기록했는데 TV보급 등의 이유로 영화관객들이 줄어들기 시작한 1960년대와 70년대에도 관객수 1,500만명 이상을 동원하지 않으면 흥행실패작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는 20회 정도로 세계 수위권을 다투웠으며 그 영향으로 영화관객수가 세계 1위, 참고로 소련의 연간 영화 관객수가 40억명 가량 기록했다. 전 세계 영화관의 절반 이상이 소련에 있었을 정도였다. 당시 소련의 경쟁국이었던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인도보다도 영화관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그 만큼 당시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함하는것이 당대 소련인들 사이에서 여가생활을 즐기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물론 1980년대 이후로 관객수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 접어들었기는 했지만 소련의 붕괴 이전까지도 다른 국가들에 비해 거대한 영화 시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소련이 영화 시장을 개방한다면 수익을 거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