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콜키스 왕국은 B.C 6세기~B.C 1세기까지 존재했었다. 이러한 콜키스 왕국은 고대 조지아의 첫 번째 나라로 여겨지며 여기에서 나타나는 용어 콜키시안(Colchisian)은 흑해의 동쪽 연안에 거주하던 초기 조지아인 부족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명칭이다. 이러한 콜키스 인들에 대해 키릴 토마노프(Туманов, Кирилл)의 코카서스 관련 연구 논문 서술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조지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쿠타이시(Kutaisi) 중심부 다비드 아그마셰네벨리 광장(David Agmashenebeli Square)에 위치한 콜키스 분수(Colchis Fountain), 출처 : Eurasia.Travel
“콜키스는 새로운 사람들이 연합을 이루게 된 첫 번째 코카서스 나라로 떠올랐다. 콜키스는 정확하게는 최초의 조지아 인이 아니고, 서부 조지아에 위치한 조지아 왕국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 (중략) ... 가장 최초로 조지아 인을 형성한 콜키스에서 조지아의 사회 역사의 시초를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하다.”
키릴 토마노프(Туманов Кирилл)가 주장한 내용을 보면 코카서스에서 사람들이 연합을 이루게 된 첫 번째 국가가 콜키스 왕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첫 단락에 언급된 새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주민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이 최초의 조지아 인이 아니고 서부 조지아에 위치한 조지아 왕국이라고 부연 서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부분으로 볼 때 콜키스인들은 콜키스 신화 등을 놓고 볼 때 아마조네스 및 스키타이와 연관성이 주목되고 있다. 초기 콜키스 시대에는 목재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후기 콜키스 시대의 목공 기술은 상당히 발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언급된 콜키스의 기록에 의하면 목공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당시 목공 기술자들은 고대 카프카스에 사회에서 높은 신분 계층으로 우대를 받고 있었다.
그 당시 건축에는 목재가 주로 사용되고 석재가 부가적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쉽게 부패되거나 화재로 전소된 경우가 많아서 남아 있는 유물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중기 콜키스 시대부터 석조 문화가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이 때 만들어진 석조 조각물 형태의 근원은 후에 로마 시대 카프카스의 목조 조각과 대리석 장식 조각의 장식 등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바투미의 북쪽 코불레티(Kobuleti) 언덕에 있는 노칼라케비(Nokalakevi) 교회의 입구에 나타나 있는 거주 유적의 첨두형 아치 형태는 당시의 콜키스 왕국의 주거 건물 양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마르트빌(Martvili)에 있는 제1 콜키스 집 형태와 세나키(Senaki)에 있는 거주지의 기단에 남아 있는 기둥 형태는 후기 콜키스 시대 생활 양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사각형 주거는 점차적으로 평면이 길게 나타나며 카프카스 고지대의 기후를 이용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좌우에 대나무 뼈대를 줄지어 세우고 그 끝을 휘어서 잡아매어 첨두형 아치 구조를 만들고 기와 지붕을 덮었다. 이후 로마 시대가 도래 하는 후기 콜키스 시대에는 더 발전하여 3~4개의 건물을 중정 주위에 배치하며 지붕에 널판 또는 기와를 덮게 되었고 흙벽돌을 사용하게 되었다. 콜키스인의 첫 번째 정착 이후, 두 번째 남부 코카서스 부족 연맹이 B.C 13세기에 서부 조지아로 진출하여 콜키스 왕국을 건국했다. 이들은 영토는 주로 흑해 연안이 중심이었으며 바투미와 포티(Poti)에 항구가 생기면서 멀리 그리스까지 왕래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고대 콜키스 왕국은 조지아 부족들로 알려진 라즈(Raz)와 카프카스의 원 종족인 카르트벨리아(Kartbelia) 인들을 융합하여 만든 첫 번째 국가 형태로 나타난다.
콜키스의 신화들을 서술한 대부분의 고전 작가들의 서술에 의하면, 콜키스의 영향력은 아시아의 사르마샤(Sarmasha) 동남쪽으로 동쪽에 이베리아와 몬테스 모스치시(Montesmoschishi, 현재 소캅카스)가 있고, 남쪽에는 아르메니아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리고 남서쪽에 폰투스, 코락스(Koraks) 강에 접하면서 러시아 초원에서 아나톨리아에 이르는 길의 길목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조지아와 압하시아의 경계인 브지비(Bzavi) 강까지의 영향력을 행사했고 서쪽에 흑해, 북쪽에는 대 카프카스의 연결선을 경계로 카프카스 내륙 지역에 주로 존재했다. 그러나 서쪽 흑해로 향하는 지점의 면적에서 고전 작가들의 서술은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트라보는 트라브존에서 콜키스가 시작되었다고 하며, 반면에 프톨레미(Phtolemi)는 폰투스의 영토인 리제(Rize)에서 기원하여 리오니 강으로 확장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헤로도토스는 바투미를 콜키스의 시원으로 보았으며 콜키스 북부, 오늘날 압하시아의 라브라(Lavra)로 알려진 피춘다(Phichunda)까지 확장했다고 기술했다. 피춘다는 콜키스의 최북단으로 사르마트와의 경계였다. 후기 콜키스 시대에는 견고한 성곽을 중심으로 한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전쟁 시 방어를 위한 견고한 성채는 2중으로 중축하여 건설되었다. 당시 콜키스 왕국의 처음 수도였던 주그디디(Zugdidi) 도성 유적은 아자리아 지방 바투미 시 북쪽 132㎞에 위치하고 있다. 1개의 도성유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며 초창기 콜키스의 도성은 산의 자연 지세를 활용하여 거석(巨石)으로 구축되었다. 이 성벽은 길이 1m 정도의 자연석을 다듬지 않은 상태로 축조했으며 그 높이는 약 3.6m이다. 그 석축방법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공법과 흡사하다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주그디디 도성의 외성(外城)은 폭이 1~3.5㎞, 길이 11㎞, 총연장 40㎞이며 성벽 두께는 약 5.3m이고, 14~18m 간격으로 10~12m 각 형의 치성(雉城)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외성 서쪽에 중요한 지역에는 사방 3.5㎞의 내성(內城)을 축조했다. 내성의 북문 북쪽에 있는 평원에 위치한 즈바리(Zvari) 성은 성벽 표면을 석조로 하고 벽체는 흙과 돌을 다져서 축조하였으며 그 두께는 4.5~5.4m이다. 요소에 반원형의 치성을 설치했다. 즈바리 성은 근세까지 존속하여 사용되었으며 각 시대마다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내성의 동문 밖에는 이아손이 메데이아를 위해 지어준 궁성 유적이 있다. 이후 7세기 중엽에 아르메니아 사절단이 이곳을 방문한 사실이 <비잔틴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아손이 메데이아를 위해 지었다는 궁성 유적으로 추정되는 기초자리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중앙에는 폭 25m, 길이 35m의 장방형 건물지가 있고 양쪽 끝이 반원형으로 된 2개의 건물터가 부수되어 있다. 그 동남쪽에는 폭 10m, 길이 28m이며 양쪽 끝이 반원형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바알 신전 정문인 알레포 사르곤 형태는 이스라엘에 전하여져서 예루살렘 솔로몬 신전의 구조 형태와 리디아의 아르테미스 신전 및 이오니아의 제우스 신전 형태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세나키에 있는 주거지 유적에서 신전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바라보이는 언덕에 당시 콜키스인들의 취락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취락에는 몇 개의 주거들이 한 구역 안에 중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가축우리와 곡식창고들이 부가되어 있다. 그리고 방 구조로 볼 때 원형, 정방형 및 장방형의 주거 형태가 함께 나타나 있다.
대나무 뼈대를 휘어서 만든 원추형 또는 각추형의 지붕 상단에는 여러 터키석 장식을 달았다. 장방형 주거는 반원통형의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스트라본의 <지리학(Geography)>기록에는 대나무 구조의 벽을 지탱하는 기둥과 기와 지붕이 주로 사용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세나키 주거 유적을 복원한 모형에는 대나무 뼈대에 흙을 바른 벽과 흙벽돌이 사용된 주거들이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