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뇌제(雷帝 : 재위 1533~1598)의 첫째 황후인 아나스타시아의 오빠인 니키타 로마노프가 이반 뇌제와 함께 카잔 칸국을 정벌하면서 Дзержинский (제르쥔스끼)까지 공작령을 확대해 모스크바 대공국의 황족 중 가장 큰 영지를 소유하게 된다. 후일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가 깔로멘스꼬예에 목조 궁전을 건축한 것도 이러한 로마노프 가문 영지라는 직접적인 사유지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인 '차르(Czar)'에 즉위한 이반 4세, 일명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의 초상화, 출처 : Иван IV Васильевич Грозный, великий князь и царь Московский и всея Руси с 1538 по 1584 год
로마노프 제국의 시조 미하일 로마노프(1596~1645)는 니키타 로마노프의 손자로, 할아버지를 통하여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차르 표트르 1세와 친척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차르 가문과 상당히 가까운 인물이었고 그러한 전적은 러시아 차르 계승에 적법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류리크 왕조의 이반 4세 사후 러시아는 후계 문제와 연관된 정치적 불안정과 폴란드, 스웨덴 등 외세의 압력 속에서 이른바 ‘동란의 시기(Smutnoye Vremia)’를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는 폴란드 왕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으면서 폴란드에 저항적인 로마노프 가문을 탄압했고 그러한 탄압은 미하일의 가족들을 수도원에 유폐시키고 부친인 필라레트는 폴란드로 유배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1613년 슬라브 세력의 끈질긴 저항으로 폴란드의 간섭을 물리치고, 농노를 제외한 사회 전 계층의 대표자 회의인 젬스키 소보르가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표트르비치를 새로운 통치자로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왕조 시대가 개막되었다.
같은 해 3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미하일은 20년 동안 부친인 필라레트 로마노프와 공동통치를 했는데 먼저 즉위한 부친에 이어 17세의 나이로 7월 11일에 대관식을 올리며 로마노프 제국을 창설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러시아로 변화되는 과정의 1기 시작은 미하일의 즉위 때부터였다. 미하일이 제위에 오른 이후 약 10년 동안 왕조의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젬스키소보르는 해마다 열렸다. 그러나 왕조 초기의 문제가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되자 차르는 젬스키소보르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16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
일정한 선출 방식이 마련된 예도 전혀 없었고, 소집될 때마다 구성원의 사회적 성격도 달라졌다. 귀족이나 향신(鄕紳)도 관료 기구로의 충원을 더 희망했고 대의적인 기구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전제정(專制政)으로 치닫게 되는데, 만일 로마노프 왕조의 초기 지도자들이 젬스키 소보르를 발전시켜 나가고, 로마노프 왕조 탄생의 기초였던 시민과의 협력을 중시했더라면 러시아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면 러시아 전제정치의 상징이자 핵심인 차르가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전제정치의 상징적 존재인 차르에 대하여 우선 2대 차르의 명칭 전체를 예시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대러시아, 소러시아와 백러시아의 대군주 황제 및 대공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전제자.”라는 긴 명칭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전제자(Самодержец)”이다. 이러한 전제자의 의미는 국가의 원수로 3권을 장악하며,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을 겸함으로써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제약 받지 않는 절대 군주의 지위를 말하는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