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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즈미르의 역사, 호메로스의 혼이 서려있는 곳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7-16 16:10:03

현재 터키 공화국의 영토이지만, 호메로스의 고향인 스미르나(Smirna, 지금의 이즈미르)에서부터 밀레토스에 이르는 지역을 이오니아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곳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요람이다. 이곳 스미르네는 동서 교역의 요지이자 그리스 철학이 탄생한 배경이 있는 곳으로 그리스 문화가 시작된 곳이다. 이러한 이오니아의 전설에는 헬렌(Hellen)의 손자인 이온(Ion)의 자손이라 한다. 이 종족의 기원은 실제로 본 연구에 인하여 여러 추정으로 인한 사료의 분석, 그리고 고고학적인 분석으로 볼 때 일부 밝히기도 했지만 이후 이 민족들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주민 외에 에게 해 중부 여러 섬들의 주민, 그리스 본토의 아티카의 아테네인까지 이오니아인으로 불렸고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神)의 제사가 그들의 결합을 상징했다. 

튀르키예 제3의 도시 이즈미르(İzmir)의 상징인 이즈미르 시계탑(İzmir Saat Kulesi)과 그 주변의 코나크 광장(Konak Square),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이 지방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 국가 밀레토스에서는 탈레스 이외에 아낙시만드로스(Anaksimandros), 아낙시메네스(Anaksimenes)와 같은 출중한 철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었으며, “만물은 유전 한다”라는 말을 언급하여 유명해진 헤라클레이토스(Heraclleitos)는 그 인근 도시인 에페소스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즈미르의 역사는 B.C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은 과거 트로이와 이오니아 폴리스의 역사를 영위한 곳이었다. 그리스 때는 스미르나라고 불렀고 로마 시대 때는 페르가몬이라고도 불렸다. 현 터키 이즈미르 도의 베르가마(Bergama) 군에 있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도시를 페르가몬이라 했다. 페르가몬의 어원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네오프톨레모스와 안드로마케의 아들 페르가모스에서 유래했다. 


이곳은 터키의 아나톨리아의 북서쪽 아시아 에게 해에서 26km 정도 떨어져 있었으며 헬레니즘 때 카이우스 강 북쪽에 자리했던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였던 도시이기도 하다. 의외로 기독교하고도 관련이 깊은 곳이기도 한게 요한 묵시록에 적힌 아시아에 있는 7개 교회 중 하나가 페르가몬에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성경에서 표기한 '버가모'가 바로 페르가몬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서 역사상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크세노폰의 저작물이라고 한다. 크세노폰과 함께 한 그리스 군대가 점령하였으나 다시 페르시아에게 빼앗겼다는 기록만 나오고 그 외에 별다른 중요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런 페르가몬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디아도코이 때로 알려진다.


디아도코이 당시 환관 출신이자, 처음에는 안티고노스의 부하였던 필레타이로스가 안티고노스를 배신하여 리시마코스 밑으로 들어갔다. 안티고노스가 패사한 뒤, 필레타이로스는 리시마코스의 신임을 사 방어가 용이한 이 도시에서 그의 보물을 지키도록 명을 받아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곧 정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리시마코스도 배신하였으며,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에게 패하고 죽자 일시적으로 셀레우코스의 영향권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셀레우코스도 곧 비명횡사하고 혼란스러워지자 그때부터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떨어져 나왔다. 이것이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이다. 필레타이로스는 40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재위하며 페르가몬을 요새화하였으나, 성 불구자라는 문제점이 있었기에 그의 동생인 에우메네스의 아들 에우메네스 1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에우메네스 1세는 다른 세력들과 연합한 뒤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1세를 격파하여 페르가몬의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그런데 그 역시 직계 후손을 남기지 못하여 다음 왕위는 5촌 조카인 아탈로스 1세가 물려받는다. 아탈로스 1세는 새로운 위협인 켈트족의 침략을 물리쳐서 구원자(소테르,σωτήρ)라는 칭호와 함께 정식으로 왕을 칭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 왕국으로서의 페르가몬은 아탈로스 1세 때부터 시작한다. 아나톨리아 지역에 그리스 식민 도시들이 들어섰지만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에게 점령되었는데, 이후 그들이 아테네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의 거점인 사르데스까지 공격해서 점령했다. 이에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 원정을 결심했고 이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빌미로 작용하게 된다. 


이후 헬레니즘 시기와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도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들은 꾸준히 번영하였으나 여러 차례의 지진과 역병, 자연적 요인에 의한 항구의 매립 등으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로마 제국 - 중세 로마를 거치며 원로원 속주나 자치 도시의 권한이 주어지는 등 매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시기를 1000년 동안 보내게 된다. 이후 이오니아 그리스 세력들은 그 활동 지역을 넓히고는 다시 여러 상업적인 행위로 오늘날의 비잔티움 일대까지 활동 지역을 넓혔다. 당시 비잔티움은 작은 어촌에 불과했지만 비로소 도시와 성곽을 세우고 방어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을 비롯한 이오니아가 장악한 지중해 해안 일대에서 해적들의 침공이 잦아지고 로마 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동, 서로마로 분리되었을 때 동로마의 세력권으로 이관됨에 따라 직접적인 관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비잔틴 제국이 셀주크투르크에게 만지케르트(Mazikert) 전투에서 패한 11세기 말에 투르크 인들이 30여 년 간 이오니아에 토후국을 세워 그들의 첫 해군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이즈미르는 비잔틴의 영역에 220여 년 간 머물렀지만 14세기 초엽에 오스만투르크 인들에게 다시 점령되면서 토후국들이 다시 세워졌고 15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이들을 규합하였다. 중, 근세를 거치며 이오니아의 고대 도시들은 대부분 유적으로 변하였고, 1차 대전 이후 그리스에 점령되어 이즈미르를 중심으로 2년 여간 통치를 받았다. 하지만 터키 독립전쟁에서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터키 국민군이 탈환하고 그리스인들을 추방하며 현재 모습이 형성되었다. 아산시요르(Asansör)는 터키어로 '엘리베이터'라는 의미로 시내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일몰 무렵에 가면 무척 아름다운 에게 해의 석양과 함께 이즈미르 만에 걸쳐 있는 이즈미르 시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시계탑이 있는 코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바로 다음 정거장인 Üçyol역에서 내려서 바닷가쪽으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높은 탑 같은 전망대가 보이는데, 이게 아산시요르이다. 꼭대기에 식당도 있어서 이즈미르 시민들의 프로포즈 장소로도 애용된다. 터키 제3의 도시이자 최대의 상업, 항구 도시인 이즈미르는 터키에서도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고 한다. 성경 요한묵시록, 혹은 계시록에서 소아시아 7개 교회들 중 하나인 스미르나 교회가 소재했던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가 건설한 대표적인 이오니아 식민시로써 이후 페르시아에게 패망했지만 알렉산더 대왕 이후 리디아가 점령해 리디아의 영토가 된다. 


이후 로마가 점령했다가 비잔틴의 영토가 되었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셀주크투르크에게도 함락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탄불 다음으로 유독 그리스와 로마, 비잔틴 관련 유물 유적이 많다. 그래서 종교적으로도 모스크 반, 성당 반의 비율이 터키 내에서 유일하게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지역이다. 시계탑은 1850년에 세워졌으며 지금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는 그리스인과 오스만인의 건축 합작품이다. 종교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재, 정교회의 그리스와 이슬람의 오스만의 건축 합작품은 두 종교의 화합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옆에 있는 1748년에 완공된 코낙 자미와 함께 이즈미르에 몇 안 되는 볼거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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