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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20 << 사유의 화답>>
  • 조율여백
  • 등록 2026-05-20 13:27:43

●위 이미지는 AI인공지는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


이수진의 글


<<관계의 태도에 대하여>>


저는 어린 시절과 과거의 여린 시간들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순한 교류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적 이음으로 바라보려 노력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관계 속으로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으며, 서로의 층위를 넘어 진심으로 이해하고 이어지기를 바랐던 날들도 많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서는 절대적인 이해와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던 가여운 시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시도와 노력 속에서도, 관계의 많은 부분은 쉽게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오픈화와 객관화, 정합화와 구조화, 그리고 의미화의 과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거나 매우 미약한 경우들도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인간과 세계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구조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더욱 깊게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저는 과거와는 조금 다른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럽고 부정합스러운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왜곡하려 하기보다, 불완전계의 본질 자체를 억지로 바꿀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저는 객체와 관계의 층위에 따라 일정한 거리 두기를 시행하며, 상대적으로 더 높은 층위와 방향성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구조화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상대적으로 높은 층위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집착이 적거나 희박하며, 오히려 내어줌과 배려의 성향이 강하고, 조화와 공존, 그리고 의미를 향해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를 유지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가 삶 속에서 느끼고 판단해 온 하나의 방향성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저와 유사한 고뇌의 길을 걷고 계신 분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의 더러움과 부정함을 굳이 지나치게 가까이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증오와 배척만으로 대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완전히 없애는 데만 집착하기보다 스스로의 방향과 중심을 잃지 않은 채, 어떤 관계와 의미에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결국 관계란 단순히 가까워지는 행위만이 아니라, 서로의 방향성과 층위를 이해하며 적절한 거리와 이음을 조율해 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형록 선생님의 화답>>


우리 이수진 선생에게 

나의 청소년기 스승님들 중 한 사상가

Erich Fromm의 ((존재냐 소유냐))의

관점과 상통하는 입장 입니다.


객관화는 자기성찰~자신의 업경대(業鏡臺)에 염라대왕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무아인 내가" 자신을 비춰보는 진실함 이지요.

허다한 자기애(Narcissism) 병자들과 달리.

정합화는 나의 하루 업을 자신의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바와 언행이 얼마나

부합하고있는지 점검하는 것이지요.

(사상~이론과 실천의 조응)

구조화는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인식하며

덧없는 사감(私感)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당당히 자아심화확대에 정진하는 것이지요.

이런 자기성찰을 열린 마음으로 수행하며

순간순간의 집적으로서 하루의 뜻있는

보람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삶.


이수진 선생의 조용한 동시에 당당한

삶의 실천에

성적등지(惺寂等持)의 마음으로

화음(和音) 합니다.


<<최형록 선생님께 화답>>


최형록 선생님께

수많은 산포와 혼탁 속에서도 끝내 이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은, 어쩌면 인간 존재 안에 아직 남아 있는 가장 순수한 불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맑게 깨어 있는 정신 또한 결국은 거창한 초월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잠시나마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본래의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 역시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에 수많은 흔들림과 모순 속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끝내 진정성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존재들은 서로의 결을 어느 정도 알아보게 되는 듯합니다.


아마 그러한 이유로 선생님의 말씀에서 깊은 동질감과 잔잔한 울림을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부족한 주장과 언어들을 단순한 문장으로 소비하지 않으시고, 그 안의 과정과 의도를 깊이 읽어주시며 다시 화답해주신 점이 제게는 매우 뜻깊게 다가왔습니다.


세상 속에서는 때로 크고 요란한 찬양과 인정이 더 가치 있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매한 군중의 박수보다, 삶과 사유를 오래 통과해 오신 선생님의 조용한 화음 한 줄이 훨씬 더 무겁고 깊게 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간의 외형적 조건이나 피상적 명분에만 머물지 않으시고, 존재의 본질과 태초적 흐름을 함께 응시하려 하시는 분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저만의 다소 낯선 언어와 표현들 또한 단순한 특이함으로 치부하지 않으시고, 그 이면의 방향성과 진정성을 헤아려주시는 듯합니다.


본질적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 수행은 결국 또 하나의 수행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기회를 부여받은 것에 대한 책임,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내어주어야 하는 삶의 순환 또한 수행의 일부일 것입니다.


외로운 군중 속에서도,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암흑 속에서도,

존재는 때로 자기 몫의 저항과 고됨을 감내하며 작은 빛을 지켜내야 하는 듯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최형록 선생님께서 또한 자신을 내어주며 주변을 밝히는 항성과 같은 존재로 느껴집니다.


항성은 스스로를 태워 빛을 냅니다.

그 빛은 결코 요란하지 않더라도, 멀고 어두운 곳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방향이 되어주곤 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선생님의 깊은 화음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조용히 화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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