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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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니) 제시해주신 영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칼럼입니다. 동물의 복수극이라는 흥미로운 사건을 통해 우리 정치 사회의 고질적인 '언어적 단순함'을 날카롭게 짚어낸 내용입니다.
인도 대륙은 인간과 동물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땅이다. 소와 코끼리는 물론, 수많은 떠돌이 개들과 원숭이들이 인간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나름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최근 인도에서 일어난 한 기상천외하고도 비극적인 사건은 우리에게 큰 충격과 동시에 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사건의 발단은 단순했다. 떠돌이 개 몇 마리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죽인 것이다. 이 소식은 원숭이 무리 사이에 순식간에 퍼졌고, 분노한 원숭이들의 잔혹한 보복이 시작됐다. 원숭이들은 동네의 무고한 강아지들을 닥치는 대로 납치해 지붕이나 나무 위로 올라가 떨어뜨려 죽였다. 그렇게 희생된 강아지만 무려 250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새끼가 죽었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눈이 뒤집힌 원숭이 집단이 개라는 종(種) 전체를 향해 맹목적인 피의 복수극을 벌인 것이다.
이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름 아닌 ‘의사소통의 단순함’에 있다. 원숭이들에게는 사건의 전말이나 정황을 파악할 언어가 없다. 그 개들이 왜 새끼를 죽였는지, 단순히 굶주려서 그랬던 것인지, 혹은 이미 죽은 사체를 두고 다투다 그리된 것인지 따위의 맥락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오직 [개가 우리 새끼를 죽였다, 그러므로 개는 우리의 원수다]라는 극도로 단순한 명제만 존재할 뿐이다. 만약 이들에게 고차원적인 언어가 있어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는 식의 타협과 대화가 가능했다면, 250마리의 무고한 생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며 “역시 미련한 동물들의 싸움”이라며 비웃고 넘길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의 정치 사회, 특히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보여준 양대 진영의 싸움은 인도의 개와 원숭이의 전쟁과 소름 돋도록 닮아 있다.
과거 대선 정국에서 한 후보가 “가난하면 자유를 모른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을 때, 상대 진영은 맥락을 거세한 채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후보’라며 무차별적인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엘리트 경쟁을 거쳐 올라온 후보가 진심으로 약자를 멸시해서 그런 표현을 썼다기보다는, ‘자유를 추구하려면 최소한의 경제적 여건이나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복잡한 인과관계를 거칠고 단순하게 표현하다 보니 발생한 참사였다. 하지만 언어의 맥락을 읽지 않는 사회는 이를 단 하나의 단순한 ‘공격 신호’로 받아들였다.
반대편 진영도 다르지 않다. 대장동 사건의 핵심 실무자가 목숨을 끊었을 때, 다른 후보가 “그 사람을 모른다”고 답하자 난리가 났다. 같이 사진을 찍고 해외여행을 다녀온 기록이 있는데 어떻게 모른다고 할 수 있냐며 ‘새빨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웠다.
사실 '안다'와 '모른다' 사이에는 수많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존재 자체만 인지하는 일방적 인식, 공적인 업무로 정보를 교류하는 단계, 사적으로 교제하는 단계, 깊은 신뢰를 나누는 단계, 그리고 이익을 공유하는 공동체 단계까지 다양하다. "부하 직원으로서 인지는 하고 업무적 보고는 받았으나, 사적 교류나 신뢰를 나눈 관계는 아니다"라고 상세히 풀어내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정치 언어에는 오직 흑과 백, '안다'와 '모른다'라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결국 이 역시 "우리 편을 죽인 원수"라는 식의 단순한 프레임으로 치환되어 진흙탕 싸움으로 번졌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정황을 파악하고 맥락을 이해하는 ‘고해상도의 언어’를 가졌다는 점이다. 모니터의 화질이 240p에서 4K(2160p)로 올라갈 때 화면이 선명해지듯, 인간의 지성과 정신세계도 언어의 해상도가 높아질 때 비로소 성숙해진다.
언어가 단순해질수록 사회의 갈등과 싸움은 잦아지고 잔인해진다. 맥락이 거세된 채 자극적인 단어 한두 개만 둥둥 떠다니는 사회는, 인도의 원숭이 무리가 강아지를 떨어뜨려 죽이는 야만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언어의 수준이 곧 그 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수준을 결정한다. 불필요한 소모적 전쟁을 끝내고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인 지적 경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당장 우리 사회의 언어 해상도를 높여야 한다. 상대를 ‘개’나 ‘원숭이’로 규정하기 전에, 그들이 내뱉은 말과 행동 뒤에 숨은 맥락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