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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 타라고
  • 등록 2026-04-10 08:46:59
파주의 매서운 겨울바람도 집안의 서늘한 공기 앞에서는 무력했다. 칠순의 종훈이 정성껏 차려진 한우 갈비찜과 굴비 상을 내려다보며 묘한 허기를 느낄 때, 적막을 깬 건 둘째 종민의 거만한 손짓이었다.

"아버지, 형은 또 늦는데요? 거참, 대한민국에서 혼자만 바쁜 척은 다 한다니까."

종민이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외제차 키를 식탁 위에 툭 던지며 투덜거렸다. 벤처 기업을 키워낸 성공의 자신감이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잠시 후, 강남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큰아들 종휘네 가족이 들이닥쳤다. 반가움은 찰나였다.

"형님, 조카 이번에 학원 옮겼다면서요? 대치동 그쪽은 정보력이 생명이라는데, 형수님 고생 꽤나 하시겠어요."

동서 간의 인사가 오가기 무섭게 며느리들의 '뼈 있는' 대화가 이어졌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상대의 가방과 옷차림을 훑느라 분주했다.

이윽고 종훈의 다섯 자녀가 모두 모였다. 하지만 거실은 화목한 대화 대신, 각자의 이데올로기와 계급장으로 무장한 다섯 개의 섬으로 변해버렸다.

"형님, 요즘 법조계도 예전만 못하다면서요? 제가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빌딩 상가 하나 빼드릴까요? 수익률 보장되는데."

둘째 종민의 제안은 호의라기보단 '자본력'의 과시였다. 대형 로펌 파트너인 큰아들 종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종민아, 세상 모든 걸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그 습관, 천박해 보일 수 있다는 거 모르니? 격조 좀 지키자."

"격조? 형님은 그놈의 학벌주의, 권위주의 좀 버려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옆에서 듣던 셋째 종수가 코방귀를 뀌며 끼어들었다. 시민단체 활동가인 그는 형들을 향해 독설을 내뱉었다.

"둘 다 참 가관이네. 부르주아들의 허위의식 결정판을 보는 것 같아. 명절에 모여서 고작 이런 수준 낮은 대화나 해야 해?"

"형들은 좋겠네. 돈이랑 명예라도 있어서."

구석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막내 종빈이 가시 돋친 말을 보탰다. "나는 여기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니까 제발 나 좀 내버려 둬요."

이 아수라장 속에서 고명딸 혜림의 인내심이 마침내 폭발했다.

"오빠들! 다들 입만 살았지? 내가 여기 파출부로 왔어? 아침부터 장 보고 음식 차리는 건 나 혼자 다 했는데, 상 치울 때도 손 하나 까딱 안 해? 제발 그놈의 잘난 척들 좀 그만하고 이 접시나 좀 같이 옮겨!"

하지만 혜림의 외침은 거실 가득 울려 퍼지는 주식 방송 소리와 형제들의 고함에 묻혀버렸다. 그때였다.



칠순의 아버지 종훈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란스러운 자식들을 꾸짖는 대신, 묵묵히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혜림의 손에서 젖은 행주를 뺏어 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아버지가 허리를 굽히고 기름때 묻은 접시를 닦기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거실의 모든 소음이 뚝 끊겼다. '에세이 철학회'를 이끄는 노철학자의 뒷모습은 작고 초라해 보였지만, 그 침묵이 주는 무게는 거대했다. 자식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지, 이리 내세요. 제가 할게요."

결국 큰아들 종휘가 당황하며 다가와 소매를 잡았다. 종훈은 고개를 젓지 않고, 개수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얘들아, 너희 기억나니? 예전 산동네 살 때, 집 뒤 동산에서 너희 다섯이서 비료 포대 썰매 타던 날 말이다."

그 한마디에 팽팽하던 공기의 결이 바뀌었다. 막내 종빈이 조심스럽게 추억을 끄집어냈다.

"아... 그때 종민이 형이 어디서 포대 구해와서 우리 다 태워줬잖아요. 형이 제일 빨랐는데."

"그랬지." 둘째 종민이 쑥스러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종휘 형이 대장 노릇 한다고 앞에서 폼 잡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혜림이 울리고 난리도 아니었잖아."

"어머, 맞아! 그때 내 바지 다 찢어져서 엄마한테 혼날까 봐 오빠들이 자기 외투로 나 가려주고 그랬는데."

혜림의 눈가에 맺혔던 분노가 어느새 옅은 미소로 바뀌었다. 냉소적이던 셋째 종수도 슬그머니 다가와 젖은 그릇을 받아 키친타월로 닦았다. 30년도 더 된, 가난했지만 단단했던 기억들이 줄줄이 소환되었다.

"그때는 진짜 가진 게 없어도 그 동산 하나면 온종일 신났었는데.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를 이렇게 할퀴게 됐을까?"

혜림의 묵직한 질문에 다섯 남매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각자의 빌딩과 지위라는 가시 돋친 껍질 속에 숨겨두었던 '그 시절의 소년, 소녀'들이 비로소 고개를 내밀었다.

노철학자 종훈이 젖은 손을 닦으며 자식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종휘는 동생들 챙기느라 애썼고, 종민이는 집안 일으키느라 고생 많았다. 종수는 세상을 바르게 보려 노력했고, 혜림이는 내 곁에서 살림 돕느라 애 많이 썼지. 종빈아, 너도 조급해 마라. 곧 네 길을 찾을 게다."

종훈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나는 너희가 각자의 산에서 대장이 된 건 기쁘지만, 조금 전 티격대던 모습처럼 그 동산 위 아이들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참 슬프구나. 얘들아, 성공한 모습 말고, 그냥 네 모습으로 오면 안 되겠니?"

장남 종휘가 먼저 종민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아까 내가 말이 좀 심했다. 빌딩 상가 얘기는... 나중에 형이 술 한잔 살 테니까 그때 천천히 하자."
"아니에요, 형님. 저도 돈 좀 번다고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 아파트 현관문 앞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생기로 북적였다.

"형, 이번 주말에 내가 조카들 데리고 형네 동네로 갈게."
"그래, 혜림아 오늘 진짜 고생했다. 이건 애들 세뱃돈이니까 꼭 챙겨가고!"

창가에서 자식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종훈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창밖 임진강 위로 여인의 눈썹같은 그믐달이 보였다.

'삶은 결국 에세이철학과 같지. 수많은 갈등과 수정 끝에 비로소 만들어진 따뜻한 문장 하나의 의미를 깨닫는 것과 같지.'

파주의 밤하늘은 맑았고, 가로등 빛은 다섯 남매가 내려가는 길을 말없이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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