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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내전 당시, 참혹한 사라예보의 현장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5-25 16:07:41

세르비아인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동부 보스니아의 보스니아인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보스니아 정부군을 압도하고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세르비아군, 경찰, 준군사가 도시와 마을을 공격하고 난 이후 지역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의 도움을 받아 표준 행정 절차를 거쳤다. 이 표준 행정 절차는 보스니아인이 거주하는 아파트와 주택을 체계적으로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민간인은 체포당했고 일부는 구타당하거나 살해당했다. 남성은 여성과 떨어져서 지내게 했다. 보스니아인 남성의 대부분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서 학살했다. 여성은 매우 비위생적인 구금시설에서 수감당한 채로 잔인한 학대를 받았다. 

보스니아 전쟁(1992~1995년)의 비극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순간, 스나이퍼들의 총탄 세례를 피해 시민들이 뛰면서 대피하고 있다.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많은 여성들은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했다. 이곳 생존자는 세르비아 군인과 경찰이 구금시설을 방문해서 한 명 이상의 여성을 골라 강간했다고 증언했다. 4월 22일, 공화국 의회 건물 앞에서 평화 집회가 열렸으나 할리데이 호텔에서의 총격으로 와해되었다. 4월 말부터는 포위 공격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1994년 2월 5일,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대부분의 전선이 교착된 시점에서도 사라예보는 여전히 포위중이었으며, 시민들은 평소와 같이 봉쇄 속에서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몰리는 정오를 기해 시내에 갑작스런 박격포 포격이 개시되었다. 백주대낮에 시내 한복판에 장을 보러 나온 많은 시민들이 포격에 희생되었다. 최종적으로 68명의 사망자, 144명 이상의 부상자가 집계되었다.


이로부터 1년 6개월 후인 1995년 8월 28일, 서방세계의 중재를 앞둔 시점에서 똑같은 시장에 똑같이 포격이 발생해 43명의 사망자와 75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유엔 대변인은 이 사건에 대해 '남쪽에서 날아온 한 발의 120mm 박격포탄이 시장에 명중하여 발생한 참사로, 세르비아 민병대의 주둔지역에서 날아온 것으로 보인다'고 정리하였다. UN과 나토로 대표되는 주변 국제사회는 이미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고, 이 2차 포격 당시 파리에서는 평화 회담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포격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농락당한 서방 세계는 3년간 이어온 '신사적인 중재'를 끝내기 위해 세르비아 민병대가 더이상 호전적으로 보스니아를 공격할 수 없도록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이로써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Operation Deliberate Force)이 나토에 의해 한 달 간 개시되면서 비로소 세르비아 민병대가 정리되어 데이턴 협정을 체결해 종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사라예보는 시가지 남부를 밀랴츠카 강이 관통하며 남북에 각각 산지를 끼고 있는 도시다. 특히 사라예보의 중심가는 이 준 분지의 남부, 밀랴츠카 강변에 위치했는데 강의 남부와 바로 이어진 산간 요새는 모두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빠르게 장악한 상태였다. 오늘날 사라예보의 경계상 도시 동남부의 산악지대가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의 공격이 가장 강했던 요새였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남부 산지를 점거하고 도시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구역의 무슬림을 추방하고 살해 및 약탈을 거듭했으며 산악 요새와 고층건물들을 거점으로 삼아 사라예보 중심가를 향해 살아있는 생명체들을 저격하는 행위를 벌인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저격총 뿐만 아니라 경기관총, 대공포 등 멀리 쏠 수 있는 화기라면 포격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사라예보 시내에 쏟아부었다. 물론 3년 동안의 포위 동안 도시 포격 역시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서는 보스니아 정부군이 선공하여 원점에 반격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주로 야간에 사격하여 사격하는 원점을 알 수 없도록 하는 식으로 보스니아 정부군이 선동을 위해 자작극을 위해 사격했다고 주장하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사라예보는 봉쇄되었지만 사람들은 살아가야 하기에 계속 시가지를 통행하였는데, 강남의 고층 건물에서 강북을 내려다볼 수 있던 세르비아 민병대는 낮에 무차별 저격으로 도시의 사기 저하를 유발하고 밤에 도시를 포격하는 방식으로 사라예보를 고사시켜 나갔다. 


특히 저격수가 이 포위전의 가장 큰 비극으로 여겨지곤 하는데, 이는 순전히 민간인을 향한 무차별 테러였기 때문이다. 강북의 시가지 전역이 저격수들의 가시권에 있었고, 시민들은 저격수의 재장전 타이밍을 노려 달리거나 극소수 무장한 시민들의 반격을 틈타 이동하거나, 또는 후일 투입된 유엔 평화유지군 장갑차의 엄호를 받으며 도시를 왕래할 수밖에 없었다. 3년 간의 무차별 저격과 포격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은 11,541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물론 노약자도 포함되어 1,600명에 달하는 어린이들 또한 저격수에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상자의 수는 50,000명을 넘는다. 1992년 하반기와 1993년 상반기 사라예보는 포위된 채로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며 이 와중에 잔혹 행위도 일어났다. 도시 외곽의 세르비아군은 지속적으로 도시 내의 정부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도시 내에서는 세르비아군이 주요 군사적 요충지와 보급지 대부분을 통제했다. 도시 내에서 세르비아군 저격수가 곳곳에 산재하기 시작하면서 시내에서 저격수가 많은 특정 거리에는 "Pazite, Snajper!"(스나이퍼 조심!)이라는 문구가 곳곳에 적혔으며, 특히 이 거리 중 가장 심한 거리로는 공항으로 이어지는 대도로인 울리사 자마야 오드 보스네(Ulica Zmaja od Bosne)로 이 도로는 저격수의 골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길을 건너려다 저격 살해 당한 부부인 아드미라 이스미치와 보스코 브르키치는 도시 내에서 고난의 상징이 되었다. 포위전 기간 동안 하루 평균 329회의 포격이 있었고, 1993년 7월 22일 하루에는 가장 많은 3,777회의 포격이 떨어졌다. 이런 포격으로 인한 광범위한 우르비사이드로 도시 내의 주거 지역 및 문화재가 광범위하게 파괴되었다. 


1993년 9월에는 사라예보의 거의 모든 건물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고 추정되었으며, 약 35,000채의 건물이 붕괴되었다. 특히, 파괴 대상으로 꼽힌 병원, 의료단지, 미디어 및 통신 센터, 산업 단지, 정부 및 군사 건물, UN 시설이 집중적으로 파괴되었다. 대통령 청사 및 국립 대학 도서관과 같은 건물도 포격을 받아 불에 타서 책 수천권이 소실되었다. 포격으로 인해 주민들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박격포 공격을 통한 민간인 대량 살인은 각 유럽 언론에 오르내렸다. 1993년 6월 1일, 사라예보에서 축구 경기 도중 세르비아군이 공격하여 11명이 사망하고 133명이 부상을 입었다. 7월 12일에는 물 보급을 기다리던 민간인 12명이 세르비아군에게 살해당했다. 1994년 2월 5일의 1차 마르칼 학살로 민간인 68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으면서 이 공격은 단일 공격 사상 최대 사망자가 나온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의료 시설은 많은 민간인들을 치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1993년의 이르마 작전과 비슷한 의료 후송 작전에서는 소수의 부상자만 치료 받을 수 있었다.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이 연합하여 공세를 시작하면서 전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세르비아군이 천천히 사라예보에서 철수하면서 도시의 전기, 난방, 물 공급이 다시 재개되었다. 1995년 10월에는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12월 14일에는 데이턴 협정을 맺으면서 평화가 찾아왔다. 포위전 기간 일어난 마지막 충돌은 1996년 1월 9일 오전 6시에 스릅스카 공화국군이 로켓 추진형 유탄을 트램에 발사하여 미르사다 두리치라는 이름의 55세 여성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 또한, 동시에 세르비아군이 점유하고 있던 그르바비차에서 수류탄이 투척된 사건이 발생했다. 


공격 이후 프랑스 평화유지군이 수류탄이 던져진 건물을 수색했으나 범인을 찾지 못했다. 이 공격을 했다고 의심되는 혐의로 체포된 사람도 없었다. 보스니아 정부는 1996년 2월 29일 세르비아계군이 도시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사라예보 포위전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사라예보에 있던 세르비아인 7만 명 이상이 무슬림 장악 지구에서 벗어나 소지품들을 모두 가진 채로 스르브스카 공화국으로 후퇴했다. 종전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총탄 자국 있는 건물이 많이 남아있으며, 내전 당시 시가지 외부와의 연결고리였던 '사라예보 터널'은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일명 '희망의 터널'로 불리는 곳으로, 사라예보 국제공항이 소재한 부트미르(Butmir)에서 사라예보 국제공항 활주로 밑을 통과해 사라예보의 시계지역인 도브리냐(Dobrinja)를 잇는다. 


건설 당시에는 이 두 지역을 잇는다 해서 'Objekt D-B'로 불렸다. 당시 사라예보 국제공항은 UN평화유지군이 관리하던 곳이어서 사라예보 포위전 당시 이 터널을 통해 여러 구호품들을 안전하게 이송하는 보급로로 활용됐다. 이 터널의 기점 중 하나였던 가정집이 후에 발각되면서 집주인이 세르비아 민병대의 무차별 공격으로 사망했는데, 이 집 벽에는 당시의 총탄 흔적과 핏자국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무려 1425일! 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가 보스니아 전쟁 당시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던 시간이다. 정확하게는 1992년 4월 5일부터 1996년 2월 29일까지로 이는 현대사의 수도 봉쇄 중 최장기간으로 기록된다. 10만 명 사망, 3만 2000명 실종 추정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보스니아 전쟁은 보스니아가 1992년 독립을 선언하자 이를 보이콧하고 도발로 여겼던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세르비아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수도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악지대 주변 60km를 봉쇄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100여 개가 넘는 골목에서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총격해 11,541명이 희생되었다. 300여 명의 보스니아 군인과 엔지니어들이 현지인들의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필수품, 시민군의 소형 무기를 외부에서 공급하기 위해 약 4개월에 거쳐 800미터에 달하는 지하터널(희망의 터널)을 1993년 7월 완공함으로써 장기간 저항을 유지하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약 4년 간에 걸친 이 봉쇄 기간의 마지막 단계였던 1995년 예술진흥단체 오발라아트 센터는 사례예보 영화제를 창립했다. 전쟁에서 꽃 피워낸 이 영화제는 침체된 시민들의 활기를 북돋워주고 시민사회를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탰다. 현재 영화제 행사가 집중된 시네플렉스 사라예보와 홀리데이 인 호텔은 1992년 대규모 반전집회가 열렸고 첫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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