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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프 티토 체제 이후의 유고슬라비아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5-26 17:56:43
  • 슬로보단 밀로셰비치(Слободан Милошевић, 1941~2006)의 등장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 위기

1980년대 말,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당수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Слободан Милошевић)는 코소보 지역에 대해 소수를 차지하고 있던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특혜를 주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해 차별성을 두는 정책을 입안함으로써 세르비아 민족진영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강성 세르비아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포자레바츠(Пожаревац) 출신으로 베오그라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대학 재학 시절의 동기인 이반 스탐볼리치(Ivan Stambolić)의 도움을 받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Savez komunista Jugoslavije)에 입당한 밀로셰비치는 이반 스탐볼리치의 지지를 받아 열혈 당원으로써 상임위원에 올랐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지만 서로 추구하고자 하는 사상은 달랐다. 이반 스탐볼리치는 철저한 티토주의자였지만 밀로셰비치는 민족주의자로 티토주의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1988년~1989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난 '반관료주의 혁명(Antibirokratska revolucija)' 당시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지방의 노비사드(Novi Sad) 등지에서 일어난 대규모 거리 시위, 출처 : Cambridge University Press & Assessment


이는 베오그라드 대학 강당에서 강연할 때 공산주의의 반동적인 민족(Hационалним)이라는 단어를 최대 300여 자 이상을 남발했을 정도로 강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때문에 사실상 티토의 눈 밖에 났을 정도였지만 당시에는 그의 정치성이 티토의 권력을 위협할 정도의 위상은 아니었기에 숙청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볼 때 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라는 것은 분명해보이는 인물이다. 티토의 사후, 경제 위기가 엄습해 오고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로 인해 연방의 붕괴 조짐이 보이자 이 때 유고 정가의 화두는 서로 각자 알아서 성장하자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다시 등장했고 이는 범슬라브민족의 연합이 아니라 서로 간에 남슬라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결과로 빚어진다. 세르비아는 밀로셰비치의 공작 하에 세르비아의 연방 내 권력 독점으로 흘러갔고 결국 연방에서 60석의 자리를 장악했던 세르비아는 연방 내 다른 공화국들을 차별하며 티토주의 철폐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민족 및 지역 갈등이 점점 크게 고조되었다. 밀로셰비치는 고위직에 오르면서부터 세르비아주의 성향을 드러내면서 각 공화국의 대표들과 지역 당원들에게 경계심을 부르고 있었다. 밀로셰비치는 1989년 5월 8일 세르비아 대통령에 등극한 뒤, 각종 정치 공작을 감행했다. 문제는 여기에 서방이 서서히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 소련은 고르바초프가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소련을 수정 자본주의로 체제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 있던 때였기에 비록 제 3국이지만 같은 공산주의 체제인 유고슬라비아를 도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소련의 경제가 거의 파탄 수준에 이를 정도가 되자 유고슬라비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다. 우선 서방이 가장 관심을 보였던 지역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였다. 이미 공산 시기 때부터 많은 교류를 했었던 곳이니 개입하기도 쉬웠다. 이어 미국의 CIA가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rvatska Demokratska Zajednica) 창당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의혹이 있었다. 


이에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의 대표인 프라뇨 투지만(Franjo Tuđman)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전당대회에 불러들여 CIA 개입설 등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도 대세에 따라 자연스레 일당 독재체제를 종식하기 위해 1990년 1월에 전당대회를 열었던 상황인데 다당제로 변환하는 상황에서 이미 크로아티아 대표인 투지만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다. 게다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지부가 1인 1표를 지지한데 반해 타 공화국 지부들은 1공화국 1표를 주장했던 상황이 빚어지면서 세르비아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격한 충돌이 발생한다. 그러자 세르비아 대표단은 필리버스터를 발동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고 이에 격분한 슬로베니아 대표단이 강하게 항의하자 밀로셰비치는 인민궁전의 경비대를 불러들여 슬로베니아 대표단을 궁전 밖으로 추방해버렸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대표단이 함께 퇴장하면서 결국 전당대회는 파행으로 치닫고 말았다.


크로아티아로 돌아간 투지만은 1990년 4월 22일부터 4월 23일까지로 단독 총선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세르비아 측의 방해를 우려하여 크로아티아 민병대와 일부 서방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민병대들이 철통 같은 보안을 펼친 가운데 4월 22일 역사적인 크로아티아 총선이 시작되어 전체 356석 중 205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1990년 5월 20일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9대 대통령이자 독립 크로아티아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크로아티아 총선의 모습을 본 다른 공화국의 지도자들도 평화 대신에 민족의 독립을 운운하며 민족 간의 분열을 부추겼고 보스니아의 무슬림 지도자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ć, 1925~2003)는 공공연히 "보스니아를 독립시킬 수 있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경 발언을 하면서 보스니아 영내에 거주 중인 세르비아계 국민들의 집단 반발을 불러왔다.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Milan Kučan, 1941~ )과 마케도니아의 키로 글리고로프(Киро Глигоров, 1917~2012)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탈당해서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 사회당을 창당했으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라도반 카라지치(Радован Караџић, 1945~ )의 세르비아 민주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의 민주행동당, 프라뇨 투지만의 크로아티아 자유당까지 득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부는 완전히 소외되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국가 존속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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