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훌륭한 시도는 실패를 하더라도 위대하다”
오늘 이른 시간에 명동에 나와 지금도 있고 저녁까지 있으려고 한다. 내일 사전투표일 민생이 열리는 대한민국 에너지를 받고 싶어서다.
두 여인
1953년 전후 첫 다방은 여사장 강석연이 열은 모나리자였다. 전후 명동의 첫 주점은 여사장 이명숙이 열은 은성이었다. 강석연은 가수였고 이명숙의 남편은 영화제작자였다. 이 두 여성은 예술인들을 아꼈고 젊은이들을 소중히 생각했다.
더 목마른 자들이기에 모나리자의 엽차는 시원하고 따뜻했다. 명동의 낮에는 모나리자가 청년들의 아지트였다. 화가 백영수 장욱진 김환기 등의 신사실주의 성향의 작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박인환 김수영 조병화 이봉구 정지용 전혜린 등이 오고 작가 지망생들은 이곳에 자신들이 쓴 작품을 두고 가면서 출판사 사장에 의해 선택되기를 기다렸다.
후에 가게 문을 닫으며 강석연은 말했다. ‘손님의 90%는 엽차만 마시고 갔고 차를 시킨 손님의 반은 외상이었다 내가 미용실에서 번 돈으로 임대료와 인건비를 지불했지’ 정말 그랬다.
이명숙은 매일 김치를 만들어 당시 단무지로만 있던 대폿집에 처음으로 김치를 안주로 내 놓았다.
이 두 가게의 공통점은 외상이 가능했고 외상을 하는 손님들이 대접을 받았다. 나는 오늘 이 두 여인이 없었다면 김환기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박인환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집에서도 친구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이들이 이 두 가게에서는 행복하게 차담을 하고 넉넉한 저녁반주를 즐겼다.
강석연은 가게가 문을 닫는 날 작가들을 찾아 다니며 담보로 맡겨진 만년필과 시계를 돌려주었다. 이명숙은 1986년 작고했을 때 아들 배우 최불암이 어머니의 6권 외상장부를 보았는데 작가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고 전부 어머니만 아는 별명으로 기록되어 작가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그 남자
1955년 명동에 메세나기업이 35살 김동근에 의해서 탄생되고, 그 결과 오늘 날 예총이 만들어졌다. 김동근(1920년~1956)은 청년이지만 사업수완이 좋아 여러 개의 사업을 성공시키고 특히 1950년 전쟁이후 미 8군 사진현상을 독점하였고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사진 홍보 간행을 위한 뉴스사진통신 사업을 위해 1951년 동방문화사를 만들었고 동방문화뉴스를 발행했다.
동방문화뉴스는 요즘으로 말하면 사진연합통신이다. <보도사진의 촬영 제공뿐만 아니라 한국고유의 민족문화를 수록하여 대외에 소개하고 대내 계몽선전에 기여하고, 주한 유엔군 및 우방제국에 대하여 사진문화를 통한 국제친선 및 문화교류를 촉진시키고, 해외문화를 사진을 통해 도입하여 국내 문화 진전에 공헌하고자> 라고 회사의 지향점을 말하고 있다.
동방사진문화사는 언론이나 정부에서 필요한 사진을 제공하였고 주로 낱장의 사진이나 사진엽서 형태로 제작하여 제공했다.
김동근은 1953년에는 미국 부통령이던 닉슨이 방한 때, 한국전쟁 전후의 사진을 관람시켜 주고 감사장을 받았다. 김동근은 이런 여러 활동을 하다 문화인, 예술가들과도 가까워졌던 것 같다. 명동에서 미 8군과 정부상대로 사업을 하던 그는 명동 예술인들이 귀한 존재인데 형편이 어려운 것이 안쓰러워 예술인들을 돕기로 결심한다.
시공관(현 국립예술극장) 관장인 이해랑과 만나 예술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자문을 받고 이후 지금 하동관 옆에 ‘동방문화회관’을 만들었다. 1층은 동방살롱으로 카페로 운영하고 2층은 작가들의 작업실이고 3층은 문화단체총연합회(현재예총, 당시 문총의 회장은 이헌구 이대문리대학장)사무실과 연회장을 만들어주었다. 작가, 화가, 연극영화인, 음악인과 언론인들에게는 오아시스였다. 1955년 8월25일 개관식에는 함태영부통령이 참석했고 동방문화회관 개관식이 대한뉴스에 나왔다. 그때 김동근 나이가 35살이었다. 문인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고 문총의 모든 재정을 김동근 혼자 감당하였다.

1950년대의 명동, 중앙일보
메세나기업이란?
로마제국 초기 정치인 마이케나스(Maecenas)는 시인들을 지원했다. 프랑스어로는 메센이라고 읽는다. 1967년 미국에서 기업들이 예술후원회를 발족되면서 그 이름을 메센에서 따와 메세나협의회를 만들어 지원하는 기업을 메세나 기업이라고 한다.
나는 김동근이 사망한 1956년 박인환이 사망한 1956년 이중섭이 사망한 1956년에 태어났다. 나는 이들을 이어가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다.독일에서 가장 가난했던 도시 베를린이 보배라이트 시장이 예술인들을 위해 공간을 제공하고 베를린에 온 해외 작가들에게도 기본소득을 제공함으로 베를린이 번영의 도시로 만들은 것처럼 대한민국이 대기업을 통해 국가 파이가 커지고 소상공인들을 통해 기술이 개발되고 빈곤층이 보호를 받는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남은 시간 대안을 제시하고 지혜를 모아주는 역할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순천시가 모나리자처럼 은성처럼 동방문화회관처럼 되고 손훈모 후보가 강석연처럼 이명숙처럼 김동근처럼 힘들지만 의미가 큰일에 온 몸을 던지는 리더가 되기를 소망하며 소상공인 최저소득보장제가 시작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시작이 반이다”
2026년 5월29일 사전투표가 중요해서 명동에서 기운을 받고 기운 있는 글을 이렇게 나눈다.
지난 일요일 종묘 인문학 걷기는 하는데 관람객 분들이 같이 듣고 싶다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동행했다. 나의 종묘 해설의 마지막 이야기는 “종묘를 찾아오신 여러분, 이곳에 계신 영령의 이름으로 조선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앞으로 잘 되실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 글이 보여 읽으시며 잠시 묵상하시는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축복합니다. 잘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