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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투르크 바예지드 1세와 아미르 티무르의 쟁패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5-30 00:12:54
  • 오스만의 입장을 중심으로

1402년 초 티무르는 다시 원정을 시작했다. 티무르의 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사기와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이 군대가 향할 곳은 드디어 그 바예지트가 다스리고 있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었다.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 앞서 티무르는 카프카스의 조지아를 공격했으며 이 조지아 원정은 티무르에게 간만에 지하드의 완성이라는 기쁨을 안겨 주기도 했다. 조지아 원정을 마치자마자 티무르는 곧바로 동부 아나톨리아로 밀고 들어왔고 이번에야 말로 티무르와 결판을 내기로 결심한 바예지트는 수년 동안 계속했던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마저 포기한 이후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중부 아나톨리아의 요충지인 앙카라에 도착한 바예지트는 참모들과 향후 전략에 대해 논의했는데 참모들은 방어와 감시에 유리한 이곳 앙카라에서 티무르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간언했으나 바예지트는 티무르의 군대가 아나톨리아 평원 깊숙이 들어오기 전에 국경의 산지에서 요격하자고 주장했고 앙카라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겨둔 후 동쪽 시바스로 나아갔다. 

폴란드의 오리엔탈리즘 화가 스타니스와프 흘레보프스키(Stanisław Chlebowski)가 1878년에 그린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힌 술탄 바예지드 1세(Sultan Bayezid prisoned by Timur)〉, 출처 : 우크라이나의 보리스 보즈니츠키 리보프 국립미술관


그러나 그 사이 티무르는 기동력이 뛰어난 자신의 군대의 강점을 이용해 카이세리로 우회하여 비밀리에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는데 성공해 바예지트의 빈자리를 제대로 공략했고 곧바로 티무르는 대군을 이끌고 앙카라에 나타나 앙카라를 포위했다. 바예지트는 토카트에서 티무르의 분견대와 교전을 벌이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놀란 바예지트는 앙카라로 황급히 회군했다. 그리고 7월 27일 앙카라를 포위하며 여유롭게 바예지트를 기다리던 티무르는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전속력으로 회군하였기 때문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며 지친 오스만 군을 맞이하게 된다. 기세 좋게 공격하여 올라가던 두 제국이 맞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양측 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대의 기록은 티무르 군을 80만 내지는 120만으로, 오스만 군을 40만에서 80만까지 부풀리고 있어 오히려 혼란은 더한다. 


티무르는 이전까지 자신의 주요 원정에서 수십만 이상의 전력을 동원한 전례가 없으며, 바예지트 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수치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로 인해 데이비드 니콜레(David Nicolle)는 티무르의 군을 14만, 바예지트의 군을 8만 5천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일한 니아즈(Ilhan Niaz)는 티무르 군을 10만, 오스만 군을 8만 5천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티무르 군은 시리아 원정에서 얻은 막대한 부를 활용해 전력을 최대한 증강시켰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투르크계 공국들의 전력을 끌어 모아 티무르의 지휘 경력 상 최대 규모의 군대를 편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력은 투르크-몽골 계열의 경기병이었으며, 인도 원정에서 획득한 다수의 전투 코끼리 또한 편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보병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티무르 군의 좌익 지휘는 티무르의 막내아들이자 후에 티무르 제국 3대 군주로써 명군이라 추앙 받는 샤 로흐였다. 그는 티무르의 손자로 2대 군주에 올랐다가 샤 로흐에게 찬탈당하는 할릴 술탄이 맡았고 우익 지휘는 티무르의 아들이자 할릴 술탄의 아버지인 미란 샤가 맡았다. 전위는 티무르의 손자인 아부 바크르가, 친위대는 티무르의 외손자인 술탄 후세인, 중앙군은 피르 무하메드가 맡았다. 물론 최고 지휘관은 티무르 자신이었다. 어느 정도 병과와 군제가 정돈된 티무르 군과는 달리 바예지트 1세의 오스만 군대는 여러 군대가 혼재한 혼성 군에 가까웠다. 술탄 자신은 1천 여의 예니체리들의 호위를 받았고 군의 주력은 시파히 기병들이었으나 투르크계 공국들이 파견한 병사들도 다수 있었다. 또한 발칸 반도의 유럽 봉신들도 다수 참전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세르비아 공작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지휘하는 기병 5천에서 1만 명 가량이 주력이라 할 만 했다. 


오스만 군의 우익은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좌익은 바예지트 1세의 아들 슐레이만이 맡았다. 여기에도 최고 지휘관은 물론 바예지트 1세 본인이었다. 전투는 다음 날인 28일 오스만 군이 티무르 군에 선공을 걸면서 시작되었다. 급하게 돌아와서 피로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티무르 군이 이미 앙카라 일대의 물줄기를 돌려 수원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티무르 군을 돌파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바예지트의 패착이 되고 말았다. 앙카라에서 급하게 돌아온 이상 어쩔 수 없이 앙카라에 도착한 그 날 하루를 쉬고 다음 날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사이 앙카라 인근의 마을들을 약탈하느라 흩어져 있던 티무르의 군대가 재규합하는 시간을 준 것이다. 차라리 피로한 상태였더라도 앙카라에 도착한 27일 그날 티무르를 공격했으면 바예지트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이 때 티무르는 오스만 군이 혼성 부대라는 약점을 이용해, 미리 아나톨리아 일대의 투르크 출신 병사들에게 밀사를 보내 이간질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적중했다. 급한 행군으로 인해 몹시 피로한 상태였던 오스만 군은 그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공세를 감행하는 근성을 보였으나, 투르크계 공국들에서 파견한 병사들의 이탈이 계속되면서 결국 내부에서 혼란을 통솔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 투르크 군뿐만 아니라 오스만 군의 중핵이었던 시파히까지 티무르 군에 항복하기 시작하자 오스만 군의 붕괴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었고, 얼마 안 가 패주하기 시작한다. 이에 티무르 군은 전과확대를 기도했고, 바예지트 1세는 예니체리를 중심으로 저항을 시도해 보았으나 티무르는 인도에서 데려온 전투 코끼리 부대를 내세워 이들을 공략했다. 이 때에 투르크 군이나 시파히 기병대보다 오히려 유럽 봉신 군대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더욱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좌익을 지휘했던 슐레이만 또한 세르비아 기사단의 구원을 받고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했다고 한다. 


이들은 티무르 군의 화살로도 뚫리지 않는 중갑으로 인해 티무르 군의 진형을 여러 차례 헤집어 놓는 등, 그나마 가장 크게 활약했으며, 티무르로부터 마치 사자와 같이 전투를 벌였다는 칭찬까지 했다. 전황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닫자 바예지트 1세는 도주를 기도했으나 실패, 포로로 잡혔다. 단 하루 만에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주력 군대가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르지도 못하고 패배한 것이다.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의 군대는 아나톨리아 전역을 장악하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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