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스로픽 "AI 곧 스스로 발전…개발속도 늦춰야"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277/0005772274아시아경제구독앤스로픽 "AI 곧 스스로 발전…개발속도 늦춰야"오수연 기자AI 빠른 발전 위험성 경고핵무기 조약 같은 체계 필요앤스로픽이 4일(현지시간) 인공지능(AI) 연구소들이 개발 속도를 늦추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AI가 너무 빠르게 발전하면서 곧 인간의 개입 없이 스...
로마는 내부적으로 신분 투쟁을 통해 공화정 체제를 형성하면서, 한편 대외적으로는 계속된 군사 정복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마지막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축출된 뒤 일시적으로 라티움(Latium) 지역에서 로마의 군사적 지위가 약화된 것이 확실하다. B.C 493년에 로마는 라티움 지역 도시들의 연맹체인 라티움 동맹과 카시우스(Casius)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게 된다. 카시우스 조약은 로마와 라티움 동맹 간의 군사 협조를 명문화한 것이었는데, 이를 근거로 로마는 수많은 도시들의 연맹체인 라티움 동맹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정도로 강한 정치적 입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B.C 5세기 말이면 왕정 시기 로마와 라티움 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에트루리아가 약화되며, 로마는 그 세력의 공백을 메우게 된다. B.C 5세기 로마와 라티움 동맹국은 인접 산지 민족들, 특히 아이퀴(Aequi)와 볼스키(Volsci)의 침공을 막아냈다. 그 이후 로마는 티베리우스 강 북쪽의 에트루리아의 강력한 도시인 베이(Bei)를 오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하고 영토를 병합했다.

고대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삼니움 전쟁(Samnite Wars), 그중에서도 특히 제2차 삼니움 전쟁(B.C 326~B.C 304) 시기의 세력 판도와 로마의 진격 경로,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그러나 B.C 387년 로마는 북쪽에서 내려온 켈트족의 침략으로 인해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제외한 로마 시를 7개월 동안 점령당해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고, 대외적인 위신도 실추되었다. 그 이후 40여 년 동안 로마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이전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B.C 349년에 다시 침공해 온 켈트 족을 격퇴했다. 로마는 B.C 343년부터 약 B.C 290년까지 삼니움과 세 차례의 전쟁을 벌여 모두 승리했다. 삼니움 족과의 전쟁이 일어난 계기는 삼니움 족이 라티움 남쪽에 위치한 캄파니야(Campaniya) 주를 침공했으며 라티움 주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로마가 이에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손쉽게 끝난 1차 삼니움 전쟁 (B.C 343~B.C 341)에 비해 2차 삼니움 전쟁(B.C 326~B.C 304)이라는 22년에 걸쳐 지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삼니움 족의 근거지인 아페나인(Apenain) 산맥이 방어에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카우디네(Caudine) 협곡에서 두 명의 집정관과 그의 병력들이 모두 생포되는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5년 동안의 소강상태를 갖게 된다.
그 이후 패배에서 회복한 로마인들은 반격을 시도하여 삼니움 족에게 승리를 거듭하고 삼니움 족은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으나 로마인들은 이들을 모두 격파하면서 2차 삼니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는다. 3차 삼니움 전쟁은 삼니움 족,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켈트 족이 연합하여 로마와 전쟁을 벌인 것이다. 로마인들은 남부에 위치한 삼니움 족을 격파하여 그들의 세력을 북쪽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에 대항한 이들 3개의 연맹체는 거대한 군대를 조직하여 로마군과 센티눔(Sentinum)에서 맞서게 된다. 초기에 로마군은 이들 연합군의 맹공에 고전하였으나 집정관인 푸빌리우스 데키우스 무스(Publius Decius Mus)가 적진에 돌진하여 전사했다. 그러나 이는 로마군의 사기를 고양시켜 이들은 불리한 전황을 뒤집고 결국 승리하게 된다. B.C 295년에 벌어진 센티눔 전투는 양측이 통합 10만의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회전이었고 로마가 이 회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가 삼니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C 291년까지 삼니움 족은 지속적인 저항을 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다음 해인 B.C 290년에 로마에 굴복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결국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제패하게 된다.
그 사이에 B.C 340년 로마의 동맹 주도에 불만을 품은 라티움 동맹국이 로마에 대항하여 라티움 전쟁이 일어났으나,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으며 라티움 동맹도 해체되었다. 로마는 동맹을 해체하는 대신 라티움 도시들을 자치 도시로 삼아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주는 동시에 로마에 정치적으로 흡수했다. 로마가 중부 이탈리아 반도를 평정하고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이탈리아 남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자 이를 우려한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그리스 도시 타렌툼(Tarentum)은 에페이로스(Epeiros)의 피로스(Pyros)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이로써 피로스 전쟁이 발발했으며 피로스는 이 전쟁에 적극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는 로마를 격파하게 되면 이탈리아 남부를 그들의 영향 하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피로스는 로마를 제압하여 이탈리아를 그의 패권 하에 두고 그 뒤 시칠리아를 장악한 이후,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다음 이를 토대로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의 국가들의 맹주 역할을 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피로스의 야심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그들의 군사적인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B.C 280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피로스는 로마군에 상당한 승리를 거두지만, 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피로스의 전사자는 로마군 전사자의 7할에 육박하는 피해를 입게 된다.
이 때 로마는 피로스에 대항하여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 국가들과 전쟁 상태였으며 이들 시칠리아 도시들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계 도시와 동맹 관계였다. 남부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시칠리아의 도시 국가들 역시 피로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상태였다. 앞서 호언한 대로 시칠리아에 대해서도 야심이 있었던 피로스는 강한 로마 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이탈리아 내에서의 전쟁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여 시칠리아로 떠나게 된다. 시칠리아에서 피로스는 승리를 거듭하였으나 카르타고는 막강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꾸준한 보급을 통해 친 카르타고 도시들은 성공적으로 저항하였으며 따라서 피로스는 해군을 편성하기로 결정한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여실히 증명한 것과 같이, 강한 해군력 없이는 시칠리아 섬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피로스가 해군 편성을 하기 위해 시칠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에게 요구한 군자금은 그 도시들에게 있어 큰 부담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피로스에 강한 적개심을 보이며 협조를 거부하게 된다. 피로스는 시칠리아에서의 전쟁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하지만 피로스가 이탈리아를 비운 기간 동안 로마인들은 꾸준히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따라서 전황은 과거보다 피로스에게 더 불리하였다. 피로스는 이에 베네벤툼(Veneventum)에 머물던 로마군을 기습하기로 하고 로마인들이 건설한 가도를 타고 북상하나 로마인들이 이를 파악했기 때문에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피로스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피로스의 전쟁 의지를 일소시키는데 충분하였다. 따라서 피로스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한다. 로마는 피로스가 없는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을 그들의 패권 하에 넣었고 그리하여 로마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부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