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든지 성사되기 전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원리는 일상의 경험에서뿐만 아니라 고도의 추상적인 과학 탐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국의 뛰어난 과학 철학자 K Popper(1902-1994)는 아예 과학이냐 비과학이냐의 기준을 오류에 대한 개방성에 두었다. 20세기 초 비엔나 서클(Vienna Circle)의 학자들은 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 명제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검증 가능성'(Verifiability)이란 기준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의미 있는 명제와 의미 없는 명제의 구분이 그것이다. 의미 있는 명제는 경험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경험 명제 (예를 들면 "지금 바깥에 눈이 오고 있다")와 논리적인 명제 (2+7=9)이고, 의미 없는 명제는 형이상학의 명제("신이 존재한다."와 같은)나 가치 판단이 따르는 윤리적인 명제("저 사람은 나쁘다"와 같은)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서양 철학 2천 년의 역사 동안 진행된 '신 존재 증명' 같은 것은 한 마디로 '무익한 열정'(사르트르)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윤리학의 명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때문에 일찍이 D. Hume이 형이상학에 관한 책들은 불쏘시개로 쓰는 게 낫다고 한 것처럼, 그들은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명제들은 개소리처럼 무의미하다(meaningless) 할 뿐이다. 하지만 개 짖는 소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개들 특유의 소통 방식이자 신호 전달 방식이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중심주의의 편견일 뿐이다.
이에 대해 K. Popper는 의미와 무의미, 과학과 비경계는 그런 닫힌 기준이 아니라 시행착오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미래의 시간에 열려 있는 '열린 체계'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그가 제시한 기준이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는 검증 가능한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 하나의 이론 혹은 가설이 얼마나 반증 가능성에 열려 있느냐에 달려 있다. 과학은 항상 설명을 위한 가설에서 시작하고, 이 가설이 얼마나 반증 가능하느냐에 따라 결정이 된다. 반면 형이상학이나 신학 혹은 윤리학의 명제들은 반증 가능이 불가능한 '닫힌 명제'이다. 이런 것들은 비판이 들어오면 끊임없이 다른 이유를 들어 자기 체계의 합리화를 꾀한다. 때문에 이런 것들은 결코 반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포퍼는 이 '반증 가능성'의 기준에 따라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란 유명한 사회 철학서를 통해 플라톤과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철학을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열린 사회에 대한 적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Popper의 이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포퍼의 명확한 '반증 가능성'의 이론도 반증 가능하지 않느냐에 댭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try and error와 같은 Popper의 '반증 가능성'을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과 연결시키려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시행착오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인간관계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친구들과의 관계나 비즈니스 관계, 그리고 부부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트러블이 일어날 수 있다. 또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무슨 일을 하다 보면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나중에 싸움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자기 관점이나 입장에서 보는 경향이 많다. 물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이해관계가 걸린다든지 감정적인 문제에 부닥치면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모든 갈등과 분열은 이런 것들에서 생기고, 유한한 인간들의 관계에서 그러한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갈등 상황의 불가피성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푸느냐의 해법과 대안이 더 중요하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들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들을 해결해서 새롭고 좋은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이를 '변증법적 지양'(dialektische Aufheben)이라는 표현으로 설명을 한다. 여기서 지양한다(aufheben)라는 말은 나쁜 것은 '페기'하고 좋은 것은 '보존'하며, 아울러 다음 단계로 '끌어올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갈등과 분열의 관계도 문제를 잘 해결하면 얼마든지 보다 낫고 좋은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다. 일종의 변증법적 지양인 것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라는 우리 속담의 의미도 그와 다르지 않다. 비가 오는 것 자체가 불편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나쁠 수도 있다. 하지만 비가 그치고 해가 환하게 들면서 질척거리던 땅이 다시 굳어지면 과거보다 훨씬 단단해질 수 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불편과 불안으로 힘들었던 긴장 관계를 잘 해결하면 훨씬 더 좋아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비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 비가 지난 후에 더 굳어질 땅을 만드는 일이 더 의미 있고 좋은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