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칸트와 헤겔의 무한판단 2
  • 타라고
  • 등록 2026-04-10 12:16:37
(이어짐)

4.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정신은 뼈다’는 판단을 정신분석학의 전통 속에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칸트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헤겔의 철학과 결합하고 있다. 지젝은 특히 이 책의 6장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장에서 ‘정신은 뼈다’의 의미를 무한 판단과 관련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지젝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의 ‘숭고함의 논리’와 『순수이성비판』 ‘분석론’의 사물 자체(Ding an sich)와 ‘무한 판단’, ‘변증론’에 등장하는 ‘안티노미’와 ‘사유물’(Denkding)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헤겔의 '무한판단'과 연결시키고 있다.



잘 알다시피, 칸트에게서 ‘사물 자체’(Ding an sich)는 인간 인식과 관련해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역할을 한다. 첫째, 칸트의 초월 철학은 ‘감성론’에서 경험주의의 수동적 인식과 다르게 인간 인식의 능동적 측면, 사유 형식의 선험적인(a priori) 측면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런 선험적인 사유의 형식은 경험 대상에 대해 능동적으로 관계할지라도 그 대상 자체를 창출할 수는 없다. 직관의 소재는 철저하게 인간 인식을 초월하는 대상 X로부터 온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 자체는 인식에서 감각을 촉발해(affizieren) 직관의 소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것은 사유 형식의 근원적 제약이고, 사물 자체는 이 사유 형식 밖에 존재하는 X이다. 반면 인간의 선험적인(a priori) 형식에 의해 구성된 현상은 사물 자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시 말해 현상은 사물 자체와 근원적으로 불일치한다는 것이다.



둘째, 사물 자체는 ‘변증론’(Dialektik)에서 인간 인식의 완전성과 총체성을 지향하는 ‘이념’(Idee)의 역할을 한다. 이런 초월적 대상은 순수한 의미의 사유물(Gedankending) 이어서 경험적 직관이 불가능한 공허한 개념일 뿐이다. 인간 인식의 유한성으로 인해 우리는 그것을 생각(denken)은 할 수 있어도 인식(erkennen)을 할 수가 없다. 칸트는 안티노미(Antinomie)에서 이런 사유물에 대한 오성의 범주적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유물에 대해서는 긍정 판단도 맞고 부정 판단도 맞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대상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서 경험적 직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유 형식은 이러한 대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소극적 의미에서 일종의 한계(Grenze)를 긋는 것이고, 그것을 인간 인식의 부재와 공백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지젝은 사물 자체에 대한 한계 경험, 언제나 부정성으로만 다가오는 사유 대상을 『판단력 비판』의 ‘숭고미’와 연결시키고 있다. 칸트에게서 미(美)란 쾌락을 매개로 해서 다가오지만, 숭고(崇高)는 불쾌를 매개로 해서만 가능한 역설적 쾌락이다. 이처럼 숭고한 것은 세계 내의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대상이 초월적이고 초경험적인, 도달 불가능한 사물 자체와 맺는 관계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 자체나 사유 대상 그리고 숭고한 것은 공통적으로 감각적 대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불가능성 자체, 표상에 대한 항구적인 실패를 지시하는 것이다. 숭고미의 경우도 이러한 압도적 불일치의 경험을 통해 불쾌를 매개로 한 쾌락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셋째, 지젝은 사물 자체와 사유물, 그리고 숭고미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무한 판단과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에게 무한 판단은 절대적 불일치와 항구적 실패를 함축하는, 판단이 아닌 판단, 혹은 그가 판단의 형식을 넘어서 새로운 진리의 현상 형태로 염두에 두었던 ‘사변적 명제’이기도 하다. 그에게 부정 판단의 ‘죽지 않음’(not dead)과 무한 판단의 ‘안-죽음’(Un-dead)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쉽게 하기 위해 지젝은 부정 판단과 무한 판단의 차이를 주어와 술어 간의 모순적 관계와 이율배반적 관계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부정 판단의 경우 모순 관계처럼 주어와 술어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관계의 한 항이 옳으면 다른 항은 틀리고, 그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죽음(dead)과 죽지 않음(not-dead)은 상호 모순적이다. 배중률에 따르면, 모순 관계에서는 중간이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살아 있거나 죽어 있거나이다. 반면 무한 판단의 경우는 칸트가 말한 이율배반(Antinomie)과 같다. 앞서 지적한 ‘사유물’에서 보듯, 이러한 대상은 경험적 직관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직관에만 적용이 가능한 오성의 범주로는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없다. 그 점에서 이율배반은 긍정과 부정의 관계를 초월한 제3의 지향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죽음'과 '죽지 않음'처럼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안-죽음’으로서 좀비와 같은 괴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판단과 달리 ‘영혼은 안-죽음이다’는 무한 판단의 긍정적 규정(Un-Dead)은 사물의 긍정적 지위를 '미결정' 상태로 남겨둠으로써, 술어의 긍정과 부정에 공통적인 기반을 허무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 무한 판단의 논리야말로 칸트철학에 은폐된 진정한 의미의 철학적 혁명의 논리이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not human)’(부정 판단)와 ‘그는 비-인간(inhuman)이다’(무한 판단)는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전자가 동물이나 신처럼 인간성에 ‘외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비인간)는 인간 안에 ‘내재하는’ 끔찍스러운 '과잉'(surplus)이다. 칸트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은 외부적인 동물적 쾌락이나 신적 광기와 싸우는 이성적 인간이었던 반면, 칸트 및 독일 관념론에 들어서면서 싸워야 할 과잉은 절대적 의미에서 '내재적인 주관성 자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의 빛’과 달리 여기서의 주관성의 핵심은 언제나 '밤'(night)의 은유로 표시된다.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오래된 서적(書籍).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칸트의 이율배반은 비로소 이 '제3의 지대'를 열어준 것이다. 이제 3의 지대는 초월적 대상 X로서의 ‘사물 자체’이기도 하고, 대상이 없는 공허한 개념으로서의 ‘사유물’ 혹은 ‘예지체’(Noumena)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우리의 유한한 사유가 할 수 있는 전부는 그것 너머에 대해 일체의 긍정적 진술도 하지 않은 채 모종의 한계를 긋는 것이자, 우리 인식의 장을 제한하는 것 뿐이다. 그리하여 ‘사물 자체’는 우리 경험의 유한성으로 인해 영원히 공허한 상태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공백(空白)이자 순수한 부재(不在)로서만 주어진다. 지젝은 그것을 섬뜩한, 금지된/불가능한, 실재적인 사물의 영역, 즉 선과 근본악이 겹치는 곳이라서 사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야 했던 영역과 초월적으로 구성된 현실을 구별해낸다.








5. 지젝은 헤겔의 ‘무한 판단’ 역시 이러한 불일치를 통해 역설적으로 이데아의 절대적 부정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지젝의 무한 판단 해석은 『대논리학』에 드러난 무한 판단의 형식에 한정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데 있다. 하지만 칸트와 헤겔의 무한 판단 간에는 분명한 차이도 있다. 앞서 이야기를 했듯, 칸트의 무한판단은 부정 술어가 주어와 긍정으로 관계를 맺는다 (‘영혼은 안-죽는다’ /S is ~P)이다. 반면 헤겔의 무한판단은 주어와 술어가 긍정적 관계를 맺는다 ('정신은 뼈다'/S is P). 여기서 둘 간의 차이는 술어 P에 있다. 칸트가 말하는 P는 질적 관점(안-죽음)에서 주어를 제한하지만 동시에 주어를 무한으로 편입시킨다. 반면 헤겔이 말하는 P는 주어와 전혀 무관하다 (정신-뼈). 비록 표상적 의식이 가시적인 사물(뼈) 속으로 정신을 가두려 하지만, 그 둘은 완벽한 불일치를 연출할 뿐이다. 마치 선사들이 하는 선문답과 똑 같다. '부처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똥 막대기다.'는 말이 그렇다. 이러한 완벽한 불일치를 통해 통상적 사고는 완벽하게 파국을 맞는 것이다.



두 번 째로 지젝은 헤겔의 무한 판단이 칸트의 무한 판단의 정신을 더 극단적으로 몰고 간 것이라고 말한다. 칸트의 사물 자체는 불일치와 부정성으로 지시되는 현상의 무력함을 보여준 점에서는 혁명적이지만, 그 너머의 초월적 대상, 다시 말하면 현상 바깥에서 초월적 대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는 전통 형이상학의 전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헤겔에게 현상 너머에는 정확히 “절대적 부정성, 그 개념과 현상의 극심한 불일치라는 무(無)”만이 있다. 마찬가지로 숭고한 것은 초월적인 사물 자체를 가리키는 경험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부정성으로서의 순수한 무, 공백으로서의 사물의 빈자리를 대체하고 채워버리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뼈다’, ‘국가는 군주이다’, ‘신은 예수이다’는 칸트의 무한판단과 형식은 달라도 모두가 주어와 술어가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고 비교 불가능한 판단이자 무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이런 불일치와 한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신현상학』의 관상학과 골상학의 다소 기이한 서술과 맥락도 충분히 이해될 수가 있다. 관상학은 모종의 신체적 요소, 겉으로 드러난 특성을 통해 내면의 정신을 재현(represent) 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 혹은 기표적 표상은 궁극적으로 정신을 재현하는데 실패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실패에 방점이 주어질 수 있다. 골상학은 관상학의 재현의 불가능성을 넘어서 뼈의 현존을 통해 기표적 표상의 불가능성을, 그 공백을 메우고자 한 것이다. ‘정신은 뼈다’라는 명제는 모름지기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가장 고급한 것과 저급한 것의 결합... 생식 기관과 배설 기관의 결합”이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역설적 동일성을 재현한 것이다. 이 점에서 ‘뼈’는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표상의 불가능성, 공백을 사물의 형태로 구현한 점에서 ‘환상-대상’인 것이라고 지젝은 해석한다. 골상학의 뼈는 이러한 기표적 표상의 불가능성, 그 표상의 실패를 통해 대타자 내에 열린 공백이고, 이 공백을 통해 상징계의 그물망 속으로 '실재계'가 침입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지양과 화해를 강조하는 통상적 의미의 변증법적 운동과 다르게 헤겔식의 운동에는 화해와 종합을 끊임없이 벗어나는 어떤 ‘잔여물’이 있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주체는 엄격히 이러한 ‘잔여물’에 상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는 자신의 타자성과 부정성을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삼는, 절대부정적 주체이다. 이러한 주체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이나 혹은 ‘자기 자신의 타자’라는 의미에서 헤겔 철학의 핵심으로 간주되고 있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거듭 강조하듯, 정신을 "절대적 타자 존재 속에서의 순수한 자기 인식"으로 규정했을 때의 의미는 오로지 '타자화'를 통해서만 자신을 획득하는 정신의 부정성을 지시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무한 판단을 근원적 불일치와 실패, 제3의 지향, 자기 관계하는 절대적 부정성, 라캉이 말하는 빗금 친 주체’로 이해하는 지젝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칸트와 헤겔 철학 속에 담긴 혁명적 핵심을 그 근원에까지 추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똑같이 이런 지젝의 해석을 발전시켜 그것을 이 글의 모두(冒頭)에서 제시한 선문답의 예에도 똑같이 적용해 볼 수가 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이나 불법(佛法)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에 대해 ‘뜰 앞의 잣나무’나 ‘차나 마시게’, '부처는 똥 막대기'라는 식의 응답은 질문하는 실체에 대해 모종의 적극적 규정이나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긍정적으로 규정할 경우, 그 순간에 문제의 대상은 실체화되고 언어 자체가 도그마화될 수 있다. 선은 늘 이런 관습적이고 고정된 언어를 초월하는 데서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선사가 제시하는 말은 달마가 온 까닭이나 불법과 같은 것이 결코 긍정적 규정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뜰 앞의 잣나무’라는 말은 답변의 항구적 실패의 가능성, 언어와 불법(佛法) 간의 절대적 불일치를 가르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답변은 부처나 불법은 제한된 언어의 의미에 가둘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이러한 무의미하고 불일치하는 답변을 통해 참다운 답변을, 혹은 그 답변을 깨우칠 수 있는 ‘영혼의 팽창’과 깨달음을 구하려는 화두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제시한 예들을 통해 무한 판단이나 선(禪)을 공통적으로 특징짓고 있는 것은 항구적 불일치와 부정을 통한 제3의 절대로의 확장이라 할 것이다.

















0
유니세프
국민 신문고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