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물론 전업으로 하는 프로와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간에 기량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프로는 현재의 직업에 생계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목숨 걸고 매진을 한다. 반면 아마추어는 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할 수는 있어도 생계를 위한 직업이 있기 때문에 절대 시간의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가 전부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기량 차 외에도 시야의 차이가 더 크다고 본다. 기량은 열심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훈련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판세 전체를 읽는 시야의 차이는 기량의 차이와는 다른 의미를 띠고 있다.
예를 들어 축구에서 아마추어는 공을 잡으면 그 공을 지키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드리블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반면 프로는 공을 잡는 순간 함께 움직이는 다른 동료들이 어디에 위치해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파악한다. 그래서 자신이 드리블하는 이상으로 누가 더 최적한 가를 빨리 파악해서 그쪽으로 연결할 수도 있다. 물론 아마추어도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만 그 정도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마찬가지로 초보 운전자는 자기 앞에 있는 차의 움직임에 더 주목한다. 그래서 운전대와 운전자의 좌석 간의 거리도 굉장히 좁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운전을 하려면 앞차와의 문제뿐 아니라 사이드 미러를 통해 옆 차들의 움직임도 주시를 해야 하고, 백미러를 통해 뒷차의 움직임도 주시를 해야 한다. 그리고 앞차의 경우도 바로 앞만 보는 것이 좀 더 먼 곳의 신호등도 봐야 한다. 때문에 노련한 운전자는 운전대와의 거리를 시야가 충분히 확보될수록 일정하게 유지를 한다.
이런 일은 다른 어떤 분야, 어떤 직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칼럼이나 논문 혹은 저서를 집필할 때도 시야의 문제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주제를 정하는 순간 -사실 이 주제를 정하는 작업에도 시야가 개입한다- 이 주제와 관련된 다른 주제들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다른 연구자들 혹은 작가들의 연관되거나 선행된 글들을 검토해야 하고, 자기가 쓰려는 글이나 논문 혹은 책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의 영향 등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과 관련한 최신 연구 동향과 국제 학계의 동향도 알아야 한다. 이런 선행적인 작업들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의 글은 대단히 제한적 내용만 담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미나이의 그림>
기량과 시야의 차이 는 어디에 있을까? 기량은 단순 반복적인 훈련이나 연습량의 차이에 많이 의존한다.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연습하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운전할 경우 자연스럽게 기량이 늘 수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기량이라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시야는 질적인 개념이라 할 수도 있다. 시야는 일종의 깨달음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반복적인 훈련과 연습을 하다가 어느 순간 "도대체 이 모든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왜 이런 일을 하는가?" 등의 물음을 제기하면서 그 답을 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어느 순간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다르게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깨달음이 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거의 모든 일에서 마찬가지로 일어날 수가 있다. 이런 깨달음이 오면 새로 하는 작업은 그 이전의 작업가 달라진다. 동작 하나하나가 달라지고, 보이는 사물 하나하나가 다른 의미를 띠기도 한다.
나는 한국의 인문학자나 철학자들이 연구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열심히 집중하고 꾸준히 지속하는 일은 모든 학자들이 지켜야 할 덕목이다. 이런 면에서는 한국의 인문학자들이나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시야'이다. 자기가 쓰는 글들, 논문들 그리고 책들이 갖는 의미에 대한 물음이다. 이런 물음은 모든 문제들을 대할 때 근본적인 태도 전환을 요구한다. 말하자면 기존의 것들을 뒤 업거나 기존의 틀을 벗어나서 다른 대안들(another alternatives)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요구한다.
'에세이철학'은 '철학의 대중화, 대중의 철학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자기 삶과 사회에 대한 반성과 사유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일종의 철학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철학자들은 이런 운동이나 혁명에 전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내가 접촉해 본 오랜 동료들을 위시한 여러 철학자들에게 메시지를 주기도 했지만 거의 반응이 없다. 그저 남의 텍스트들 가져다가 설명하고 해석하고 번역하는 일이 철학자들의 하는 일 전부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한 마디로 자기 생각과 자기 언어가 없다 보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와 다름없다. 당최 우물 바깥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에 대해 관심 없고, 오로지 우물 안의 세계가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이들에게 '새로운 철학'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도 기대무망하는 것이 속 편할지 모른다. 오호 통재라(嗚呼痛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