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주의를 정립하고 발전시키며 확산시킨 이들이 '1860년대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반체제 혁명 운동의 새 세대로 자처하고, 선배들을 옛 세대라고 비판하면서 '1840년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과격하게 사고하고 행동했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 이론가이며 운동가가 체르니셰프스키(Николай Гаврилович Чернышевский, 1828~1889)였다.

니꼴라이 가브릴로비치 체르니셰브스끼(Николай Гаврилович Чернышевский, 1828~1889)의 집, 출처 : Википедии, Чернышевский, Николай Гаврилович
체르니셰프스키 역시 라즈노치네츠 출신으로, 이미 대학생 시절에 차리즘의 파괴를, 곧 러시아의 혁명을 주장하게 되었다. 지방의 교사로 출발했던 그는 곧 수도의 출판계로 전직하여, 벨린스키의 제자뻘로 당대의 정상급 시인인 네크라소프(Nikolai Nekrasov)가 이끌던 잡지 「소브레멘니크(Sovremennick : 동시대, 현대, 동시대인, 현대인 등으로 번역됨.)」의 편집에 참여하게 되었다. 「동시대인」은 「러시아의 말(Russkoe Slovo)」과 더불어 과격한 잡지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에서 제일 가는 월간지로 자리를 굳히게 되는 「동시대인」에서의 활동을 통해 그는 곧 도브롤류보프(Nikolai Dobroliubov) 및 피사레프(Dmitrii Pisarev)와 같은 젊은 급진주의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함께 과격한 혁명주의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피사레프는 제정러시아의 독특한 사상적 조류인 니힐리즘(Nihilism), 이른바 허무주의를 정립하고 전파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꼽힌다. 이들에게는 곧바로 불운이 뒤따랐다.
도브롤류보프와 피사레프는 요절했고, 체르니셰프스키는 투옥되었다. 만 34세의 체르니셰프스키는 그 때로부터 2년 동안 계속된 첫 번째 옥중 생활을 보람 있게 보냈다. 「무엇을 해야 하나?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What Is To Be Done? Tales about New People)」이라는 정치소설의 집필을 통해 '사회주의 러시아 국가'의 상(像)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지식인의 사명은 인민을 교육함과 아울러 지배층을 각성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는 지식인에 의해 계몽된 인민이 이끈 차리즘의 타도와 사회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 질서'의 창건을 제창했다. 그러면 농업적인 국가인 러시아가 어떻게 사회주의적 질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유럽에서 이미 비판되고 있는 불건전하고 부도덕한 자본주의의 단계를 거쳐야 할 것이 아닌가?
이 물음에 대해 그는 '회피의 원칙'과 '역사의 도약 이론'을 제시했다. 러시아는 러시아 특유의 농촌공동체적 전통을 잘 살림으로써 자본주의의 단계를 회피하고 사회주의의 단계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물론 헤겔(Georgy W.Friedrich Hegel, 1770~1831)이 제시했던 변증법적 역사 발전 과정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그 주장은 러시아의 농민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하고 싶었던 1860년대와 1870년대의 러시아 청년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