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절강성 항주에서 느낀 의문 |
| 항주에 여행을 가봤다. 관광지 말고 시내만 줄창 돌아댕겼다. 조그만 동네 골목 식당,시내버스 안,도심의 번화가를 쏘다니며 항주시민을 구경했다. 그러면서 느낀 점. "한국인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우리가 흔히 중국인하면 떠올리는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없고 그냥 한국의 거리 모습 그 자체였다. 상대적으로 옷차림이 수수하고 극단적인 북방계 타입이 다소 적을 뿐. 분명 '중국인은 혈통과 뿌리가 한국인과 전혀 다른 민족'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동질적인 인간들이었다. 흔히 몽골이나 시베리아사람을 보구 한국인이랑 똑같이 생겼네~ 역시 우리와 뿌리가 같은 민족입네~ 하면서 호들갑 떠는데 항주에 가본 내 입장에선 꼴깝으로 느껴진다. 아무 편견없이 보면, 몽골인보다 중국 항주사람이 한국인과의 일치율이 더 높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한족의 원류는 절강성과 거리가 먼 황하강 중류다. 절강성 주민이 처음부터 한족이었던게 아니다. 황하강 유역의 한족에게 흡수당고 오랜 기간 통일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살면서 문화적 동질화가 이루어져 한족이란 정체성을 얻은 것일 뿐이다. 중국인과 한국인이라는 민족정체성이 생기기 전에, 절강성과 한반도 사이에 어떤 교류가 있었던게 아닐까? 그러고보니 한반도의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이 중국내에서 제일 많이 발견되는 지역이 중국 절강성이다. 조선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 대조영 | 문헌을보면 산동과 절강은 한민족과 관련이있다고하죠 ... | 2009.07.18 |
| 기쁘오 | 과거 동이족설도 그렇고 그리고 북방여러민족들 문화중에서 유별나게 한반도가 가장 중원문화를 추종하고 흔적이 비슷한것을 보면 아마 당년에 중국남방지역사람들이 한반도에 건너가서 현재의 민족을 형성한것이 아닐지. | 2009.07.18 |
| 기쁘오 | 그리고 민족의 이름자체도 한자화고 세글자 두글자 뭐 누르하치 아골타 칭키스칸 등 이런 북방유목민족들의 이름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이름 | 2009.07.18 |
| 기쁘오 | 마한 진한 등 한반도남부의 삼한은 바로 중국남방중원에서 이주해온 소위 중원계 고구려 발해 백제 등은 만주지역의 소위 북방유목계 비슷할거같음 | 2009.07.18 |
| 망구리 | 중국남방지역 정확이 동남방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동이라서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2009.07.18 |
| 박경범 | 참 지금새삼스레 좌익이니 반공이니 말하는게 아니라 그러한갈등도 결국 과거의 민족간 원한에 비롯된것임을 주장하기 위한것입니다. | 2009.07.18 |
| (인용) | 중국 강남의 식음 유람 글번호 52, (조회 : 146) 글쓴이 李基承 날 짜 2008/03/09 (02:31) 서울에서 ‘강남’ 하면 한강 남쪽에 위치한 11개 구 전체 보다는 강남구 혹은 인접 8학군 지역을 말한다. 중국의 ‘강남’도 장강(長江) 남쪽 11개 성 전체 보다 흔히 상해시와 江浙(강소, 절강 兩省), 혹은 조금 넓혀 인접한 안휘·강서·호북성 중의 일부 지역까지 일컫는다. 이 곳은 원래 南蠻이라 불리던 楚, 吳, 越의 영지로서 당시 중국 인구의 10%만 거주하던 척박한 변두리였다. 漢代에 철기농구와 토목기술이 발전되며 종전에 엄두를 못 내던 습지의 개간이 시작 되었다. AD 309년 영가(永嘉)의 난 이래 북방 유목 기마병단의 약탈을 피해 강북의 중산층이 淮河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 행렬을 이루었고, 마침내 司馬睿가 建康(지금의 남경)에 東晉을 도읍하여 남북조시대 370년의 역사를 열게 되었다. 풍부한 수량과 온화한 날씨에 힘입어 唐代에는 이 지역만으로 전 중국 인구를 먹일 수 있는 곡창으로 탈바꿈 되었다. 중국의 정치 중심이 고대의 서안에서 낙양, 개봉, 북경으로 東北進 하는 동안, 경제중심은 양주, 소주, 항주로 東南進 해오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상해로 정착되었다. 2006년 江浙의 1인당 소득이 중국 평균의 2배(상해시는 3.7배)인데, 1000여 년 전에는 이 차이가 더 컸다고 한다. 문화예술에서도 송대 이후에는 강남이 주도를 해왔다. 한 예로 明·淸 500년간의 科擧 장원급제자의 70%가 江浙 출신이라고 한다. 한 겨울의 서울 추위도 피할 겸, 상미회 답사여행 차 제비 따라 강남으로 찾아 나선 때가 1월 중순이었다. 상해에 도착하였더니 웬걸, 서울 만큼 낮은 영하 3도에, 습하고 난방이 안되어 뼛속으로 추위가 스며든다. 다음 날부터 간간히 뿌리기 시작한 눈발이 두 주일간 계속되며 100년 만의 폭설 파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번 여행은 원래 도연명, 백거이, 소동파 등 대문호들의 족적과 백록동 서원, 또 불교성지인 보타산과 구화산을 두 주일 간 철저 탐사할 계획이었는데, 폭설로 고속도로와 등산로가 대부분 폐쇄 되다 보니 보다 많은 시간을 지방 도심의 酒樓탐방에 할애하게 되었다. 음식문화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경제적 풍요가 필요충분 조건이다. 중국 음식 8대 체계 중 세 곳이 이 지역에 집중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강남요리는 맵지 않고, 짜지 않고, 기름지지 않으며 재료 자체의 특색과 맛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魚米之鄕으로 일컬어지는 만큼 수산물, 특히 민물고기가 풍부하다. 북중국을 대표하는 민물고기가 황하의 잉어라면 강남에는 장강 지류의 농어(루위)가 있고, 그 외에 선어, 초어, 시어도 유명하다. 농어는 초겨울에 가장 많이 잡히고 맛이 있단다. 선어는 겉색이 노래 황선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말로 두렁허리라고 하는 민물장어의 일종이다. 초어(草魚)는 산천어의 일종으로. 서호의 초어는 특히 송수어(宋嫂魚)라고도 한다. 시어는 준치의 일종으로 장강(長江) 하류에서 잡힌다. 방랍어라고도 불리는 췌어는 안휘성 특산이다. 민물 게인 샹하이 크랩의 본명은 대갑해(大閘蟹), 때로는 털이 많아 모해(毛蟹) 라고도 불린다. 蘇州 부근 양징호(洋澄湖)의 음력 9월(雌), 10월(雄)산을 최고로 친다. 대개는 살짝 쪄서 비장의 소스에 찍어 먹으나,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게 요리가 있다. 소스에는 식초를 듬뿍 쓰는데 인근의 鎭江에서 나오는 恒順香醋가 으뜸이다. 소주는 원래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어려서부터 게를 먹고 조리하며 자란 소주 미인들이 신흥 상업도시 상해로 많이 시집가면서 소주요리가 상해의 본바닥 요리처럼 굳혀진 것이다. 생선과 게 요리에는 역시 소흥주가 제격이다. 남쪽에서는 높은 도수의 白酒보다 우리의 청주처럼 쌀 발효주인 黃酒(또는 老酒)를 많이 즐기는데 절강성의 紹興이 가장 유명하다. 소흥은 왕희지, 노신, 주은래의 고향으로 중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소흥주는 가반주, 향설주, 화조주의 순서로 고급화 된다. 뉘얼홍(女兒紅) 이라는 술은 딸을 낳게 되면 그 해 술을 빚어 깊이 묻어 두었다가 그 딸이 커서 시집갈 때 축하주로 꺼내 마신다는 전통에서 유래되었고, 그 중 특히 꽃무늬 磁器甁에 저장한 것이 최고급인 화탸오(花彫)酒 이다. ‘古月龍山’ 등의 톱 브랜드는 가격이 상당해서 현지인 들은 평소에는 ‘上海老酒’나 ‘石鼓門’ 을 마신다. 白酒는 세력이 약하다. 안휘성의 ‘古井貢酒’와 강소성의 ‘洋河大曲’이 일찍부터 八大명주 안에 랭크 되었지만 이 둘은 위로는 川貴(사천, 귀주성) 계의 내셔널 브랜드에 눌리고 아래로는 유사 짝통 브랜드가 많아 홈 그라운드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 ‘洋河 天之濫’ 등 디자인이나 가격 면에서 원조 양하대곡을 앞서는 브랜드들이 오히려 눈에 뜨인다. 강남 음식은 담백하므로 술보다 茶와의 조화가 더욱 오묘하다. 역시 중국 8大名茶 중 셋이 이 지역 산이다. 서호용정, 태호벽라춘, 황산모봉, 모두 담백 청아한 녹차 계열이다. 우리 귀에 친숙한 강남요리로 浙菜(절강요리)의 동파육과 규화자계, 蘇菜(강소요리)의 남경오리와 양주초반이 있다. 요리들의 어원이 재미있다. 북송 말 蘇東坡가 항주지부로 있을 때 백성들을 조직하여 청계천 살리기처럼 西湖를 재 준설 하였다. 東坡는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돼지고기를 소흥주로 졸인 요리를 주며 준공기념 잔치를 열었는데 이 요리가 민간에 전해 내려와 ‘東坡肉’ 이라 불렸다 거지의 닭을 뜻하는 규화자계(叫化子鷄; Beggar’s Chicken)는 조리기구가 없는 거지가 어렵게 서리한 닭을 연꽃잎으로 쌓아 불구덩에 묻어 익혔다는 요리로, 요즈음에는 반의법으로 부귀계(富貴鷄)로도 부른다. 북경오리는 사육장에서 강제로 먹이를 먹여 체중을 늘려 구운 것이고 남경오리는 자연환경에서 이곳 저곳 몰고 다니며 키우다가 삶아서 말린 것이다. 영락제가 1420년 북경으로 천도한 후 남경에서 먹던 오리 맛을 잊지 못해 남경의 오리몰이(duckboy)들이 자금성까지 매일 수천 마리 씩 오리 떼를 몰고 경항대운하를 따라 아장아장 여행 길을 올랐다고 한다. 판대기처럼 납작하게 만든 것은 판압(板鴨)이라고 하고 소금물에 삶은 것은 염수압(鹽水鴨)이라고 한다. 껍질이 우유색이고 고기가 연하며 기름진 느낌이 거의 없다. 楊州炒飯은 바로 한국 청요리의 볶음밥이다. 徽菜(안휘요리)는 안휘성 밖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들다. 黃山市의 옛 이름이 徽州로서 휘주염상(鹽商)이라 하면 예로부터 중국 10대 商邦 중 두 번째로 꼽힌다. 毛豆腐, 臭豆腐 등 독특한 풍미 소채도 있으나 대체로 마일드하고 우리 입에 잘 맞는다. 황산시에서 호텔 앞 수수한 주막에서 먹은 6元짜리 국수(우리 돈 800원;이름도 근사해 淸湯麵條)의 그 담백 미려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5월 달로 예정된 尙美會의 璜지방 여행에서 다시 한번 이 지방의 食.飮을 즐길 수 있는 날이 기다려진다. <尙美會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