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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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형제는 공화정 시절 로마의 정치가로 형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 168/163~B.C 133)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Gaius Sempronius Gracchus, B.C 154~B.C 121)를 말한다. 원로원 계급의 대농장 경영에 소작농으로 전락한 자영농 계급을 위해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농지법을 발의한 이후 이 법안을 시행하려고 했지만 원로원에 의해 암살을 당하는 결말을 맞이해야 했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은 고대 역사에서 귀족층과 맞서 평민들에게 부의 재분배를 시도하려고 했던 유명한 사건으로 후대 사회주의 등의 사회적 이념에 영향을 주었다. 고대 로마는 로마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의 군단병을 유지했다. 대부분의 자영농들은 평소 자신의 땅에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발발하면 군대에 들어가서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정복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영토를 넓혀나가는 방식을 사용했다. 문제는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전쟁이 장거리 원정으로 바뀌게 된 것에 있다. 초창기에는 1~2년 걸렸던 전쟁이 3~5년 정도 걸리게 되었다. 돈이 많은 귀족 등은 노예 등을 통해 농사를 지을 수 있었지만 자영농은 그와 같은 농사를 짓지 못하면서 자신의 땅을 팔아야 했다.

물론 원정에서 승리를 하면 재산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패배하게 된다면 재산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원로원 등 귀족들은 패배해도 큰 손실을 입지 않았지만 자영농은 사정이 달랐다. 그러다보니 자영농들은 집단적으로 파산하게 되었다. 파산한 자영농들은 로마로 상경하여 수많은 무산자 계급이 되었고, 일거리를 찾아 로마 시내를 배회해야 했다. 자영농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로마 군단을 지원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들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로마 군단의 집단적 약화를 초래하고, 로마 군단의 약화는 다시 자영농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를 개혁하려 한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하면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평민들을 수호하다 죽은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는 원로원과의 갈등으로 인해서다. 원로원이 농지개혁에 반대를 하자 형제는 물러서지 않으면서 이를 개혁하지 않으면 로마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될 것임을 역설했다. 평민 집회가 가진 입법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원로원의 의사에 반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그러면서 원로원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하면서 결국 암살당함으로 인해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만큼 원로원이 실질적인 로마의 최고 권력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호민관의 권력 또한 막강했지만 원로원의 권력에 비하면 정계에서 영향력이 매우 부족했다. 호민관은 집정관 다음으로 당대에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원로원들의 권한은 그보다 더 막강했다. 원로원은 그라쿠스 형제가 자신들과 같은 귀족 출신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가 무산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해 주면서 결국 치열한 갈등을 벌였고, 초법적인 행동을 계획하게 되면서 암살을 자행하게 되었다. 이로써 로마는 원로원의 권력 전횡으로 내정 불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후일,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시도하지 못했다. 이는 기득권과 반대되는 것인데다 그들의 반발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다. 사유 재산의 한계를 정하고, 부의 재분배를 이루어 내는 것이 현대에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불어 원로원의 영향을 받아야 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 입장에서도 농지법 개혁은 그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로마의 해외 원정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은 계층은 자영농이었다.
자영농은 잦은 참전으로 인해 자신의 토지를 제대로 경작할 수 없어 황폐화 되었기 때문에 수확물을 제대로 얻을 수 없었다. 원정을 통해 얻은 속주로부터 로마에 저렴하게 들어오는 농산물과 전쟁을 통해 광대한 농지와 노예를 데리고 경영하는 지배층의 라티푼디움(Latifundium)의 경쟁력은 자영농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결국 자영농은 자신이 보유한 토지를 포기하고 라티푼디움에 예속되거나 파산하여 무산자(Proletariat)가 되었다. 자영농 몰락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해 사회의 구조를 개혁하는 방법으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그라쿠스 형제였다.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국유지 임차의 상한선을 설정하고 임차권 양도를 금지시켰으며 무산자에게 일정 규모의 토지를 분배하게 하는 셈프로니우스 농지법(Lex Sempronia Agraria)을 제출하여 통과시킨다. 티베리우스는 부유층의 토지의 집중화가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국유지의 임차를 제한시켜 라티푼디움의 확장을 상쇄시키고 국유지를 무산자를 비롯한 시민들에게 좀 더 분배하여 자영농을 육성하자고 주장했다.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시민권 개혁 법안을 제출하여 라틴 시민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시민은 라틴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을 인정하게 했다. 곡물법을 제정하여 시가보다 더 저렴한 가격으로 빈민들에게 곡물을 팔게 했다. 공공사업을 진흥하게 하여 실업자 구제에 나섰으며 카르타고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고 시민들을 이주시켜 토지를 나누어 주었고, 그러면서 추가적인 자영농을 육성하고자 했다. 가이우스는 형 티베리우스의 개혁을 계승했으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확대하였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는 원로원에게 빌미를 잡혀 살해당했으며 곡물법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개혁안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라쿠스 형제의 죽음 이후 지배층으로의 토지 집중화는 계속 진행되었으며 소작농과 무산자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더 이상 제시되지 않았다. 무산자를 자영농으로 전환시켜 노동을 하게 만들고 건전한 시민을 육성하여 어렵고 힘든 현실을 개선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대신 곡물과 검투사 경기와 같은 오락만을 제공하고 안주하게 만들었다. 필자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로마의 미래를 결정지었을 정도로 중요한 개혁이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이미 정해져 있는 사회의 구조를 전환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기존의 사회 구조에 익숙해져 있던 시민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 구조 내에서 이익을 받는 사람 뿐만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에게도 반발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은 확고한 신념과 죽음을 각오하는 용기를 갖추지 않고서는 시행하기 힘들다. 흔히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평가할 때, 평가하는 학자들은 늘 급진적 형태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 이전에 그와 비슷한 전례라도 존재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시민들의 공공심은 날이 갈수록 약화되고 라틴 동맹은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는 가속화 되었으며 무산자와 노예들이 늘어나며 사회 갈등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문제는 이와 같은 현실들이 보이고 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참고할 만한 정책은 전무했다. 고대나 중세 시대에 부를 결정하는 것은 화폐나 기술보다는 토지로 여겨진다. 결국 부유층으로의 토지 집중화가 문제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토지 소유를 제한시킬 방안이 필요했다. 물론 참고할 수 있는 전례가 없으니 당연히 개혁은 급진적이고 실행하기 어려우며 지배층들에게는 매우 큰 증오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라쿠스의 개혁이 실패하고 마리우스 지원병 제도가 로마의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게 된다. 원로원 역시 잦은 원정으로 인해 교대가 필요한 징병제보다 상비군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러나 마리우스의 지원병 제도는 군대의 사병화와 군벌들을 등장시켰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제국의 규모에 적합한 병력 운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방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자영농의 육성을 통해 건전한 시민들의 부흥과 더불어 이루어 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대를 배경으로 한 군벌은 갈수록 득세하고 있는데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시민들로 이루어진 민회는 갈수록 세력이 점차 약해져만 갔다. 견제 세력의 힘이 약해지니 자연적으로 군벌에 의해 시행되는 전제 정치의 형태로 향해 갈 수 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결국 처음에 제1 인자(Princeps)에 지나지 않았던 황제를 결국 주인(Dominus)으로 부르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전제 정치로 종결된 것이 아니다. 노예와 무산자들이 증가하면서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 로마 시민권의 제한으로 인해 동맹시의 불만들이 폭발하여 생긴 동맹시 전쟁 등 내부 갈등으로 로마 제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와 같은 반란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반증하였다. 내부적인 갈등을 수습한 이후에도 무산자를 자영농으로 육성하는 방안을 선택하기보다는 여전히 군대로 흡수시키거나 곡물을 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방식은 로마 제국의 확장이나 전쟁에서의 승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는 실행 가능한 재원들이 공급되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성장이 정체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자영농은 줄어드는데 무산자들을 살리기 위해 세금 뿐만 아니라 일정 규모의 군대와 정부 기관, 그리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 기관까지 유지하기 위해 세금은 여전히 늘어갔다. 부유층과 노예들에게는 세금을 거두는 것에 큰 한계가 있고 자연히 대부분의 부담은 그나마 자영농으로 남아 있던 시민들에게 돌아갔다. 자영농이 제대로 육성되어 있지 않으니 남아 있던 자영농들은 상대적으로 과중한 세금을 부과 받게 된다. 자영농은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이 가진 토지에서 이탈하여 도적이 되거나 국가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숨어 들게 된다.
그렇게 되자 국가에서 확보가 가능한 인적 자원은 갈수록 줄어 들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게르만족과 고트족, 훈족 등 아시아와 북유럽 지역에서부터 끊임없이 침략하여 로마 제국을 잠식해 들어갔다. 이들 민족들을 막아야 하는데 병사로 고용할 만한 인적 자원은 매우 부족해지니 용병을 고용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자신들을 약탈했던 슬라브 및 게르만족까지 사실상 공물의 성격이 강한 임금을 주고 고용했다. 당연히 이들이 제대로 된 방위를 해줄 리가 없었고 이러한 기형적인 방위 체제를 유지하다가 결국 서로마는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자영농, 중산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간 계급이 약화된 것이 이처럼 국가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있었디는 것을 이미 로마 제국의 몰락에서 증명하고 있다.

前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現 동남아시아 해양 역사고고학연구소 연구교수
現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세계여행가
필명 : Alexey 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