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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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시대(三山時代)는 1322년부터 1429년까지의 고대 류큐 제도의 시대적인 분류로 나타난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각지에 성(구스쿠, 御城)을 거느린 안지(按司 ; 또는 아지)가 통솔하는 지역들이 나타났다. 14세기 초에 남부의 남산(南山 또는 山南), 중부의 중산(中山), 북부의 북산(北山 또는 山北)으로 3개의 나라가 되었으며, 이 세 나라가 100여 년 동안 공존하였다. 15세기 초 중산의 쇼씨(尚氏)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1416년에 북산을 멸망시켰고 1429년에는 남산을 멸망시킴으로써 류큐 제도를 통일하게 된다. 슌텐(舜天, 1166~1237)은 슌텐 왕통(舜天王統)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는 류큐(琉球) 왕국의 국왕(재위 : 1187~1237)이다. 신호(神號)는 미코토 아쓰시(尊敦)로, 실재를 증명할 수 있는 동시대의 사료가 존재하지 않고 있으나, 그 명칭은 16세기경부터 등장하며 1655년에 지어진『中山世鑑』이나 1701년에 서술된『中山世譜』등 류큐의 정사(正史) 기록에는 류큐 왕조의 초대 국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류큐가 일본에 정복되어 일본의 영토로 편입된 이후, 류큐와 일본이 같은 조상을 모시고 있다는 일류동조론(日流同祖論)에 따라, 슌텐의 정체를 헤이안(平安) 시대의 전설적인 무사로 알려진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爲朝)의 아들로 보는 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류큐왕국의 도성, 슈리성,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슌텐이라는 이름 자체는 1577년에 류큐 왕조가 세운 국왕송덕비(國王頌德碑)나 우라소에 성(浦添城) 앞에 서있는 1597년에 세운 비문에 모두 나타나고 있어 이미 16세기에는 실존 인물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650년대에 편찬된 류큐 왕조의 정사인『中山世鑑』에서 보다 자세한 내력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에 따르면, 지금의 오키나와 섬에는 천제(天帝)의 명으로 하계에 내려온 신 아마미키요(アマミキヨ)의 자손으로 ‘천손씨(天孫氏)’라 불리는 왕통이 25대에 걸쳐 계속되다가 신하에 의해 천손씨가 멸망당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선정을 행하여 천하를 통일한 것이 당시 우라소에(浦添)의 아지(按司) 관직을 맡고 있던 슌텐이었다. 이후 슌텐의 자손은 순바준키(舜馬順煕), 기혼(義本)의 3대에 걸쳐 계속되다가 1259년에 에이소(英祖)에게 양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슌텐 왕통의 지배력에 대해서는 오키나와 제도(諸島)에 걸쳐 있었는가에 대한 학술적인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으며, 슌텐은 사실 지금의 거대한 우라소에 성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본도(本島)를 통치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논의가 나타나고 있다.그가 오키나와 전토를 실 영유하지 않고 많은 아지들을 거느린 아지주(按司主)였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전개되고 있다.
『中山世鑑』이나 설화집인『오모로사우시(おもろさうし)』와 일본 측의 기록인『鎮西琉球記』, 소설인『椿説弓張月』등에서는 슌텐 왕조 호겐(保元)의 난 당시 일본에서 추방된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爲朝)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 호겐의 난 때 스토쿠 일왕(崇徳天皇) 편에 섰다가 패하여 이즈(伊豆)로 유배당한 다메토모는 항해 도중에 풍랑을 맞아 지금의 오키나와 섬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중산왕조에 정착해 호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中山世鑑』에는 다메토모가 상륙한 곳에서 호족 오사토 아지(大里按司)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존돈(尊敦), 후일 슌텐으로 명명되는 인물이며, 존돈은 15세의 나이에 우라소(浦添)의 아지가 되어 천손씨 25세의 재위 시대에 모반을 일으켜 중산왕(中山王)이 된 리용(利勇)을 토벌하고 22세에 제후들의 추대로 중산의 왕이 되었다. 이것이 류큐 왕조의 초대 국왕이라는 슌텐왕(舜天王)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작가로 알려진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은 이러한 오키나와 중산 설화를 모티브로 소설『椿説弓張月』을 저술했다. 일본과 류큐의 기원이 같다고 주장하는 일류동조론과 관련하여 슌텐은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이러한 논조에 근거해 다이쇼(大正) 11년에는 오키나와에 다메토모 상륙 기념비가 지어졌다.
겉에『源爲朝公上陸之趾』라고 새겨진 비석의 좌측 아래에는 비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던 보탠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中山世鑑』을 편찬한 하네지 츄슈(羽地朝秀)는 류큐 왕국의 셋쇼(攝政)로 취임한 뒤인 1673년 3월의 명령 전달 및 의견을 기록해 둔 책인 사치서(仕置書)에서, 류큐인들의 조상은 일찍이 일본에서 도래했고, 유형과 무형의 명사는 일본어와도 통하지만 회화체가 일본과 서로 다른 것은 먼 나라다 보니 교통이 오랫동안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다. 다메토모가 이러한 류큐 왕가의 조상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류큐인들의 조상은 일본으로부터 온 도래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시초는 일본에서 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하여 말세(末世)의 지금에는 천지 산천의 오형오론(五形五倫)과 조수초목(鳥獸草木)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로 통달한다. 오직 말의 나머지가 서로 다른 것은 먼 나라가 서로 오랫동안 통하지 못하여 끊어지게 된 이유이다."
최근 유전자 연구를 통해 오키나와 주민과 큐슈(九州) 북부의 주민들은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다카미야 히로시(高宮廣士)가 오키나와의 기원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기를 오키나와 섬 등지에 인간이 이주한 것은 조몬 중기 후반부터 후기 이후로 10세기부터 12세기 무렵에 농경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큐슈에서 오키나와로 이주했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근년 고고학 등의 연구를 포함해 난세이(南西) 제도 주민들의 선조는, 규슈 남부로부터 비교적 늦은 시기인 10세기 전후에 남하해 정주한 사람들이 주체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슌바쥰키(舜馬順煕, 1185~1248, 재위 : 1237~1248)는 슌텐 왕조(舜天王朝)의 2대째로 선대 슌텐(舜天)의 아들이고, 슌바쥰키의 후임 왕인 기혼(義本)의 부친이다. <나카야마 세 악보(中山三樂譜)>의 슌바쥰키 기록에 의하면 “부왕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는 국정도 온전했다.” 라고 서술되어 있다.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나라를 아주 잘 다스린 명군이라 할 수 있다. 자세한 치적에 의하면 슈리성(首里城)을 축조하였으며 일본으로부터 가나 문자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 당시 류큐 왕국에는 한자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문자 도입은 문화적 융성의 토대를 만든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외의 슌바쥰키의 개인 기록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아 슌바쥰키를 포함한 슌텐 왕조는 전설이라는 가설도 존재하고 있다. 기혼(義本, 1206~1259, 재위 : 1249~1259)은『中山世鑑』등에 등장하는 류큐 왕국의 국왕으로 순텐왕조(舜天王朝)의 마지막 왕이며, 순바준키의 아들이다. 기혼의 재위 중에 류큐 제도에서는 상당히 많은 재난이나 전염병이 발생되었다. 그러한 책임으로 인해 당시 류큐 왕국의 섭정이었던 에이소(英祖)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 이후의 기혼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그의 통치 기록도 상세히 남아 있지 않다. 한편 에이소(英祖, 1229~1299)는 류큐 왕국 에이소 왕조의 초대 국왕(재위 : 1260~1299)이다. 『中山世鑑』또는『中山世譜』등의 오키나와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에이소는 류큐 제도에서 처음 왕조를 건국한 신의 아들 왕계라고 여겨지는 천손씨(天孫氏)의 후예이며, 순텐 왕조(舜天王朝) 기혼(義本)에게 선위를 받아 5대 90년에 걸친 에이소 왕조(英祖王朝)를 통치하였다. 그가 탄생했을 때에, 그의 모친이 태양을 삼킨 꿈을 꾸었기 때문에 태양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타디코(タデコー)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삼산(三山) 왕조가 건국되어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으로 분리되었고 이들 중 북산(北山)은 14세기에 개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산 시대 당시 류큐 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왕국이다. 이를 두고 오키나와 어로 잔호쿠(山北)라고도 한다. 중산의 왕인 쇼 하시(尙巴志)가 1419년에 북산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중산(中山)은 14세기에 개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산 시대 당시 류큐 제도 남서쪽에 위치한 왕국이다. 중산의 왕인 쇼 하시(尙巴志)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인 1419년에 북산과 왕위에 오르고 난 뒤인 1429년에 남산을 멸망시켜, 류큐 제도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남산(南山)은 14세기에 개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산 시대 당시 류큐 제도 남쪽에 위치한 왕국으로, 오키나와 어로 잔난(山南)이라고도 한다. 중산의 왕인 쇼 하시(尙巴志)가 1419년에 북산을 정복하고, 1429년에 남산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남산의 쇼우삿토(承察度, ? ~1398)는 삼산 시대 남산왕국(南山王國)의 제1대 왕으로써 조선에서는 그를 온사도(溫沙道)라고 지칭했다. 1337년에서 1396년까지 재위하였으며 중산에게 멸망하고 왕위에서 축출당한 후 조선으로 망명 왔다가 1398년 조선에서 사망하였다.
류큐 왕국은 현재의 일본 오키나와 현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12세기부터 17세기 초까지 동남아와 동북아 국가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면서 발전했다. 지리적으로 동북아와 동남아를 잇는 해상 로에 자리한 이유로 인하여 선진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발전하였으나, 1609년에 당시 가고시마(鹿兒島)지방의 영주(領主) 시마즈씨(島津氏)가 공격해 왔고 이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1879년 일본의 현(縣)이 되기 전까지 류큐는 한국, 중국과 교류가 많았던 곳이다. 오키나와 곳곳에서는 류큐 왕국이 남긴 문화의 흔적들을 볼 수 있으며,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이라는 현재의 국적보다 류큐 왕국의 후예라는 사실에 더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편이다. 오키나와 현의 중심지 나하(那覇)에 있는 슈리는 류큐 왕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왕궁인 슈리성(首里城)을 통해 그 당시의 영광을 재현해 볼 수 있다. 슈리성은 일본 본토의 성(城)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류큐 왕국이 독립국가로 있으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축조했기 때문이다. 슈리성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슈레이문(守禮門)은 주변국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발전한 류큐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봉신 문을 지나면 류큐 왕국의 왕이 직무를 수행한 정전과 넓은 마당이 나오고, 정전, 북전, 남전이 주변을 감싸면서 중앙에 비교적 넓은 광장이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형태의 공간 구성은 자금성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궁전 양식과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구스쿠 유적은 하떼루마지마(波照間島)와 구메지마(久米島) 등 오키나와 남쪽 지역의 섬들에 남아 있는 10여 개의 옛 성(城)들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대개 삼산 왕조 이전의 유적들이다. 이러한 통일 류큐 왕국의 건국 직후에는 동남아시아, 일본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명나라에는 조공을 바치고 왕의 책봉을 받았다. 특히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은 류큐의 중요한 물자 교역 가운데 하나였다. 류큐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공물 품으로 인해 명나라에서도 류큐를 우대하였다.『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의하면 베트남은 3년에 1회, 일본,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10년에 1회 조공을 바칠 수 있었는데, 류큐는 2년에 1회씩이었다. 1470년대 이전까지는 1년에 1회씩이었으나 이후부터는 2년에 1회씩으로 제한된다. 이는 명나라에 매년 4회씩의 조공 무역을 한 조선 다음으로 많은 횟수로 나타난다.
류큐는 조공을 바친 대가로 명나라와의 무역 독점권을 획득하였으며 명나라의 상품을 수입하여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수출하였고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물산을 수입하여 명나라에 수출함으로써 해상 중개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전성시대를 구가하였다.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3국의 해양의 요충지에 위치한 류큐는 지정학적 우위를 살려 활발한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찬란한 번영을 누렸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잦은 교류로 인하여 동남아시아 상인들이 동북아시아와 교역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 곳도 이곳이다. 그러나 15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위협이 커져서 조선과 교류하기 어려워지자, 류큐 왕국은 방침을 바꾸어 일본의 상인을 통한 간접 무역으로 조선과 교류했다. 동아시아 북단과 남단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16세기까지 동아시아 지역의 해양 중심지 국가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도 교류할 정도로 번성했다. 당시 중계무역으로 확장해나가는 류큐 왕국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1458년에 제작된 슈리성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에 적힌 명문(銘文)이 존재하고 있다.
만국진량(万国津梁)의 뜻 자체가 세계의 여러 나라를 잇는 가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명문에는 주변의 나라들에 빗대어 류큐를 미화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흥미롭게도 삼한(三韓), 즉 조선을 명나라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다. 명문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