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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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베트남 중, 남부 지역에 살고 있는 참파인들은 해안 지대에서 내려서 근처 평야 지대에 살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점차 산간 지대로 올라갔다. 현재 베트남 중부의 광활한 서부 고원 지대에는 피부가 검고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는 수십 개의 말레이계 민족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배를 타고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참파인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말레이 지역에서 올 때 그들은 이미 인도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며 이로 인해 다수의 인도인들도 섞여 있을 수 있다.

베트남 중부 미선 참파 유적의 힌두교 사원 유적,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참파 인종은 매우 공격적이었으며 민족의 기질 자체가 호전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B.C 111년부터 베트남 지역에 3군을 설치해서 다스리던 한나라의 중앙 조정은 A.D 137년 이 3군 중에 가장 남쪽, 현 베트남 중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일남군(日南郡)에서 참파 인들이 일으킨 발생한 사건에 경악했다. 일남군과 참족과의 국경 지대에 있던 상림(象林) 현 남쪽에 살고 있던 참파인 구련(區憐 Ju Lien) 등이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상림현을 공격하여 성곽과 사원을 불태우고 현의 관리들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아마도 참파를 가리키던 초기 이름이 '임읍(林邑)'이었던 것은 '상림(象林)'현의 '림(林)'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참파가 이렇게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먼저 참파의 농업과 해상 무역을 통한 경제력이 북베트남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한다. 베트남 중부 지역은 해안에 면해서 북에서 남으로 긴 산맥인 쯔엉 썬(Truong Son) 산맥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평지가 매우 협소하다. 따라서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천연 요새로도 활용되고 남쪽의 생산력을 별다른 외적의 침입 없이 극대화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미얀마인들은 이슬람력을 믿고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 5세에게 반기를 들었고, 반란 소식을 접한 자야바르만 5세는 새로이 편성된 대부대를 이끌고 오늘날 미얀마 양곤으로 향했다. 자야바르만 5세가 미얀마의 영역에 도착했을 때, 참파의 수장 나드라(Nadra)는 베트남의 레 왕조, 이 왕조 교체기의 혼란을 이용하여 남부 베트남 지역을 다시 장악했다. 이들은 이 왕조로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부 베트남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며 약탈을 거듭했다. 게다가 1010년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 5세가 병사하고 우다야디티야바르만 2세(Udayadityavarman II)가 즉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동남아시아도 다소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에 이 태조는 참파의 도발을 중대한 영토 침략으로 간주하고 아들인 이불마(李佛瑪)로 하여금 토벌을 명령했다. 이에 참파의 수장 나드라 역시 참파의 전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러 나왔다. 그러나 이불마는 베트남 군이 거느린 대부대의 수적 우위를 과시하면서 전령을 보내 나드라에게 항복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나드라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그들 부족의 최고 전사들을 내보내서 응전했다. 베트남 이 왕조의 태조는 남부 지역 참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참파는 전 레 왕조 말기 혼란 시기에 독립하여 베트남 중부 지역에까지 올라와 약탈하는 현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참파는 고려의 팔관회에 외교사절을 보낼 정도로 해상 무역에 막강한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중국 송나라와의 직접적인 교역이 이 왕조에 의해 단절된 상태라 정치적 시스템과 군사력이 그나마 약세였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왕조는 통치 기간 내내 참파와의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러한 전쟁이 지속적으로 발발한 것에 대해 참파의 군사력이 연구된 것과 같이 약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육로를 통한 중국 송나라와의 교역을 원하는 참파의 욕구와 해상 무역 거점의 확대라는 이 왕조의 이해가 충돌하는 상황이 지속되었고 이에 대한 참파의 근근한 약탈로 인해 발생된 일이다.
결국에는 이 왕조가 승리하는 상황으로 끝나게 되지만 이들 간의 갈등은 이후 600여 년간 지속된다. 재정안정이 절실했던 태조는 참파의 제압이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태조는 장성한 아들 이불마(李佛瑪)로 하여금 남부지방의 참파를 계속 토벌하도록 명령했고 이로 인한 재정확충, 외교 안정을 통해 이 왕조는 북부, 중부 베트남의 통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참파의 분열은 남아시아의 고대사 속에서 어느 나라에서든 흔히 나타나는 분열상을 과도하게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본다. 이에 대해 확장성을 가지고 판단해보면 말레이계가 중심이 되고 인도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참파라는 국가는 때로는 통합되고 때로는 분열했다.
지역적으로 북으로는 베트남과 남으로는 캄보디아와 경쟁하면서 1,800여 년의 세월 동안 단일의 운명체로 존속했지만 중앙에서 통제력은 매우 약했다는 것이 참파의 정치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해운관 남쪽의 꽝남(Quang Nam, 廣南) 지역부터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 사람들이 廣南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매우 광활하고 비옥한 평야 지역이다. 중부 지방의 쯔엉 썬 산맥이 천연 요새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적의 큰 위협 없이 이곳에서 생산력은 막대한 인구의 부양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 장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남중국해의 중앙부 몬순 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천혜의 양항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무역선들이 많이 방문하여 상업적인 부분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북쪽의 쯔엉 썬 산맥 지대에서 생산되는 루비를 비롯한 각종 보석류나 상아, 코뿔소 뿔, 침향 등의 값나가는 물자들도 부(富)의 원천이기도 했다. 참파인들은 산지 인들로부터 이러한 물자들을 수집해 교역 상인들에게 팔고, 다시 교역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물자들을 산지인들에게 되파는 형식의 중개 무역으로도 많은 이익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