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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은 세계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역사 변곡점의 날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3:25:50

크리스마스는 20세기 세계 현대사에 있어 가장 큰 변곡점이 있었던 때였다. 역대 크리스마스 때 세계사적인 사건에서 가장 큰 사건의 쌍두마차는 소련의 해체와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이 1989년에 민주화되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이 처형당한 사건이다. 차우세스쿠는 콘두커토르(Conducător)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루마니아어 Conducător는 "군사적 지도자"라는 뜻을 갖고 있고 어원은 라틴어 Consul과 Ductor의 합성어로 Consul은 로마 공화정 시기의 지도자인 "집정관"을 이르는 말이고 Ductor는 "절대자"를 말한다. 뒤에 따라오는 -tor는 2인칭의 대상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에 Conducător는 "제국을 이끄는 절대자"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1991년 12월 25일, 한 시대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소련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 연방공화국 국기가 올라왔다.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 페이스북


본래 콘두커토르의 창시자는 루마니아의 파시스트인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루마니아는 소련이 장악함에 따라 콘두커토르의 호칭을 없앴지만 차우셰스쿠가 당선되면서 이 호칭이 다시 등장했다. 그만큼 차우셰스쿠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말해주는 일례라 볼 수 있다. 차우셰스쿠가 어떤 기행을 벌였는지는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라 생략한다. 차우셰스쿠가 1989년 12월 21일 국민들을 모아 놓고 지지대회를 열었지만 시위자들의 비난을 받았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국방장관인 바실레 밀리아(Vasile Milea) 장군에게 발포를 명령했지만 바실레 장군은 이를 듣지 않았기에 그는 사살되었다. 


그 뒤를 이은 빅토르 스탄쿨레스쿠 장군은 아예 시위대 편에 섰다. 차우셰스쿠는 연설 직후 관저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으로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조종사가 변심하여 다시 부쿠레슈티로 돌아왔다. 23일 차우셰스쿠 부부는 도주한 지 하루도 안 돼서 출동한 혁명군에게 붙잡혔고 25일 차우셰스쿠에 대한 형식 재판이 열린 끝에 사형이 확정되었고 재판 종결 후,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루마니아는 크리스마스 때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차우셰스쿠 생전의 만행의 잔상으로 인해 그가 죽은지 3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최악의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로부터 2년 후, 1991년 12월 25일은 러시아 현대사에서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닌다. 소련이 붕괴된 날이기 때문이다. 34년 전 오늘, 소련의 대통령이자 소련의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소련 지도부를 해체했다. 소련의 핵무기 발사 시스템을 포함한 전권을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승계했다.  그리고 1991년 12월 25일 저녁 7시 32분, 모스크바 크레믈린에 마지막으로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혁명 이전에 사용된 러시아의 국기가 게양되는 세계사적인 최대의 대사건이 발생한다. 이 날 SFSR 최고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법적 국명을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서 "러시아 연방"으로 바꾸어 주권국임을 보여주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고르바초프는 저녁 7시 정각에 대국민연설을 통해 "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대통령직으로써의 활동을 중지한다(Я прекращаю исполнять обязанности Президента Союза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고 밝히며 약 10분 간의 연설을 통해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알렸다. 연설이 끝나고 저녁 7시 26분, 고르바초프를 태운 차가 크레믈린을 빠져 나감으로써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비에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고르바초프가 빠져나간지 4분 후, 저녁 7시 30분 마침내 웅장한 소련의 국가(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гимн СССР)인 "소비에트 연방 찬가"가 마지막으로 울려퍼졌다. 그리고 7시 32분, 크레믈린의 마지막 근위대 소련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 국기가 올라갔다. 


이 사건은 냉전 시대의 종식과 더불어 한 시대의 종결을 의미했다. 오늘은 소련이 종말을 맞은지 정확히 34주년이 되는 날이다. 세계사를 바꾸었던 역사적인 날인데 현재 러시아에서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이런 12월 25일이 루마니아와 러시아에서만 의미있는 날일까? 이어 현대사에서만 의미있는 날일까? 중세 유럽 또한 12월 25일은 역대 역사에서 큰 변곡점을 맞이한 날이기도 하다. 800년 12월 25일은 서유럽의 정치,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 체계적으로 통합되는 대사건이 발생한 날이기도 하고, 역사적인 시대 구분에 있어 비로소 본격적인 중세 시대가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800년 12월 25일, 프랑크 제국 카를루스 대제가 크리스마스 기간에 로마로 입성하여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리는 성탄 미사에 참석하고 교황 레오 3세(재위 : 795~816)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게 되면서 정식으로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카를 대제의 로마 황제 즉위는 476년에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마지막으로 멸망한 서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으로 교황도 카를 대제가 사망한 후 성인으로 추존함으로써 자신이 기독교 교회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을 과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카를 대제에 의해 부활한 로마 제국은 이전의 로마 제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로마를 계승했다 보기에는 상당한 저항이 따랐다. 


카를 대제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계속 다른 종족들과의 전쟁을 직접 수행해야 했는데, 이러한 전쟁 수행은 지방 귀족들의 도움 없이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 귀족들에게 영토와 노예를 상속했는데 여기에서 중세 유럽의 지방 분권적인 봉건 제도가 태동하게 된다. 카를 대제가 황제가 된 사건은 프랑크 제국과 로마 카톨릭 양쪽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으로써 성사된 일이었다. 카를 대제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제국 내의 침략과 반란을 격퇴하기에는 무력만으로는 한계를 느꼈고 따라서 교회의 권위와 옛 로마제국의 권위를 빌리고 싶어했다. 한편 로마 교회는 726년에 비잔틴 제국의 레오 3세가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리고 로마교황에게도 교회 내, 외부의 모든 성화상을 없애라고 지시하자 이를 거부함으로써 비잔틴 제국과도 마찰이 있는 상태였다. 


이 때부터 서유럽은 역사 시대에 돌입하기 시작하며 나는 카를 대제가 서로마 황제가 된 이 때부터 독자적인 서유럽의 정치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에서 큰 의의가 있는 대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로부터 정확히 200년이 지난 1000년 12월 25일에는 서유럽에 이어 동유럽에서도 대사건이 발생한다. 1000년 12월 25일은 헝가리에서도 아주 역사적인 날이다. 마자르족은 새로운 거주지인 판노니아 평원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동안 마자르족들은 전 유럽에 잔혹한 약탈을 자행해왔다. 그러나 점차 독일을 중심으로 모든 유럽이 마자르족이 방위력을 갖추어 갈 동안 마자르족의 약탈 습성은 점점 낮아지고 정복한 영토에 정착하면서 유목에서 농경 체제로 경제 체제를 변환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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