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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전역 이야기 - 20세기에 유행한 슬라브 민족주의, 그리고 현재 발전하고 있는 세르비아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3:26:39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린 역사적 사건인 가브릴로 프란시스라는 세르비아의 청년이 오스트리아 페르디난드 황태자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한 이 사건은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고, 독일이 참전하면서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게 된다. 당시 신생 국가이던 세르비아의 청년들은 민족주의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당면 과제는 세르비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이웃 보스니아를 차지하는 데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08년 오스트리아가 먼저 보스니아를 합병해 버리자 세르비아인들은 큰 좌절과 분노를 가지게 되고, 결국은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지난한 역사를 간직한 베오그라드역,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1914년 6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가브릴로 프린시스에게 총을 맞아 암살되었는데, 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로 보스니아를 세르비아에 합병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를 발칸반도 지배의 기회로 보고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역시 발칸반도 진출을 노리던 독일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을 들어 전쟁을 시작하자 슬라브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발칸을 노리던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세르비아와 연합하여 맞섰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의 발칸 지배를 경계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참전했고,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번지고 말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이끌고 세르비아 정복에 나선 오스카 포티오렉(Oskar Potiorek, 1853~1933) 장군은 장비가 빈약하고 규모가 작은 세르비아의 보잘것없는 군대쯤은 2주일 내에 지도상에 지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와 같이 오스트리아가 침공하면서 8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과 세르비아 군 간에 체르 전투와 콜루바라 전투가 발발했다. 이후 2주일 동안 오스트리아 군의 공격은 대량의 인명 손실로 그치면서 전쟁 기간 동안 첫 번째 연합군의 주요 승리로 기록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속한 승리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전선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키고 대신 세르비아 전선에 상당한 병력을 유지시켰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 실패는 지난 20세기동안 우월한 적을 상대로 패배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라도미도르 푸트닉(Radomir Putnik, 1847~1917) 장군 휘하의 세르비아 군대는 쉽게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티오렉의 군대는 두 차례 세르비아에 대한 진공 및 공격 작전은 모두 세르비아 군의 기습에 걸려 패퇴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세르비아를 응징하겠다고 나선 지 4개월 만인 12월 중순 쯤에 푸트닉 장군 휘하의 세르비아 군은 세르비아의 영토 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그리고 이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어린 군인이 참전한 전역이다. 츠부스니카에서 태어난 몸칠로 가브리치(Момчило Гаврић, 1906~1993)는 1914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게 그의 부모, 할머니, 형제 7명이 죽은 이후 8살에 세르비아 육군 제6 포병 사단에 입대했다. 10살때 그는 상병으로 승진했으며, 11살에는 하사 대리 병장이 되었다.


어쨌든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를 얻게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와해되면서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는 물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까지 합병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수립했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민족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글자 그대로 남방(유고)의 슬라브인들을 모두 통합한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였다. 그로부터 약 80년이 지난 1990년대 초,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의 결실이었던 유고슬라비아는 내전이라는 가장 추한 형태로 와해되기 시작한다. 철권으로 통치하던 요시프 티토가 사망한 이후 중앙 정부와 마찰을 빚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보스니아가 차례로 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반대하는 세르비아 측과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의 희생이 따르게 된다. 


끝내 밀로셰비치 정부는 1999년 코소보 사태로 인해 나토에게 79일 동안 폭격을 당하는 사태를 초래하고 만다. 당시 20세기에 유행했던 민족주의는 한 핏줄, 한 문화, 하나의 언어를 가진 같은 민족끼리 자신의 일을 자신이 결정하면서 살겠다는 숭고한 이상이다. 반면 제국주의는 자신의 의지를 타민족에게 강요한다는 면에서 민족주의와 상반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투르크 등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운명을 개척하려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이상은 자국 내부의 소수 민족들이 가지는 불만에 대해서는 제국주의라는 다른 쪽 얼굴을 드러내었고, 결국 세르비아인들은 자신들이 피땀 흘려 이루려 했던 민족주의의 이상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세르비아인들이 민족주의 망상에 집착하는 동안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세르비아와 국민소득이 비슷했던 헝가리가 꾸준한 성장과 변화를 이룩한 지난 15년이 세르비아에는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고, 앞으로 세르비아가 헝가리처럼 EU 가입의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노력했지만 개혁과 개방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이제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극화 세계로 가고 있는 현재, 세르비아는 중국과 러시아의 투자를 받아 동유럽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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