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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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침공과 노르웨이 침공에서의 승리 이후, 독일군은 한창 승리를 거듭하고 있던 1941년 발칸반도 서부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독일과 이탈리아 연합군의 위협적인 기세를 매우 불안하게 보고 있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1934년 국왕 알렉산데르 1세(Alexander I)가 프랑스에서 암살당한 이후, 페테르 2세(Petar II)의 5촌 당숙인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Pavle Karađorđević, 1893~1976) 왕자가 국왕의 대리로 섭정을 해오고 있었다. 파블레 왕자는 나치 독일의 위협적인 상황에 겁을 먹은 상태였고, 유고슬라비아는 자신의 주변 국가들인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파블레 왕자는 유고슬라비아의 안전은 나치 독일 연합국과의 제휴를 통해 나올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1941년 3월 25일 비엔나에서 독일의 군사동맹에 가입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는 나치 독일군, 출처 : Википедије, Априлски рат
하지만 문제는 유고슬라비아 본국 내부에서 발생했다. 당시 나치 독일에 대해 별로 우호적이지 않던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들은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격렬한 반대 시위를 전개하였고, 군사동맹 가입 이후 3일도 지나지 않은 3월 27일, 페테르 2세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은 친미, 친영파 장교단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그렇다고 해서 페테르 2세가 반(反) 파시즘 같은 신념이 있어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아니었으며, 국정 경험이 전무한 당시 18세의 청년이 왕좌를 둘러싼 각종 세력들의 농단에 넘어가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맹의 파기로 인해 유고슬라비아는 나치 독일의 자존심을 상처를 낸 셈이 되었고, 이에 당연히 히틀러는 분노하여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당장 유고슬라비아 자신들을 도와야 할 영국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병력을 파견할 여건이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였고, 자국 내의 군사력으로는 모든 면에서 적국들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따라서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정부 인사들의 조언에 따라, 페테르 2세는 해외로 도주하여 망명정부를 세우고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한다는 무책임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결국 1941년 4월 6일,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우선 루프트 바페가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기습적으로 폭격해서 잿더미로 만듬과 동시에 4,000명 이상의 시민들을 폭격으로 사망하게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독일 제12군은 유고슬라비아 동부와 그리스 북부를 향해 침공을 개시했고, 독일군 뿐 아니라 헝가리군도 그 뒤를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여기에 이탈리아도 이탈리아 본토와 식민지인 알바니아에서 군대를 보내 유고슬라비아를 협공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멸망할 위기를 맞이했다.
이처럼 유고슬라비아 근처의 국가들은 나치 독일의 지원도 받았지만 불가리아나 헝가리, 루마니아 서부 지역에는 나치 독일의 제12군이라는 강대한 군사적 토대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제1~2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갓 독립을 쟁취한 신생 국가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마저도 근대식 통치 방식을 이제 막 도입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기에 국가적 정통성마저도 취약한 상태였다. 발칸 각 국가들의 형세는 19세기 말 열강의 틈에 둘러싸여 근대식 방식을 막 도입한 대한제국과 크게 다를바 없었지만 대한제국과 다른 면이 있다면 오히려 대한제국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몰려 있었는 점이다. 이는 오스만투르크로부터 갓 독립한 국가들이 모두 유고슬라비아의 적국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 뒤에는 소련이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만 대한제국은 우군이 될 나라가 없었다는 것에서도 차이가 있다.
세계적인 강대국이 우군으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어쩌고 보면 그 모든 것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 엄연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결국 약소국인 유고슬라비아가 나치 독일의 침공에 맞아 전쟁을 벌였지만 전면전의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유고슬라비아의 대패와 유고슬라비아 영토들의 함락이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의 무기는 연합국의 지원도 있었고 일부 소련의 지원도 있었다. 그보다 더 큰 것은 민족적인 자존심에서 우러나온 저항심의 발로였다. 본래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던 남슬라브계 유고슬라비아는 19세기까지 그들을 지배했었던 오스만투르크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오스만투르크도 수백년 동안 남슬라브계 민족들을 간신히 통치했는데 나치 독일이 이제 갓 정복했다고 세르비아가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저항세력 중 요시프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의 게릴라군은 나치 독일 남부 전선 연합군에 늘 기습 공격을 감행해 피해를 입혔다. 그러한 기습공격은 나치 독일의 보복이 항상 뒤이었지만 게릴라전은 멈추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보복은 유고인들에 대한 대학살이었고 유고슬라비아 주민들은 학살과 기아로 인해 약 2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로 인해 각 이재민들과 피난민들도 발생했고 그나마 전쟁이 많이 없던 동맹국인 소련으로 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된 발칸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인해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유고 난민들의 피해가 더욱 막심해지게 된다. 나치 독일에 대응하는 유고슬라비아의 전략과 전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국가 방위 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형식상으로만 존재했던데다, 이것 또한 실현성이 거의 없었던 유명무실(有名無實)한 계획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고슬라비아의 군대가 막강하여 임기응변적인 대처가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유고군의 숫자는 70만 명이지만, 이 중에서 50만 명은 갓 징집되어 훈련도 제대로 못 마친 병력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중장비도 없어서 대부분의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오로지 보병으로 움직였다. 특히 소총의 숫자도 부족해 곤란을 겪었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기갑부대와 해군, 공군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기갑부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개발된 전차로 해당 시점에서는 구식이었으며, 수량도 몇 대 안되는 르노 FT-17 전차가 전력의 전부였다. 더불어 해군은 구식 구축함 3척이 사실상의 전력이었던 것이다. 공군의 경우에는 앞서 언급한 파블레 왕자와의 친선을 위해 히틀러가 공급한 BF109 전투기와 DO17 폭격기를 몇 대 보유하고 있었지만, 인도 받은 지 얼마 안 되는데다가 부품 및 소모품도 부족했다. 그리고 조종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파일럿들의 실력도 썩 좋지 않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민족이 혼합된 국가였으며 내부에 독립적인 국가가 다수 존재하는 연합국가로 형성되어 있어 서로 간의 융합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내부에서도 최대 숫자를 자랑하는 세르비아가 자국과 자국 민족만 우선하는 경우가 매우 많아 종교, 민족, 국가가 다른 크로아티아 등은 이들에게 크게 반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들 국가는 패권국인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국가 체제가 흔들리면 분리 독립할 생각을 갖고 있었고 다민족성을 가진 유고슬라비아 군대가 통일성을 가지고 운용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개전하자마자 1주일도 되기 전에 유고슬라비아의 대도시 2개가 함락되고, 크로아티아 등은 분리 독립 선언을 한 다음, 나치 독일군 편에 가담하였다. 따라서 방어전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던 유고슬라비아의 군대가 모두 붕괴되었고, 독일군은 하루에 150km 이상의 맹진격을 거듭했다. 이는 독일군 뿐 아니라 헝가리군, 그동안 제대로 된 활약을 못했던 이탈리아군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유고슬라비아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개전 11일째인 1941년 4월 17일에 독일군에게 항복하고 유고슬라비아는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에 의해 삼분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