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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오 딘 지엠(Ngô Ðình Diệm, 1901~1963)의 남베트남 통치와 축출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3:29:55

응오 딘 지엠(Ngô Ðình Diệm, 1901~1963)은 베트남 공화국 초대 총통이며 그의 정치 시절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는 참파 계열의 안남 왕국 명문 가문 출신으로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지 시절 25세의 나이에 프랑스 식민지 지방군의 대장을 맡았으며, 약 300여 곳의 마을을 관리하는 고위 관료를 지낸 바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를 축출하는 공산주의의 특성상 베트남에서는 민족 반역자로 분류되었다. 그 후 응우옌 왕조의 바오다이 국왕 밑에서 이부상서가 되었으나, 친(親) 프랑스적인 정책에 반대하여 사임하였고, 이후 일본의 괴뢰화가 되자 일본에 빌붙은 왕정에 대항하여 일본에 대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5년 호치민의 공산군에 체포되었으며 호치민으로부터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정부에 입각,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그는 워낙 공산주의 사상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고 출국하여 미국, 프랑스, 벨기에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Hoàng đế cuối cùng của Việt Nam, Bảo Đại,  출처 : BBC, Vietnam


이후 1954년 6월 귀국하여 미국의 지원으로 베트남 응우옌 왕국의 수상을 지내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을 선언했다. 이어 1956년 국민투표로 공화국을 선포하고 총통이 되었지만  독재와 주변 측근 인사들의 부패, 그리고 과도한 미국과의 밀착 정치 등으로 인해 민심을 잃고, 여러 번의 군부 쿠데타를 겪게 된다. 1956년 11월부터 독재 정치를 하였으며 또한 응오 딘 지엠 자신과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각종 수혜를 입어온 지주들이 로마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을 옹호하고 불교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억압정책에 맞서는 농민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저항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63년 6월에는 승려 틱꽝득의 분신 자살은 쿠데타의 도화선이 되었다. 1963년 11월 즈엉 반 민(Dương Văn Minh, 1916~2001) 장군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정권은 붕괴되었고 동생인 응오 딘 누(Ngô Đình Nhu, 1910~1963)와 함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응오 딘 지엠은 독실한 로마 카톨릭 신자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인물이다. 역사학자 루 도안 후인(Luu Doan Huynh)은 그는 매우 편협하고 과격한 민족주의를 앞세운 독재 정권이었고 친족들로 권좌를 채우는 네포티즘을 펼쳤다고 평가하고 있다. 지엠은 동생 응오 딘 누를 수석보좌관 겸 비밀경찰 책임자로 내세웠고, 독신이었던 지엠은 국가 의전에서 누의 아내 마담 누를 퍼스트레이디로 삼았으며, 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어머니는 UN 참관인으로 보냈다. 자신의 친형은 후에지역의 추기경으로, 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 사촌과 일가 친척 역시 주요 요직에 등용하였다.


응오 딘 지엠은 부유한 카톨릭 엘리트였고 무엇보다 프랑스 식민지 정부의 관리였다. 이로 인해 다수의 베트남인들은 지엠을 프랑스 지배의 연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베트남인 대다수가 믿고 있던 불교를 탄압하고 베트남을 카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 지엠 정권의 종교 정책은 많은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1955년 초 여름 지엠은 반공 정책을 강화하여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다른 반 정부 인사들을 체포, 구금하고 고문하거나 처형하였다. 지엠은 정권에 반대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모두 공산주의로 몰았으며, 1956년 8월 다수의 반대 인사들이 사형당하였다. 지엠 정권의 정치적 박해로 죽임을 당한 사람은 1955년에서 1957년 사이 12,000 명에 달했고, 1958년까지 정치범으로 감옥에 수감된 사람의 수는 약 40,000명이나 되었다. 디엠 정권의 반공을 앞세운 독재는 민심 이반을 불러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응오 딘 지엠 정권의 친(親) 카톨릭 정책은 베트남 불교계의 저항을 불렀다. 1963년 6월 11일 오전 10시, 베트남 사이공 중심가 도로 한복판에 티엔무 사원의 틱꽝득(釋廣德) 스님이 분신 자살을 시도했다. 이 충격적인 장면은 AP통신 사진기자에 의해 해외로 타전되어 서구 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전국적인 저항의 시작점이 되었다. 응오 딘 지엠의 가장 큰 실책 가운데 하나는 토지 개혁 실패였다. 북쪽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공포정치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베트민 시기 협력의 대상이었던 민족주의적 지주까지 예외 없이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던 것과는 달리, 지엠 정권은 별다른 토지 개혁을 하지 않아 농민들의 이반을 자초하였다. 베트남의 대표적인 농업지역인 메콩 강 삼각주를 비롯한 농지는 프랑스 식민지 시기 이래 지역 인구의 2%인 지주가 전체 토지의 45%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엠 정권이 실시한 토지 개혁은 매우 미약했다. 1956년 미국의 압력으로 발표한 토지 개혁은 지주의 토지 보유 면적을 1.15 Km²로 제한하였으나, 지주들이 가족에게 토지를 이양하는 것을 허용하여 사실상 토지 개혁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결국, 남베트남의 토지개혁으로 이익을 본 소작인은 10%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남북의 토지개혁 차이는 농민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이유가 되었다.


1957년 5월 응오 딘 지엠은 미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응오 딘 지엠과 함께 뉴욕시에서 퍼레이드를 열었고 지엠 정권에 대해 계속하여 지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공식적인 환영과 달리, 당시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는 사적인 자리에서 지엠 정권의 악행을 알고 있지만 대안이 없기 때문에 계속적인 지지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훗날 당시 미국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 Namara, 1916~2009)는 베트남 공화국의 새로운 후원자인 미국은 베트남 문화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간신히 몇 마디 말과 역사가 오랜 나라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영화 한 편 없는 상태였고, 응오 딘 지엠이 서구의 방법을 그대로 가져와 베트남 문제를 풀려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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