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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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든 모지리가 있고,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다소 덜 떨어져서 그런 경우가 있거나, 너무 좋아서 친구들이 놀려도 다 받아주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집단을 유지하면서 살다 보면 희생양(Scapegoat)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희생양은 고대의 제례식에서 '제물로 받쳐진 동물'이다. 구약성서에서 보듯, 아브라함도 자신의 자식을 여호아의 주문에 따라 제물로 받쳤다. 후대로 내려 오면서 인간 대신에 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희생양'은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책임지거나, 죄를 대신하기 위한 일종의 상징적 제물이라 할 수가 있다. 내부의 걸속을 다지고, 집단 내의 질서와 규율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이고도 사회적인 행위라고 할 수가 있다.
왕따나 집단 따돌림 혹은 집단 괴롭힘 같은 학교 폭력 같은 것도 일종의 희생양의 한 형태라고 할 수가 있다. 다소 모자라는 듯한 사람을 세워 놓고 집단적으로 괴롭힘으로써 자신들의 그와는 다르고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행위가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역사를 조금만 들추어 보아도 이런 희생양의 사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Witch Hunt)'은 당시 유럽을 휩쓴 '흑사병'에 대한 두려움과 를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 가깝게는 일본의 관동 대지진(1923년) 당시 재일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고 하면서 무고한 조선인들을 수천명 학살했다. 일본 당국은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인이란 약한 존재를 제물로 삼은 것이다.
사실 전혀 비합리적인 이런 조치들을 우리가 납득하거나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들 간, 집단들 간에,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들 간에서도 이런 일들은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성적으로 사유한다는 인간들 역시 다른 동물 종들과 별반 차이가 없을 뿐더러, 그 강도가 더 심하다고도 할 수가 있다. 문제는 이런 집단 따돌림이나 괴롭힘의 식물 생태계에서도 생길 만큼 뿌리가 깊다는 점에 있다. 숲을 구성하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도 끼리 끼리 공간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식물들은 균사로 연결되어 있어서 상호 영양 물질을 공급할 때 훼방을 놓거나 보복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 식물들은 타감 작용으로 상대를 못자라게 하거나 뿌리 네트웤을 통해서 소통을 한다. 뿌리 내트웤에서 이기적으로 굴면 배제될 가능성은 있다. 숲은 거의 식물의 80-90%가 뿌리 네트웤에 연결되어 있다. 소나무들이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곳에 전나무나 다른 종류의 나무들이 끼어 들면 그 나무들의 성장을 막기 위해 햇빛를 가리거나 호르몬을 배출하는 행위들이 식물 생태계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태를 추적해보면 유전자 차원에서도 충분히 예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문제를 조금은 다르게 접근해보고 싶다. 이것은 '희생양'을 정당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희생양을 당하는 개체나 개인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방식의 전환이다. 쉽게 말하면 '개별자'(Individual)에 대한 접근 방식을 달리하는 것이다. 흔히들 모지리나 약자는 그 존재 자체, 즉 개별자의 문제로 간주된다. 그가 병약하거나 머리가 나쁜 것, 출생이 나쁜 것과 정상 교육을 받지 못한 것들이 그 이유가 된다. 이런 것들은 그 개인 내부에서 그런 원인들을 찾는 방식이다. 철학에서 많이 언급되는 '실체'(substance)적 사고가 그렇다. 일원론자는 이런 실체를 하나(one)로 보고 다원론자는 다수(many)로 보는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대륙의 합리론자들 사이에 이런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서양철학의 시초를 이루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부터 시작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Idea)는 우리가 오감으로 대하는 존재들을 그림자로 보고 그것에 대한 완존한 존재의 대안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이데아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바로 이 시간과 공간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일 뿐이라고 했다. 개별과 보편에 대한 논쟁은 중세 1,000년 동안 이어졌다. 서양의 존재론은 한 마디로 '실체 존재론'이다. 반면 동양의 존재론을 상징하는 <주역>은 서양의 실체 존재론과 전혀 다른 '관계 존재론'이다. "是故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시고 역유태극 시생양의 양의생사상 사상생팔괘)에서 보듯, 태극이 양과 음이로 나뉘고, 사상(태양·소음·소양·태음)이 팔괘를 낳는다. 각각의 괘는 그 자체의 실체적 속성 보다는 다른 괘와의 관계, 그리고 괘들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결정되고, 이런 관계나 위치는 끊임없이 상생 변화함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괘들 간의 관계와 변화는 한 괘 내부의 각 효의 위치 변화에서도 똑 같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고유한 '실체성' 보다는 상호 간의 '관계'에 의해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동과 서는 이렇듯 우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사회를 접근하는 근본적인 시각과 방식이에서 다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굽은 소나무가 고향 선산을 지킨다"는 말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조금만 철학적 상상(?)을 동원해보면 그것이 보일 수도 있다. 실체적 사고는 개인의 타고난 능력이나 역량을 주목하겠지만, 관계적 사고는 그것들 보다는 오히려 다른 것들과의 관계가 우선할 수 있다. 개인들의 자질이나 역량 보다는 그가 처한 위치나 환경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장애나 단점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컴플렉스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부각시키거나 그것을 계기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장애는 그의 성장과 발전에 오히려 자극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고, 그가 다른 곳에 소속해 있다면 그의 장애 보다는 그의 장점이 훨씬 더 잘 발휘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있는 사람은 오히려 끈기와 성실이 뒷받쳐져서 더 일을 잘 할 수도 있다. 다만 그의 단점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의 장점이 발휘될 수 있는 조직이나 인간 관계가 더 큰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고향 선산의 소나무가 너무 좋으면 베어나갈 확률이 높다. 반면 굽은 소나무는 그럴 가능성이 훨씬 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 선산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쓰임새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크게 보면 <성서>에 나오는 '모퉁이의 돌' 처럼, 이 세상에는 따돌리고 괴롭히고 내칠 사람은 없다. 모든 존재자들이 다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