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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좌파 지식인의 표상, 찟 푸미삭(Jit Phumisak, 1930~1966)과 동남아시아 내 사회주의 문학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4:59:12

1950년대 태국의 좌파 지식인 중에서 찟 푸미삭(Jit Phumisak, 1930~1966)이라는 이름의 시인, 뮤지션, 지식인은 당대에서 가장 유명했던 지식인이었다. 찟은 절대왕정이 폐지되기 직전에 태어나 사회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의 반미(反美) 정서 속에서 자랐다. 그 또한 앞선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당대 사회주의 작가 중 하나였지만 다른 사회주의자 및 마르크스주의자와 다른 점은 때 이른 죽음 이후 금서가 된 그의 작품을 젊은 활동가들이 비밀리에 복제하여 유통했다는 점이 다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016년은 찟의 50주기가 되는 해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이미지가 어떻게 공산주의자에서 혁명가, 학자, 최근에는 복권 당첨번호를 알려주는 영험한 혼령으로 변해 왔는지 살펴보면 흥미로운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찟 푸미삭이라는 인물은 태국 정치사를 공부한 이들에게 있어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으로, 언어학이나 문학 연구자에게는 농민과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재능 있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와 정치 활동가들에게 감히 태국 왕가와 불교를 비판한 진보적, 저항적 사상가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태국 방콕에 있는 찟 푸미삭의 동상,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찟은 1930년 9월 25일 태국의 전형적인 중간계급 가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무 공무원이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태어난 곳은 태국 동부의 쁘라친부리(Prachinburi) 주이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각 지역으로 이사 다니다가 16세에 방콕으로 이주했다. 찟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시를 다수 썼는데 대부분은 사랑, 연애, 여행에 관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태국 영토였지만 지금은 캄보디아 동북부가 된 바탐방에 잠시 거주했던 적이 있다. 바탐방에서 그는 크메르 언어, 역사, 고고학에 대해 배워 고대 비문을 읽을 줄 알게 되었는데 덕분에 태국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젊은 시절 찟은 “문학 연구자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현실의 나는 너무 가난했다 … 책을 사고 싶어도 돈이 없었다.” 라고 했다. 이 시기에 저술한 시는 대개 사랑과 연애에 관한 것이지만 1946년에 쓴 시 한 편은 태국이 프랑스에 바탐방을 탈환하기를 바라는 애국적인 감정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그는 태국이 다시 강력해진다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노래했다. 언어적 재능이 뛰어난 독서가였던 찟은 1950년 쭐라롱꼰(Chulalongkorn) 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학내 외에 글을 다수 발표했다. 


그 중 찟 푸미삭 자신이 편집자로 있던 쭐라롱꼰 대학교 연감에 1953년 발표한 글 2편이 학내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켜, 보수적인 학생들에 의해 연단에서 끌려 내려오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 사건은 후일 욘복(Yonbok) 사건으로 알려지게 된다. 연감에 발표한 글은 불교 승려들의 탐욕스럽고 물질주의적인 행동을 비판한 산문 한 편과 쾌락으로 인해 임신한 여성은 어머니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비판하는 시 한 편이었다. 이 글로 인해 찟 푸미삭은 1년 반 동안 정학 당했을 뿐 아니라 경찰로부터 공산주의자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사게 된다. 태국 사회의 두 핵심 가치인 불교와 여성을 비판했던 것인데 이러한 입장은 당시에는 공산주의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정학 중과 후에도 찟은 태국 봉건주의, 제국주의, 왕조 중심의 역사를 비판하는 작품을 시, 기사, 문학 비평, 사회주의 소설 번역의 형태로 왕성하게 생산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찟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오늘날 태국 봉건주의의 진정한 얼굴(The true face of Thai feudalism today)>은 왕조와 지배 계급 내부에서 오래도록 지속되어 온 삭디나(Sakdina, ‘논(畓)의 힘’이라는 뜻)를 비판했었다. 15세기 중반 아유타야 왕조 때 왕족부터 노예까지 모든 백성이 신분에 따라 받는 토지의 양을 정한 제도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분제와 봉건제를 상징하는 가치만 남았다. 


이어 봉건적 가치에 기반을 둔 태국 사회 구조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1950년대 말 태국 사회의 봉건적인 잔재를 지적한다. 이 책은 크레이그 레이놀즈가 1987년 영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해외 학계에도 알려졌다. <진정한 얼굴(The true face)>은 1957년 한 저널에 처음 발표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서가 되었다. 1958년 친미 과두의 반공산주의 정책이 펼쳐지는 가운데 찟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사릿 타나랏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그 해였는데 찟은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재판 없이 6년간 투옥되었다가 1964년 ‘무죄’ 평결을 받아 석방되었다. 그 후 찟은 동북부의 태국 공산당에 가담하러 정글로 들어갔다가 1966년 36살의 나이에 촌장과 민병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당국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했기 때문에 살인은 정당화 되었고 그를 저격한 촌장은 미국 당국으로부터 소총과 하와이 행 왕복 항공권을 보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찟의 시신은 제대로 화장되지 않았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상세한 정황은 오늘날까지도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찟이 당대의 유일한 좌파 작가는 아니었다. 1932년 혁명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까지 중국계 공산주의자와 좌익 지식인들이 책, 신문, 잡지 등의 인쇄 매체를 통해 태국 지식인 사회에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했다. 


그러나 찟을 이전 세대와도 이후 세대와도 다르게 만든 것은, 그의 학문적 저술이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된 점 말고도 문제적인 생애 탓에 1970년대 중반 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문화 영웅이자 혁명가의 전범이 되었다는 점이다. 살아있는 동안 찟은 에세이, 시, 학술논문, 노래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는데, 태국과 크메르 (캄보디아) 역사, 어원학, 문화 기술지에 관한 학술 작업, 태국 고전 문학과 예술 비평, 마르크스주의 소설 번역과 여성과 불교에 대한 비판과 옥중 생활에 대한 회고록 등이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태국 지배 계급을 비판하고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며 농민과 노동 계급의 이야기를 대변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를 담고 있다. 그가 작곡한 노래 16곡 중에서 <생다오 행 삿타Saengdao haeng sattha, 믿음의 별빛>이 가장 유명하다. 찟은 옥중에서 자신과 동지들이 어려움과 불의를 극복할 용기를 북돋기 위해 이 곡을 만들었는데, 다시 논하겠지만 이 노래는 1970년대 중반 태국 민주화운동 이후 지금까지 사회 불의에 맞서는 시위대에게 상징적인 곡이 되었다. 1947년 피분 송크람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프리디 파놈용(Pridi Phanomyong, 1900~1983) 태국의 정치인이자 사회운동가로써 초창기 프랑스 유학 동기였던 송크람을 도왔다. 


프리디는 1932년 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 중 자유 태국 운동을 이끌었으며 1946년 총리로 선출되었다. 탐마삿 대학의 설립자이자, 태국 자유주의와 반 군부 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송크람과 프리디는 민간정권을 전복했지만, 1945년부터 1958년까지는 태국 사회문학의 황금기이자 전후 태국 좌익과 민족해방운동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로 여겨진다. 태국 좌익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 혁명에 영감을 받은 이들이 태국 공산당을 결성하고, 자유 태국, 세리 타이(Seri Thai) 운동 내 좌익 구성원의 지지를 얻으면서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연합군에 협력한 태국의 지하운동이었는데 1958년 쿠데타 이후 사릿의 탄압으로 그중 다수가 단명했지만, 1946년에서 1967년 사이 적어도 23종의 급진적 출판물이 신문, 주간지, 격주간지, 월간지 형태로 발행되었다. 당시의 급진적 출판물 중에서는 월간지 <악손산>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1949년 친 프리디파 베테랑 언론인 수파 시리마논이 창간한 이 잡지는 태국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외국 저작의 번역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생각과 연구를 확산시키는 중요한 안내서가 되었다. 


잡지의 필자 중 절반 정도는 우익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좌익 일색은 아니었지만 꿀랍 사이쁘라딧(Kulap Saipradit), 아사니 폴짠, 사막 부라왓(Samak Burawat)과 같은 사회주의자의 기고문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아사니는 인트라웃(Intrawuth)이라는 필명으로 불교와 문학으로 지탱하고 있는 권력적 수단을 정당화하는 지배 계급을 비판하는 글을 여럿 저술했다. 예를 들어 그는 아유타야 시대의 유명한 고전이자 잘 생긴 왕자와 타국 출신 두 공주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 <릴릿 프라 로르(Lilit Phra Lor), 로르 왕자 서사시>를 비판했다. 인트라웃은 이 이야기가 지배 계급이 즐겨 읽는 얇고 야설인 이야기이며 인민을 왕조에 복종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의 다른 글에는 마르크스주의 입문, 중국의 사회주의자인 루쉰의 작품 번역, 스탈린의 역사유물론에 관한 글 번역 등이 있다. 아사니 같은 <악손산>의 전위적 필자들이 새로운 개념의 예술 곧 ‘삶을 위한’ 예술과 문학을 소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악손산>은 1952년 공산주의적인 색채로 인해 타나랏 정권에 의해 폐간되고 말았다. 이 잡지는 단명했지만 찟 푸미삭을 비롯하여 후일 진지한 사회주의자가 되는 수많은 젊은 독자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찟은 <악손산>의 초창기 필자들로부터 분석의 방법론뿐 아니라 글의 소재도 얻었다. 그렇다면 찟 푸미삭은 언제, 어떻게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보수 우익 기관인 쭐라롱꼰 대학교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그 사상을 수용한 곳이다. 1950년대 초 좌파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연구가 점점 더 주목받던 상황을 고려하면 우연은 아니다. 찟은 <악손산>에 실린 글에서 영감을 얻고 중국의 혁명가 루쉰에 대해 알고 존경하게 되었을 것이다. 찟은 주요 작품인 <오늘날 태국 봉건주의의 진정한 얼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다른 작품 또한 주목해 볼만 한 가치가 있다. 태국과 캄보디아 고전문학의 열독자였던 찟은 수코타이 시대부터 방콕 시대 중기인 13세기부터 1860년대 사이에 저술한 숱한 태국 고전 문학 작품을 비평했다. <진정한 얼굴>에서와 비슷하게 찟의 목적은 보통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 왕족과 조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고전적인 운문 쓰기 방식을 비판하고 독자들이 이와 같은 작품들의 사회적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가장 먼저 찟은 하급 관료인 띰 수카양(Tim Sukhayang)이 1869년에 저술한 장문의 기행문 <니랏 농카이Nirat Nongkhai (농카이 기행)>을 비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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