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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삼별초 내왕설과 고려, 조선, 탐라국과의 관계의 역사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5:00:36

최근 중국과 일본의 대만 유사시 발언에 대한 갈등으로 오키나와 문제까지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오키나와의 역사적인 부분까지 함께 거론되고 있다. 우선 몽골제국이 고려와 전쟁할 13세기 무렵 마지막까지 대몽(對蒙) 항쟁을 벌였던 군사집단이 삼별초(三別抄)였다. 당시 무신 최씨 정권의 사병들이었던 삼별초는 왕실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간 해인 1270년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배중손(裵仲孫)의 지휘 아래 여몽 연합군과의 항거를 시작했다. 삼별초는 1271년 5월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근거지였던 진도가 함락되자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제주도로 이주했고 여기서 지금의 경기도 부천까지 공격하며 여몽 연합군과 사투를 벌였다. 1273년 4월, 전선 160척에 탄 여몽 연합군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제주도를 공격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김통정은 자결하고 남은 1천 3백 명의 군사들은 여몽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교과서에 나타난 역사는 제주도에서 패전으로 인해 이들이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1273년 제주도서 패주한 일부 삼별초 세력들이 오키나와로 이동했고 제주도에서 오키나와까지 당시 함선으로 빠르면 3일 정도 걸릴 수는 있는 것이 최근 연구로 확인되었다. 

중국과 교역을 위해 출발하는 유구국의 사신단, 출처 :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필자의 직접 촬영


이러한 연구의 시작은 삼별초 중에서 포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남김없이 전멸했던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생존한 삼별초 세력 중의 일부가 함선들을 나누어 탑승해 남쪽으로 떠났다면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디였을 지에 대한 의문과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는 제주도 남쪽으로 700~800㎞ 떨어졌으며 후일 소설에서 홍길동이 건너가 건국했다는 율도국이었다는 전설도 전해지는 섬인 오키나와(沖繩)라는 추정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추정들이 상상 속에서 나타나는 소설의 이야기가 아닌 상황이 되어갔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 오키나와 연구를 통한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특히 공주대학교 해양학 연구소 윤용혁은 한국중세사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논문 <오키나와의 고려 기와와 삼별초>를 발표하면서 최초로 결과를 냈다. 이 연구는 오키나와 본섬 남쪽 우라소에성(浦添城) 등지에서 출토된 기와가 1273년 고려 삼별초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다. 그 기와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주목 받게 된 것은 2007년 6월인 것으로 나타났다. <탐라와 유구(琉球 · 류큐) 왕국> 특별전을 준비하던 국립제주박물관의 민병찬 등은 오키나와에서 대여해 온 13~14세기 수막새 기와가 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3세기 고려시대 기와와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대한 연구의 합리적 정의를 세우게 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기와의 수막새는 수키와가 이어진 처마 끝을 장식하는 기와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기와 모두 가운데 둥근 원 주위로 연꽃잎들이 새겨졌고 테두리엔 연속적인 점무늬가 발현되고 있었다. 박물관의 연꽃잎이 8개, 오키나와 것이 9개라는 것 정도만 달랐지 다른 부분은 거의 비슷했다. 그리고 박물관 기와는 전라남도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것이었다. 용장산성은 삼별초가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었고 삼별초의 남은 세력들이 남하했던 것을 가능성으로만 유추했던 것이 실제일 확률이 높을 것으로 판단하기에 이르게 된다. 오키나와에서 온 기와 중에는 좀 더 확실한 내용을 전해 주는 암키와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와에는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癸酉年高麗瓦匠造).”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1273년, 제주도의 삼별초 세력이 진압된 그 해가 계유년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이유로 볼 때 진도나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떠났던 일부 삼별초 세력이 오키나와에 도착한 뒤 이 기와가 덮인 건물을 지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고려식 기와는 우라소에 성과 슈리성(首里城) 등 여러 곳에서 출토되어 오래 전부터 알려졌던 유물이지만 국내에선 그다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학계에선 대체로 기와의 계유년이라는 문구가 조선 개국 직후인 1393년이라고 추정해왔었다. 그러한 이유는『高麗史』에서 처음으로 고려와 유구국 사이의 교섭 기록이 등장하는 것이 유구국 중산왕(中山王) 찰도(察都)가 사신을 파견한 1389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용혁은 <오키나와의 고려 기와와 삼별초> 발표문을 통해 “계유년은 1273년 이외의 다른 해가 되기 어렵고 그 기와를 만든 세력은 삼별초가 유력하다.” 는 견해를 피력했다. 1389년이면 고려 장인이 원나라나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기와에는 간지(干支)라 불리는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만을 기록했는데, 삼별초는 강화도와 진도에서 사용한 외교문서에 의하면 간지만으로 연대를 표시했다는 것이다. 또한 1392년의 조선 건국은 소수 정치 집단에 의한 쿠데타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기술자 집단이 해외로 이주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고 보았다. 윤용혁은 진도의 삼별초가 몽골의 압력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일본과의 공동전선을 구축하려 했던 것에 주목했다. 진도가 함락된 지 한참 뒤인 1271년 9월에 교토(京都)에 도착한 서신에서 삼별초는 “몽골이 곧 일본을 침략할 것”이라며 “식량과 병력을 협조해 달라”고 요구한 사료가 발견되었다.


제주도의 삼별초 세력 역시 일본에 도착한 원나라 사신 조양필(趙良弼)의 활동을 방해해 교토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것으로도 정황 근거들을 세울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외교적인 활동을 감안하면 당시 삼별초 세력이 진도에서 제주도로 이동했을 때 잔여 세력의 일부가 제주도가 아닌 일본 등 제3의 지역으로 분산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제주도가 함락될 당시에는 진도 때보다 더 많은 분산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후대의 기록을 보면 조선인이 유구 열도에 표류되었다가 송환된 일례가 상당히 등장한다.『朝鮮王朝實錄』만 해도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 6년 1397년 조>에 의하면 9명이 유구에 표착한 것을 비롯해 명종 1년인 1546년까지 13건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표류 사례는 거의 조선으로 송환된 경우를 서술했기 때문에 실제 표류한 일례들은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구에 도착하기까지 날짜와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770년 12월 25일 제주항을 출항했다가 조난한 장한철(張漢喆) 일행은 불과 3일 만인 28일에 오키나와의 호산도(虎山島)에 도착했다는 기록도 남겨져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삼별초가 제주도로부터 계획적인 항해를 시도했을 경우 충분히 오키나와에 닿을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진도 함락이 5월, 제주 함락이 4월의 일이었는데 조선 후기 기록에 의한 통계를 보면 4월에서 8월까지 5개월 동안의 기간이 해상 사고가 가장 드문 기간이었기 때문에 도주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별초가 오키나와에서 고려 기와로 건물을 세웠다면, 이는 아직도 고대사의 대부분이 공백으로 남겨진 오키나와의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다. 삼별초가 한국사 기록에서 사라진 13세기부터 오키나와는 비로소 농경이 본격화되고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지역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에 섬 지역에서 큰 성도 축조되었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 어디서 그러한 문화적 기술이 유입되었던 것인지에 대해 아직도 논의가 진행 중에 있다. 이로 인하여 최근 들어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이 건국되는 기초를 세우는 것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이 삼별초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삼별초 세력이 주도한 오키나와의 대형 건축 공사가 정치적 공동체의 출현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윤용현은 “현지 자료를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민족항쟁사의 차원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중세 동아시아 교류의 국제적인 맥락에서 이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5세기에 통일 류큐 왕국이 출현한 오키나와는 조선과도 활발한 교역을 펼쳤으며 1879년 일본에 강제 합병될 때까지 독립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이 점령했고 1972년 일본에 모두 반환됐지만 여전히 독립을 요구하는 의견들이 발생하고 있다. 동중국해 남단의 류큐 제도를 영토로 하여 왕정 체제를 꾸렸던 국가인 유구국(琉球國)은 현재는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일본의 오키나와 현으로 합병되어 있으나 여전히 그 일대를 류큐라고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오키나와 섬 주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섬을 류큐국이라고 하고 있다. 이들은 중세시기에 명나라와 베트남 레 왕조에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조선에도 종종 조공을 바치거나 표류한 어민들을 송환하는 등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 제법 중립적인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의 최대 영토는 현재 가고시마 현에 소속된 아마미 군도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에 군사 수효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했었고 결국 류큐 왕국이 아마미 군도의 지배권을 사쓰마에게 내주게 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에 대해서 아마미 군도 의 역사를 참조할 수 있는데 아마미 군도가 사쓰마에게 넘어가는 과정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군은 류큐를 일본에서 독립시키면서 미국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는데, 오키나와 현과 아마미 군도는 물론이고 한 번도 류큐의 지배에 들어간 적이 없는 도카라 열도까지 류큐에 포함시키게 된다. 그리고 1950년대 초에 도카라 열도와 아마미 군도를 순서대로 일본에 반환되면서 이들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1966년까지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미국이 세운 류큐 정부의 관할 범위는 오키나와 현으로 축소되었는데 이는 점령국인 미국이 지배의 편리성을 위해 생성한 것이다. 이후 1972년에 오키나와 현도 일본에 반환되면서 미국은 후텐마 기지를 비롯한 일부 해상 지역만 영위하게 되었다. 당시 수도는 슈리(首里)였는데, 미국 통치기 이후 일본이 만든 오키나와 현의 수도인 나하의 일부가 되었으며 왕궁은 슈리성으로 현재 세계 유네스코 문화 유산에 지정되어 있다. 현 제주도인 탐라국과 자주 교역을 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지리적으로 제주도에 비해 일본 본토에 훨씬 멀리 떨어져 있고, 제주도와 더욱 가까웠기 때문에 훨씬 늦은 기간까지 제주도와 교역하고 있었다. 이들이 탐라와의 교역은 독자성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며 아마도 고려 시대부터 이루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탐라국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조선 초기에 완전히 중앙정부의 지배하에 들어왔기 때문에 독자적인 국가 수준으로 교역한 것도 고려 시대 중, 후기 시대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탐라국은 조선왕조에 의해 국권이 사실상 넘어간 자치지역 수준으로 남았지만 이후로도 류큐 왕국과 교역은 지속되었다. 이어 사쯔마로부터의 흡수 및 정복으로 인해 일본 열도와의 교역에 의존하게 되었고 제주도와는 교역이 점차 줄어들게 된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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