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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류큐 신화와 유구국 건국 및 오키나와 제도 통합의 역사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5:01:26

류큐 신화에서는 천신(天神) 아마미쿄(アマミキョ)의 후손이 천손씨(天孫氏) 왕조를 세우고 25대를 계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천제(天帝)가 여신 아마미쿄(阿摩美久, 阿摩彌姑)와 남신 시네리쿄(志仁禮久)를 보내어 류큐 열도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아마미쿄와 시네리쿄 혹은 천제의 아들 딸이 3남2녀를 낳았고, 장남이 천손씨(天孫氏), 차남이 아지(按司), 삼남이 백성의 시조가 되었으며, 장녀가 키미기미(君々), 차녀가 노로(ノロ)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손씨 왕조는 마지막 왕이 간신 이용(利勇)에게 시해 당해 멸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류큐의 신화는 북방의 신화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큐슈와 대만 사이의 태평양에 점도 있게 펼쳐있는 류큐 군도의 섬들에는 10세기경부터 부족 국가의 형태들이 출현하였다. 이들 섬에는 저마다 아지(按司)라고 불리는 족장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족장의 지위는 서로 평등하였고 이들은 평화로운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1~12세기경부터 오키나와 섬 각지와 주변 섬들에 구스쿠(御城)라는 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오키나와 나하의 중심, 류큐왕국의 도성인 슈리성,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이 때부터 대륙과 일본의 철기가 도입되고 정착 농경문화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인구도 상당수 증가했다. 이 시기 농업은 물이 잘 빠지는 석회암 대지에 밀과 조를 심고, 주변 저지대는 논으로 개간하는 형태였다. 현재 오키나와의 특산물이 된 사탕수수는 17세기가 되어서야 전해지고 있다. 구스쿠와 함께 성을 다스리는 족장 혹은 영주인 아지(按司)들은 각 지역의 실세로 등장하였다. 이들과의 경쟁과 충돌에 의해 구스쿠 시대는 전국 시대와 같은 양상을 보이게 된다. 구스쿠(城, 御城, ぐすく)는 류큐 제도에 세워진 성 또는 요새들을 말한다. 오키나와 어에는 스(す)가 시(し)로 변하는 음운 현상이 있어서 구시쿠(ぐしく)라고도 한다. 구시쿠라는 단어는 오키나와에서 현대에 많이 사용되는 발음인 것 같다. 현대 오키나와 본도에 많이 분포해 있으며 이 외에도 아마미 군도 등에도 분포되어 있다. 모든 구스쿠들을 합하면 300여개 가까이 되고 있다. 가장 빠른 시기는 11~12세기부터 구스쿠가 오키나와에서 등장하게 되는데 이전에는 석기와 금속기를 같이 사용하다가 철제와 같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군장 국가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스쿠와 그 일대를 다스리는 족장 혹은 영주들을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아지(按司)라고 불렀다. 또한 이 시기부터 류큐 왕국의 건국까지를 구스쿠 시대라고 부른다. 구스쿠는 성의 영향권 하에 놓인 지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카구스쿠구스쿠(中城城) 같은 경우에는 나카구스쿠에 있는 구스쿠이기 때문에 나카구스쿠구스쿠라고 하는 것이고 한국으로 예를 들면 한성 및 한양을 지칭하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다. 2000년에 나키진구스쿠(今帰仁城), 자키미구스쿠(座喜味城), 카츠렌구스쿠(勝連城), 나카구스쿠구스쿠(中城城), 슈리성(首里城)이 다른 유적들과 함께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이러한 구스쿠의 초창기 등장 원인으로는 4가지의 설이 존재하고 있다. 첫 번째 성역 설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신성시하던 곳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오키나와의 류큐 신토에는 제사를 지내는 성소인 우타키(御嶽)가 있는데, 초창기의 구스쿠는 우타키(御嶽)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우타키(御嶽)는 류큐 신도에서 제사 등을 하는 시설이다. 류큐 왕국이 제정한 류큐 신앙 성소의 총칭으로, 그 이전에는 다양한 호칭이 각 지방에 있었다. 


이 호칭은 주로 오키나와 주변 섬에서 사용하였다. 우타키는 류큐 신화의 신이 존재하거나 방문하는 장소이며, 또한 조상신을 모시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역 제사에서는 주요 시설이며, 지역을 수호하는 성소이다. 류큐의 신앙은 신을 섬기는 것은 여성만이 가능하므로 왕국 시대는 완전히 남자는 금지이었다. 지금도 특정 지역에서는 남자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 난죠시(南城市)에 위치한 타마구스쿠구스쿠(玉城城)의 경우에는 아직도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또한 여러 구스쿠의 내부에는 우타키(御嶽)가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두 번째 집락 설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건설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고 있다. 세 번째 성관 설은 아지와 같은 유력자의 거점으로 건설되었다는 설이 있고 네 번째 삼별초 설이 존재하는데 몽골과 항쟁하던 삼별초 군이 제주도에서 패배한 이후 일부 생존자들이 오키나와로 이동하여 건설하였다는 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삼별초 설에 대한 근거로 구스쿠에서 출토된 기와가 고려 삼별초 시대에 제작된 기와의 문양과 유사한 제작자와 만든 시기가 기와에 표시되어 있다. 


아지(按司, あじ)와 같은 호족들은 각 오키나와의 섬들 및 지역마다 성들을 건설하여 세력을 굳혔다. 류큐 왕국 시대에는 방계 왕족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지만 3왕국 시대 이후에는 호족들이 모두 사라졌다. 또한 이러한 아지는 안지(あんじ)로 읽기도 한다. 어원은 일본어로 주인을 뜻하는 아루지(あるじ, 主)로 추정되고 있다. 12세기부터 류큐에 농경문화가 발달하면서 구스쿠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때 등장한 지배자가 아지들은 성(城)인 구스쿠를 쌓고 그 일대를 다스렸으며 상업도 장려하여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해양 실크로드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류큐의 창세 신화에 의하면, 창세 신인 아마미키요(アマミキョ)와 시네리키요(シネリキヨ)가 낳은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이 아지의 조상이라고 한다. 아지 이 외에도 요노누시(世の主, 세상의 주인)과 같은 칭호도 있었다. 아지와 비슷한 존재들로 아마미 군도에는 우후야(大親), 미야코지마(宮古島)에는 투유미야(豊見親)라는 신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슌텐 왕조(舜天王朝), 에이소 왕조(英祖王朝) 등의 왕조들에 국왕들이 존재하였으나, 이들은 중앙 집권 국가의 수장이라기보다 여러 아지들을 대표하는 존재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시키(佐敷)의 아지였던 쇼하시(尚巴志)가 삼산(三山)을 통일하면서 류큐 왕국이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왕족들 또한 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제2 쇼씨 왕조(第2 尚氏王朝)의 임금인 쇼신(尚真) 왕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아지들을 수도 슈리에 모여 거주하게 하였다. 아지들을 대신하여 아지웃치(按司掟)라는 관리들을 파견하여 지방을 다스렸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방계 왕족들만이 아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기존에 오키나와 각지에 할거하던 호족들은 아지 대신에 웨카타(親方, うぇーかた)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아지가 거주하는 저택을 우둔(御殿, うどぅん)이라고 불렀으며, 그 가문의 주인인 아지를 부르는 호칭으로도 사용되었다.19세기 말의 아지들은 26개로 오로쿠(小祿), 윤탄자(讀谷山), 요시무라(義村), 요나시로 / 요나구스쿠(與那城), 토미구스쿠(豊見城), 오오자토(大里), 우라소에(浦添), 타마가와(玉川), 쿠니가미 / 쿤쟌(国頭), 오오무라 / 우후무라(大村), 모토부(本部), 미사토(美里), 하네지(羽地), 나고(名護), 친(金武), 마부니(摩文仁), 나카자토(仲里), 고에쿠(護得久), 오오기미(大宜見), 구시챤(具志頭), 마카베(真壁), 타마구스쿠(玉城), 구시카와(具志川), 타카미네(高嶺), 쿠시(久志), 카츠렌(勝連)이다.


구스쿠 시대 후기인 1187년 슌텐 왕이 첫 왕조인 슌텐 왕조를 개창했다. 2대 왕 슌바준키(舜馬順煕)의 선정에도 불구하고 슌텐 왕조는 3대 기혼왕(義本王) 때 멸망하고, 왕위를 찬탈한 신하 에이소가 에이소 왕조를 세우고 남송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5대 만에 멸망한다. 이후 14세기 말 류큐 군도의 최대 섬인 오키나와에 남산(南山), 중산(中山), 북산(北山)의 세 왕조가 건국되었다. 이를 두고 류큐의 삼산시대 또는 삼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삼국 중에는 오키나와 섬 가운데 위치한 중산왕국의 국력이 가장 강했고 북산왕국이 가장 최약체 국가였다. 류큐의 삼국시대에는 류큐 군도 북부의 아마미 제도와 남부의 사키시마 제도는 아직 문명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다. 세 왕국이 심한 내전을 벌이던 중 오키나와 섬 남부 사시키(佐敷)의 아지인 쇼 하시(尚巴志)가 등장하게 된다. 그는 1406년에 중산을 멸망시키고 아버지 쇼 시쇼(尚思紹)를 중산왕에 옹립했다. 이 때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는데,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왕이 죽고 세자인 쇼 시쇼가 승계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당시 수도를 우라소에에서 슈리로 옮기고 슈리성을 왕궁으로 삼았다.


1416년에는 북산왕 한안지(攀安知)에게 불만을 가진 북산의 여러 아지들과 세력을 결집하여 북산의 수도 나키진(今帰仁)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북산왕 한안지는 자결하고 북산은 멸망하여 중산에 흡수되었다. 1421년에 쇼 시쇼 왕이 붕어하자 쇼 하시가 중산왕에 즉위했다. 1425년에는 명나라의 영락제가 보낸 책봉사가 도착하여 쇼 하시의 중산왕 즉위를 인정했다. 1429년 쇼 하시는 남산을 멸망시켜 마침내 삼산을 통일했다. 1430년 쇼하시는 명나라의 선덕제(宣德帝)에게 사신을 보내 “우리 류큐국은 세 왕이 다스리기를 100여 년, 전쟁이 그치지 않아 백성들이 허덕였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제가 두 왕을 토벌했습니다. 이제 류큐는 태평성세가 되어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선덕제는 “내 마음에 드는 정치이다. 자만하지 말고 나라를 안정시켜라.” 라고 답서를 파견했다. 당시 명나라 황제의 입장에서 오키나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류큐 지역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조공을 받는데 차질이 생기는 것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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