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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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아편 전쟁(1839~1842)이 청나라의 패배로 종결된 뒤, 영국은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많은 경제적 효과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주력상품이었던 인도산 면제품의 판매는 기대와는 달리 매우 열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판매가 부진한 것은 중국 농촌에서 생산하는 면포가 훨씬 저렴하고 품질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의 사회경제적 구조가 여전히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수입제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존재했다. 게다가 늘어난 아편 수입으로 은이 대량으로 유출되면서 구매력을 잃었던 것도 큰 원인으로 작용되었다. 그러면서 제1차 아편전쟁 이후 광동을 중심으로 외국인을 배척하는 풍토가 전개된 것도 영국의 물품이 팔리지 않는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영국이 청나라와 벌인 무역은 여전히 중국 홍차의 수입과 아편의 수출이었다. 영국은 지속적으로 시장 개방을 확대하라고 압력을 넣었고 이러한 영국의 공세가 강해지자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을 유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수출이 여전히 줄어들게 되자, 영국은 조약개정을 청나라에 요구하게 된다.

북경성을 함락하는 영불연합군,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1854년 4월 영국, 프랑스, 미국 공사는 함께 광저우로 가서 양광총독(兩廣總督) 엽명침(葉名琛)에게 모든 내지(內地)와 연해도시의 개방, 상선과 군함의 양자강 자유왕래, 아편 무역의 합법화, 내지(內地) 통관세의 폐지, 외국 사절의 북경 상주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남경조약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수출이 부진한 원인은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이 값싼 중국 제품의 저향력, 자급자족적인 중국의 사회경제 구조, 지속적인 은 유출과 물가 상승으로 인한 구매력 저하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깊숙한 내륙 지역까지 진입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유로운 내지 여행과 북쪽의 항구 개방 등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 같은 조정에 있어 먼저 외교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었다. 청나라는 광동에 주재하고 있던 흠차대신으로 하여금 외국 사무를 관장시키고 있었으나 영국 정부는 북경 조정과의 직접적인 교섭을 원하였다. 또한 개항지의 선정에도 상당한 불만이 존재했다. 5개 개항장은 중국 내지의 산업지역과 직접 연결돼 있지 않아서 복주(福州), 영파(寧波)를 소주(蘇州), 항주(杭州)로 변경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 개정교섭에서는 1856년 5월 미국 공사가 광저우에서 공사의 북경상주, 청나라 전 지역의 개방, 선교 및 포교의 자유 등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에서는 조약개정에 응하지 않자, 영국은 무력을 사용하여 개정을 관철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 마침 1855년 1월에 아편전쟁 이후, 남경조약에서 별다른 실익을 얻지 못해 탄핵당해 면직되었던 파머스턴(Palmerston)의 자작 헨리 존 템플(Henry John Temple)이 다시 수상으로 복직되면서 청나라와 강경 외압을 논의 중에 있었다. 그는 대청 문제에 있어 강경론자였기 때문에 청나라에 대한 강압적인 부분을 어떻게 논의할지 그 명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때 마침 1856년 10월 광저우 앞 주강(珠江)에 정박하고 있던 해적선 애로호의 영국 국기가 내려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헨리 존 템플은 애로호 사건의 보고를 듣고 청나라 원정에 대해 충분히 명분이 된다 여기고 있었다. 이에 1857년 2월 의회에 군비와 원정군 증강을 위한 경비를 제출하게 된다. 당시 의회에서는 이와 같은 사소한 사건으로 전쟁까지 한다는 것은 실로 창피한 일이라며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다.
특히 윌리엄 글레드스턴(William Gladstone)은 이에 대한 하원의 영수였는데 결국 상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하원에서는 부결되고 말았다. 이에 헨리 존 템플 수상은 하원을 해산시키고 총선거에 의한 재신임을 하게 되었다. 결국 새로 구성된 하원에서는 청나라와 전쟁 문제를 동의하게 된다. 게다가 1856년 광서 지방에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오귀스트 샤프들랭(Auguste Chapdelaine) 신부가 처형된 사건이 발생해 격양되어 있던 프랑스가 영국과 연합하여 출정했다. 1857년 영국과 프랑스는 광저우 시내를 공격했고 같은 해 12월, 광저우를 함락했다. 그리고 시가지 곳곳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살해했으며 약탈을 자행했다. 영국-프랑스군은 광저우를 점령한 이후에도 3년 동안 현지 지방관을 시장으로 세우고 괴뢰정권을 만들어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 위원회의 점령행정이 실시되었다. 이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1858년 북상하여 천진의 다구포대(大沽砲台)를 점령하였고, 북경의 관문인 천진까지 점령하자 청나라 정부는 북경이 위협받을 것을 대비하여 천진조약을 맺었다. 러시아와 미국은 전쟁 후반기에 협력을 제의하였으나, 실제로 군사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고 중간에서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으로 방식을 선회했다. 1858년 6월에 맺어진 천진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은 외교사절이 베이징에 상주할 권리를 가진다.
② 무역을 위해 10개의 항구를 개방한다.
③ 외국 상선의 자유로운 장강 통상을 승인한다.
④ 이전에 금지했던 중국 내 외국인 여행을 허가한다.
⑤ 아편무역을 합법화한다.
⑥ 개항 항구를 확대한다.
⑦ 기독교를 공인한다.
⑧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대한 배상금으로 은 200만 냥을 지불한다.
⑨ 영국 상인에게 재산 손실의 위로금으로 은 200만 냥을 지불한다.
⑩ 배상금을 낼 때까지 광동성과 보장을 점령한다.
이 조약은 애로호 사건의 결과로 체결되었던 남경조약 다음으로 이어지는 불평등 조약이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다구포대를 잃은 불리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조약을 체결하긴 하였지만, 청나라 정부의 강경파들은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쇄국의 공세를 이어갔다. 이에 청나라 황제 문종(文宗) 함풍제(咸豊帝)는 강경파들에게 심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했고 동아시아 종주국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1858년 후반 북경에서 천진조약 비준을 강행하려고 하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을 방어하기 위해 조약 강행을 위해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한 다구포대에 포대와 기병을 추가 배치하였다. 따라서 조약을 체결하려는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청나라 군대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전투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 함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근방에 있던 관전한 미 해군 조시아 탈트날(Josiah Tattnall)의 도움을 받아 철군하게 되었다. 이 승리로 인하여 청나라 정부에서는 한 동안 강경론이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1860년 6월 영국과 프랑스는 전년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859년의 지난 전투에 참여했던 함대의 8배가 넘는 병력과 군함을 모아서 다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