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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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두왕국은 16세기경 대만의 원주민인 파포라족(巴布拉族)을 중심으로 바부자족(貓霧捒族), 파제흐족(巴宰族), 호아냐족(洪雅族), 타오카족(道卡斯族), 카하브족(噶哈巫族)이 연합하여 건국한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이었다. 타이중현의 서쪽과 장화 현의 북부에 있는 27개의 부족 마을을 통치했다고 전해진다. 원주민들은 대만에 정착한 한족들과 교역을 하기도 했지만 조선이나 일본은 물론 이웃 지역인 오키나와 섬의 류큐 왕국에 비해서도 외부의 영향과 교류가 적었고 체계적인 문명의 형성이 늦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대두왕국의 주류 종족은 파이완족(Paiwan, 排灣族)이다. 파이완족은 대만 남부에 거주하는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의 원주민인 고산족의 한 종족이다. 넓은 의미의 파이완족은 북부 산지의 루카이족과 북동부 평지의 푸유마족이 포함된 남부 산지에 분포하는 부족이고, 협의의 파이완족은 그 북서부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파이완’이라 칭하고 있다. 언어는 파이완어와 중국 보통화를 사용한다. 2014년에 파이완족의 인구는 96,338명이었다. 이는 전체 대만 원주민 인구의 17.8%에 달하여, 현재 파이완족은 두 번째로 큰 대만 원주민 민족이라 전해진다. 파이완족은 대부분 대만 중앙 산악 지대의 남부 산줄기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다무무 산과 우뤄 강(吳若江), 남쪽으로는 헝춘(恆春) 반도에 이르는 지역이다.

대만의 17세기의 판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그 밖에 대만 동남부의 구릉지대와 해안 평원지대에도 거주한다. 파이완족의 독특한 제의로는 마사루(Masaru)와 말러버크(Maleveq)가 있다. 마사루는 쌀 수확을 기념하는 제의이고, 말러버크는 조상과 신을 경배하는 제의이다. ‘파이완’이라는 이름은 신화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신화에 따르면 파이완족의 조상들은 다우산 위의 ‘파이완’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이곳에 천국이 있었다고 한다. 파이완족은 이곳에서 퍼져 나왔으며 고향의 이름을 자기들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일부 부족민들에 따르면 ‘파이완’에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파이완족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는 수장 토카토크(Tok-a-Tok, 1817~1874)이다. 그는 18개의 파이완 부족을 하나로 규합하였으며, 1867년 대만 원정에서 미국 해병대를 격파한 이후, 중국 및 서방 지도자들과 파이완 족 영토의 해안을 지나는 배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공식 협약을 맺었고, 그 대가로 1867년 3월에 미국 상선 로버(Rover)호의 선원들을 살해한 파이완 부족민들은 면책을 받았다. 과거에 파이완족은 인간 사냥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파이완 전사들이 인간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면 여자들은 뜰 앞으로 모여 영웅들을 환영하고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적들의 머리는 돌기둥 위에 걸렸고 그 앞에는 술과 제물이 놓였다.
희생의 제의가 시작되었고, 주술사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마땅히 위로했다. 두개골에서 머리 한 다발씩을 뽑아 엄숙히 점을 치는 바구니 안에 넣었다. 1871년에 류큐 왕국의 함선이 대만 남해안에 난파했고 생존자 66명 중 54명은 파이완족에게 목을 베어졌다. 이 사건은 미야코 섬(宮古島) 조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청나라에 보상을 요구했지만 청나라는 “대만의 야만인”은 국가의 통치를 벗어난 자들이라며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1874년 대만 침략을 감행했고 이 때 토카토크가 전사하게 된다. 다른 고산족과 마찬가지로 조 재배가 의례적으로도 중시되지만, 타로의 밭 재배도 활발하다. 이 두 종족은 목조 공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현재와 비슷한 문양이 그들에게 전해진 청동기, 주로 검병에서도 발견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주변에서 풍부하게 발견되는 통 보옥으로 알려진 소위 고대 유리구슬에는 인도네시아 방면 특히 보르네오와 공통성이 인정된다. 따라서 파이완족은 족외혼을 금지했다. 5년마다 돌아오는 제의의 날이면 결혼을 원하는 파이완 족의 남자라면 모두 가능한 한 많은 나무를 베어 자신이 성관계를 맺고자 하는 여자의 가족에게 땔감으로 바쳐야 했다.
파이완족과 루카이족은 손에 문신을 하는 풍습이 있다. 귀족 여성들은 성인이 되는 통과 의례로서 손에 문신을 받고는 했다. 그러나 일본 식민 통치 시기에 이 풍속은 탄압을 받고 벌금형의 대상이 되어 그 후로는 예전만큼 많이 행해지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샤먼은 문신을 받는 사람의 배경에 따라 다른 도안의 문신을 해 주었다. 지체 낮은 집안의 여성들도 문신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그 전에 공동체의 허락을 받기 위해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는 연회를 열어야 했고 거기에 더해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신분이 낮은 여성들과 귀족 여성들의 문신 도안은 서로 달랐다. 문신을 받는 고통스러운 과정은 긍지와 명예를, 그 자신이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지를 드러내 주었다. 문신을 받는 과정에는 수많은 금기와 기도 등의 세부 사항이 개입되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에 대한 일례로 임신한 여자가 문신 과정을 지켜보아서는 안 되었으며, 지켜보는 사람 중 누구도 기침을 해서는 안 되었다. 금기가 하나라도 깨질 경우 의식은 중단되고 다른 적절한 날을 고를 때까지 미루어졌다. 1931년 말에는 전체 8,467호, 41,746명, 1942년 말에는 9,020호, 44,627명이었다. 1931년에 조사한 인구는 루카이족이 6,339명, 푸유마족이 5,289명, 파이완족이 30,118명이었다.
2000년 인구 조사에서는 파이완족이 70,331명으로 대만 원주민의 17.7%에 해당하며, 대만 원주민 중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민족 집단이었다. 언어는 파이완어나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산족의 여러 종족들이 많이 섞여 살고 있는 곳에서 볼 수 없는 귀족 계급과 평민 계급의 구별이 푸유마족에 상당히 명확하게 나타나며, 루카이족과 파이완족은 더욱 그러한 구별이 두드러진다. 이후 두 부족은 뱀이 종종 귀족 계통과 신비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뱀을 살상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금기로 여겨진다. 귀족 계통의 내부에서도 가문의 격이 서로 다르고, 수장 가문은 최고의 위치에 올라간다. 한 마을에 한 수장이 있거나, 몇 마을에 한 수장이 있거나, 한 마을에 여러 수장을 가지는 경우 등이 있고, 파이완족은 장자 상속, 루카이족은 장남 상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파이완족은 전통적으로 다신교를 숭배했다. 파이완족의 목각 예술품에서는 사람 머리, 뱀, 사슴, 기하학적인 형상 등을 찾아볼 수 있다. 파이완족의 바타울(Bataul) 분파는 5년에 한 번 말러버크(Maleveq)라 불리는 큰 희생 제의를 열어 조상들의 영혼을 불러 축복을 빈다. 말러버크에는 참여자들이 사람 머리를 상징하는 식물 줄기로 만든 공에 대나무 줄기를 찔러 넣는 활동을 하며 축제에 참여하고 있다.
샤머니즘은 파이완족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파이완족 샤먼의 지위는 혈통으로 상속되고 있다. 그러나 파이완족 샤먼의 수가 줄어 전통 제의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전통 제의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샤머니즘 학교가 설립되었다. 파이완족은 대만이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17세기에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된다. 네덜란드 지배 10년 만에 5,000명이 넘는 부족민이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1661년에 정성공이 대만을 점령했을 때 모두 학살당했다. 선교사들은 죽거나 추방당했고 교회는 모두 파괴되었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는 수천 명의 파이완족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을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오늘날 대만 장로교회는 96곳의 교회에서 14,900명의 파이완족 신도들이 모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신약성서가 파이완어로 번역되어 있다. 게다가 현재 카톨릭의 활동도 활발했다. 그러나 젊은 층이 교회에 나가는 비율은 떨어지는 추세에 있다. 대두왕국에서 파이완족 다음으로 많은 민족은 평포족(平埔族, 핑푸족)이다. 평포족은 대만에 거주하는 원주민 중 고산족이 아닌 민족을 통칭했다.
그러나 평포족은 한화(漢化) 되고 한족과의 통혼으로 인해 한족계 본성인(漢族系本省人)과 섞여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는 대부분의 평포족을 현재 원주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국가적인 공인을 얻은 것은 크바란족 뿐이며 일부 집단은 지방 정부에 의해 공인되어 있다. 평포족 다음으로 대두 왕국에 많은 수를 이룬 민족은 카바란족 또는 크바란족(Kavalan, 噶瑪蘭族)이다. 크바란 족은 대만 원주민족 중 하나로 나타나며 본래 남동부 이란 평야에 살았다가 19세기 한족 식민화를 피해 오늘날의 화련현과 타이동현의 해안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들의 언어는 크바란어라고 한다. 2018년 기준 인구는 약 6,000명이며, 오늘날 이들의 가장 큰 정착지는 화련 현 펑빈향의 신서촌(新社村)에 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구성원을 이루고 있는 종족은 시라야족(Siraya, 西拉雅族)은 대만 원주민의 한 집단이다. 대만 섬 남서부 해안과 동해안의 평야 지대에 살았으며, 이는 오늘날 타이난 시와 타이동현에 속한 지역이다. 마따우(Mattauw), 소에란흐(Soelangh), 바첼로나흐(Baccloangh), 신츠칸(Sinckan) 등 최소 4개의 부족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4개 집단은 각각 오늘날의 마따우구, 자리(慈利)구, 산화(山華)구, 신스(新碩)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았다.
시라야족은 고산족들과 달리 평평한 해안 지역에 거주해 온 평포족의 하나로, 일찍이 17세기부터 한족화가 진행되어 고유 언어인 시라야어도 19세기 말부터 완전히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현재 시라야족은 모어로 주로 복건어를 사용하며 일본의 지배 시대에는 일본어, 이후로는 중국어를 공용어로서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라야족은 여러 문화적인 측면을 유지하였으며 상당수의 시라야 가계는 시라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신화 구 지역의 흔한 성씨 완(萬)씨는 시라야족 이름 타라반(Talavan)을 음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1999년 타이난현 평포족 시라야 문화협회(台南縣平埔族西拉雅文化協會)가 창설되었고 2005년 타이난현 지방정부는 시라야 원주민 사무 위원회를 설치하여 2008년 단어 사전 출판을 지원하였다. 시라야족을 비롯한 평포족들은 정부의 공인을 받기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또한 고산 지대에 있던 야미족(Yami) 또는 타오족(Tao, 達悟族)은 대만의 부속 도서인 란위 섬(蘭嶼, 오르치드 섬)의 원주민이다. 선박 건조와 어업에 큰 의식적, 정신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해양 문화를 가지고 있으나 현대에 더 나은 직업과 교육을 찾아 대만 본토로 계속 이주하면서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위협을 겪고 있다. 다른 대만 원주민이나 바탄 원주민들과 연관되어 있으나 습속이나 문화에 있어 여러 독자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