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라오스의 국부(國父) 쑤파누봉과 파테트라오 - 라오스-캄보디아를 가로지르는 호치민루트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5:05:15

쑤파누봉은 1909년에 태어났으며 라오스 왕국의 왕자이자 후일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의 초대 주석이 된 인물이다. “붉은 왕족(Red Royal Family)”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며, 현대 라오스의 역사적 운명을 바꾼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라오스 왕족 출신인 쑤파누봉은 루앙프라방의 마지막 이왕(二王)이었던 분콩(Bounkhong) 왕자의 세 아들 중 하나였으며, 라오스 왕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상인 수완나 푸마의 이복동생이었다. 다른 두 왕자들과 다르게 쑤파누봉의 모친은 평민이었으며, 이러한 그의 가정환경은 이후 그가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갖게 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대에 베트남에서 유학한 쑤파누봉은 공산주의자이자 호치민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라오스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라오스로 돌아가 1950년 8월 공산주의 정당인 파테트라오를 세우고 수완나 푸마 라오스 왕국 총리와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파테트라오 임시정부의 수상인 그는 파테트라오의 창건 이후 “파테트라오는 조국 라오스, 라오스의 땅으로 진정한 라오스 인민의 정당이며 지금 정부는 프랑스의 통치를 받고 있다!!” 형식의 입장을 내세움으로써 라오스 왕국과 계속된 분열과 냉전을 통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반복하였고, 베트민과 더불어 프랑스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파테트라오와 호치민루트,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1953년 라오스 삼네우아(Samneua)에서의 승리는 베트민과 쑤파누봉이 지휘하는 파테트라오가 연합하여 이룩한 승전이었다.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에서 라오스 평화 정상회담 때도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평화를 받아들이고 왕실을 유지하는 척, 기회를 보면서 라오스를 공산화시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이 승리했고 미국의 인도차이나 반도 지원을 중단하기로 한 계기로 인해 전세는 파테트라오에게 기울어졌고 1975년 쑤파누봉은 마침내 라오스의 공산 통일을 이루어 냈다. 전쟁 직후,  파테트라오가 일당체제로 집권하며 쑤파누봉은 초대 주석에 취임하였으며, 카이손 폼비한(Kaysone Phomvihane)은 정부 수상에, 누학 품싸완(Nouhak Phoumsavane)은 정부 부 수상에 임명되었다. 취임 3년 후인 1995년에는 '반혁명활동 방지법'을 제정했다. 이후 파테트라오의 이름을 라오 인민 혁명당으로 바꾸고 공산주의 정책을 시작했으며, 폐위된 싸왕 왓타나(Ssawang Watthana) 국왕을 비롯한 왕족들을 탄압하고 라오스 왕국의 우익, 자본주의 세력들, 소수민족들을 재교육 수용소로 보냈다. 다만 공산화 이전까지 쑤파누봉과 대립했던 이복 형 수완나 푸마 총리는 사형당하지 않고 공산정부의 고문을 지냈다. 


비슷한 시기 극단적인 폭압적 공산주의 통치를 행하며 자국민들과 이전 캄보디아 왕국과 크메르 공화국 정권의 옛 인사들을 수십만 명이나 처형했던 남쪽 캄보디아 공산주의 독재자이자 집권 세력인 크메르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에 비하면 쑤파누봉의 통치는 비교적 온건하였으며 현재도 라오스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사실 라오스-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이유로 인해 무리 없이 상황이 빠르게 종료될 것이라고 미국 정치인들은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 국방부는 전차와 비행기로 밀어 붙이는 재래식 전쟁에는 익숙했으나 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국력상 북베트남보다 훨씬 우월했던 일본을 정글 전에서 격퇴했던 미군이 베트남에서는 유독 고전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베트남 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치러진 장소만 비슷할 뿐 모든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일단 일본군은 북베트남, 베트남 공산 게릴라 군과 같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는 군대가 아니라 미국과 같은 정규전을 수행한 군대였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과는 흐름이 전혀 달랐다. 그리고 일본군은 멀리 떨어진 일본 열도에서 배로 보급을 실어 날라야 했기 때문에 미군이 제해권과 제공권을 차지한 이후로는 보급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지만, 북베트남은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부터 안정적으로 보급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미군은 북베트남을 상대로 엄청난 폭격을 했지만, 중국과 충돌할 것을 우려하여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 지대까지는 폭격하지 못했다. 북베트남 측에선 구찌 터널을 교묘히 이용하여 보급로를 숨겼던 데다 우거진 정글에서 정찰하고 표적을 식별하는 것은 21세기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북베트남 군 역시 전투기나 대공포로 계속 반격을 하였기 때문에 폭격의 효율성이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상황이 이러하자 이제는 미군이 지속적으로 폭격을 해도 북베트남군의 보급을 끊을 수 없었다. 6.25 전쟁에서 한 번 크게 몰렸던 중국을 경계해 북베트남 본토로 진공할 수도 없었다. 아시아의 쌀농사 문화권의 인구밀도야 말할 것도 없고, AK 소총 정도의 군수물자는 중국이 공급해 주니, 결국 베트남 인구 전체와 개인화기로 전투를 벌여대는 전쟁이었다. 정글은 녹색 사막이라 불릴 정도로 인구 부양력이 매우 낮으니 시가지와 개간지를 점령하고 버티면, 정글 게릴라들은 돌격하면서 전사하거나 아니면 기근이 들어 죽는 시한부 생명이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앞서 언급했듯이 미군이 적의 보급을 끊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베트남 게릴라 군들이 이미 태평양 전쟁에서 그 위력이 입증된 땅굴 전술까지 이용하기 시작하자 미군은 끊임없이 피해가 누적되면서도 적의 화력을 유의미한 수준까지 줄이지 못했다. 


그 땅굴 전술 중 가장 유명한 땅굴이 구찌 땅굴이다. 구찌 땅굴이 있는 지방의 흙은 처음에는 부드러웠기 때문에 호미로도 쉽게 파낼 수 있지만 비 오는 날에는 흙이 굳어 버리는데 전차가 지나간 자리에도 베트남 게릴라 군의 지하기지는 붕괴되지 않았다. 지하기지가 있음을 파악한 미군은 입구를 찾기 위해 독일산 군견들도 동원했지만 오히려  베트남 게릴라 군은 고춧가루를 여기저기 뿌리거나 미군들의 물품으로 후각을 잃게 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어떻게 입구를 찾아도 베트남 게릴라군의 지하 기지  입구는 체격이 작은 베트남 게릴라군이 겨우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큰 몸집이 대부분인 미군은 땅굴에 들어가지 못했다. 게다가 모양이 같은 가짜 출입구도 많아서 정확한 입구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미군은 체격이 작은 병사들을 뽑아 땅굴 쥐라고 불리는 땅굴 전담 특수부대를 동원하는 것으로 대응했으나, 베트남 게릴라 군은 교묘한 위장 입구를 만들어 전갈이나 독사를 풀어 놓거나 부비트랩을 사용해 개똥을 발라 놓는 방식으로 맞대응했다. 베트남 게릴라 군의 지하 기지 통로도 매우 좁아 고작 권총 정도나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군의 장점이었던 중화기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땅굴 쥐 특수부대의 소지품은 랜턴, 칼, 권총이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이니 정확한 입구를 찾아 땅굴 안에 들어가도 베트남 게릴라 군을 만나면 대응 방법이 없이 죽어야만 했다. 반면 참전했던 한국군은 땅굴을 무서워하지 않고 최루탄으로 대응했는데, 최루탄을 뿌려놓고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이를 참지 않고 베트남 게릴라 군이 나오면 사살했다. 굳이 내부까지 들어갈 필요 없이 침착하게 대응하면 된다는 것이다.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었고, 보병이 홀로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베트남 게릴라 군은 땅굴 등을 통해서 자신들이 전투를 벌이고 싶을 때 나타나고 불리할 때는 숨어 버리는 새로운 형태의 적이었다. 사실 땅굴 전술은 이미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말기에 사용하여 미군에게 가공할 만한 피해를 강요한 전술이었지만, 이 때 일본군은 제해권을 모두 장악당해 섬에 고립된 채,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추가 보급이 없어서 전투가 진행되면 될수록 일본군의 화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 정글의 나뭇잎, 풀들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 사용한 농약이 현재 사용이 금지된 그 유명한 고엽제이다. 미군이 고엽제와 폭탄으로 융단 폭격을 해도 지하 3층 규모 땅굴의 2층까지만 파괴가 되어 실효를 거두진 못했다. 결국 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구찌 땅굴의 규모조차 알 수 없었다.


이후에 알려진 바로는 총연장 230km에 수만 명에 달하는 베트남 게릴라 군들이 이 지하 땅굴 내부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전장과 새로운 형태의 전투로 인해 미군 역시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방탄복을 입고 M16 소총을 든 미군이 UH-1 헬리콥터를 타고 정글로 들어가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적과 전투를 벌이는 전형적인 베트남 전쟁의 장면이 계속 펼쳐졌다. 베트남 게릴라 군과 북베트남군은 몰래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지의 정글을 통과하는 도로를 만들어 북베트남이 베트남 게릴라 군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미국에서는 “호치민 루트”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과 중국, 소련 등은 주변 국가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중립으로 두고, 오로지 전쟁은 남베트남에 한정한다는 협약을 맺고 있었기에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암묵적으로 미국 특수 부대가 양 국가에 있는 호치민 루트를 타격하고, 어마어마한 공군 폭격을 감행했으나 효과는 미미했고, 호치민 루트는 전쟁 내내 건재했다. 게다가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와 라오스의 파테트라오 등의 공산 반군이 호치민 루트 형성을 지원하고, 이들 두 국가의 정부는 이를 막을 능력이 전혀 없었다.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는 베트남 게릴라 군들이 땅굴을 파고 호치민 루트를 만드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이 캄보디아의 군부에 공작을 벌여 시아누크 국왕을 추방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러자 추방된 시아누크가 선동하여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와 같은 공산 계통 게릴라가 준동하여 캄보디아의 정국은 더 혼란에 빠져 호치민 루트를 막는 것은 더욱 어려워져 버렸다. 이후 크메르 루주는 시아누크의 일가를 학살하며 그를 배신하게 된다. 한편 라오스는 미군 병력의 직접적인 침공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남베트남군이 람손 719 작전(Lam son 719)을 발동하여 라오스의 영내로 침공했을 때 미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침공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남베트남도 제대로 된 정치권을 가지고 있었냐면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남베트남군은 전혀 쓸모가 없었고 한두 개 사단 급 제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며 그저 미국이 해줄 것으로 생각하여 의지하는 안일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물론 여기에 그에 대한 반론의 여지는 있다. 전쟁은 잘 몰랐지만 그나마 유능하고 강력한 초대 지도자였던 응오 딘 지엠 대통령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쿠데타로 인해 사망했고, 뒤이어 큰 혼란으로 기회를 잡은 베트남 게릴라 군들은 광범위한 농촌을 돌아다니며 장병들의 가족들을 살해하고 고문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부분의 남베트남 장군들은 권력 정쟁에만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 제대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0

유니세프
국민 신문고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