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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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만주 작전은 역사에 유례가 없는 기동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 전사에 한 획을 그었던 기동전들인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바그라티온 작전은 작전 목표 달성까지 한 달에서 3개월까지의 기간이 걸렸다. 하지만 만주 진공 작전은 민스크에서 노르망디까지의 거리를 고작 2주도 안 되는 기간에 모두 석권이 가능했던 엄청난 속도의 기동전이었다. 소련 제병협동군들은 작전 기간 동안 평균 300~400km를 진격했으며 제6 근위전차군은 총 800km 이상을 진격했다.

Soviet gains in Northeast Asia, August 1945, 출처 : Wikipedia, Soviet invasion of Manchuria
이미 태평양전쟁에서 미국과의 전투에 관동군 정예 사단들이 상당수 차출된데다가 미국과의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관동군은 몇 개의 정예사단들과 그 외 상당수의 오합지졸들로 전락했다. 당시 일본 자체적으로도 관동군 전체 전력이 미군 4개 사단도 안되는 전력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소련이 만주로 진공한 것이었다. 만주 전역에서소련군은 거의 무방비일 정도로 관동군의 무장을 해체시켜 나갔다. 이에 숫적으로 소련군은 보병이 1:2, 전차와 야포가 1:4.2, 항공기는 1:2의 우위를 이루고 있었으며 무기의 기술력이나 병력의 질적인 격차는 매우 컸다.
당시 일본의 대전차 수단 또한 매우 빈약했다. 게다가 IS-2 중전차나 T-34 전차를 저지할 수단은 오직 대전차를 자폭하는 군인들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적어도 2~3년 동안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전선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소련의 베테랑 군인들과 전투다운 전투를 겪어보지 못한 관동군의 전투는 관동군의 패배로 쉽게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최후방 극동에서 전투 한 번 겪어보지 못한 병사들도 소련에 많았지만 이들은 유럽에서 경험 많은 베테랑들에게 노하우를 전수받음으로서 경험 부족의 한계를 많이 상쇄했다.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은 숲, 산, 구릉, 습지 등의 다양하고 생소하며 통행을 방해하는 지형에서 빠른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만주 특유의 지형이 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무난하게 통과하는 전술적인 능력을 보이며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기여했다. 또한 일부러 험지 만을 선택한 기동은 험한 지형만 믿고 경계나 증강을 소홀히 한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전투 공병의 운용은 필수적이었다. 소련군은 만주 전역에서 대량의 전투 공병을 군단급, 사단급 제대에 배치하고 얼마든지 본부에서 지원이 가능하도록 편제하여 그 어떤 난이도가 높은 지형들을 개간하여 기동로를 개척할 수 있게 만들었다. 소련 공병들의 엄청난 노고들은 작전의 성공을 이끄는데 큰 기여를 했다. 소련군은 전술적 수준의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소련군의 상징이 된 대대적인 준비 포격을 없애거나 최소화했다.
그리고 대조국 전쟁에서 얻은 요새 침투술 경험 등은 만주 진공작전에서도 유용하게 쓰였다. 소련군은 조직적인 강습 집단을 편성해 일본군 초소, 요새 등을 하나하나 장악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이를 통한 일본군 요새 지역에 작은 구멍이라도 뚫리게 되면 전차 여단급 선견대가 돌격포, 자주포 연대를 수반하고 구멍 속으로 들어가 우회, 포위 기동을 통한 일본군의 기동을 차단함과 동시에 포위 작전을 수행했다. 선견대가 고정 요새들을 우회하고 포위함에 따라 일본군이 공들여 축조한 요새들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순차적으로 점령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소련 기동 선견대들의 종심 깊은 공격은 제2차 세계대전의 모든 기동전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일본군에게 대대적인 혼란과 공포를 가져왔다.
일본은 소련을 통해 연합국과의 강화를 어떻게든 얻어내려고 했다. 그래서 소련은 일본이 마지막으로 믿고 있었던 유일한 외교 수단이었다. 그리고 관동군은 비록 약화됐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숫자가 60만에 달하던 대군이었다. 학계에서는 일본이 항복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관동군의 붕괴였다. 일본으로서는 소련군이 본토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미국에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소련은 결과적으로 관동군을 무력화시켰고 몽강자치연합과 만주국을 멸망시켰다. 비록 소련, 현 러시아 내에서도 유럽 전선에 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일본에서는 아예 이를 부당한 소련의 급습으로 여기면서 러일전쟁보다 더 주목도가 떨어져 대다수 사람들은 만주 진공 작전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의 만주 진공 작전은 현대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작전술과 전략 공세의 완성이었다. 일본은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지속되는 패전으로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파괴하여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을 빠르게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소련군은 대조국 전쟁과 마찬가지로 전 부대의 철저한 기동화, 차량화가 얼마나 유용한지 만주 작전에서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었다. 이는 항상 소련의 모든 소총병 군단과 사단에 여단 및 사단급 기동 선견대를 배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게오르기 주코프가 국방상이 된 이후 소련의 모든 소총병 사단을 차량화 소총병 사단으로 바꾸어 모든 제대에 화력, 기동력, 작전 지속력을 증강하는 데 큰 전훈이 되었다. 만주 전역은 결국 현대 소련군과 러시아군을 완성한 전역이라 볼 수 있다.
이 전쟁을 끝으로 나치 독일 및 일본과 함께 손잡고 싸웠던 소련과 미국은 동맹이 아닌 적국으로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 냉전 시대는 사실상 이 소일전쟁의 종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따라서 소련의 만주 진공 작전은 서방의 제국주의의 시대를 완전히 접고 새로운 시대인 냉전 시대를 열었다. 만주 진공작전, 혹은 소일전쟁은 역사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사실상 세계 현대사를 바꾼 전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