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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집단, 이란 인민무자헤딘(MEK) - 상(上)편 : 이란 이슬람 사회주의의 선구자 알리 샤리아티(Ali Shariati)의 정신을 이어받은 집단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2 16:48:54

본래 이슬람은 신(神)이 가장 최우선인 종교고, 이슬람이 국교인 국가들은 신(神)이 최우선인 국가다. 반면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는 신(神)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한 무신론자들로써 신을 최우선인 이슬람과는 상극이었다. 그런데 카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상을 접한 아랍인 사상가들은 사회주의와 이슬람을 결합한 정치 이론을 여럿 탄생시켰다. 불가능한 신이 최우선이다는 논리를 사실상 봉합해 버린 것이다. 특히 레닌은 자신의 저서 <제국주의론(Имперіализмъ, какъ новѣйшій этапъ капитализма)>에서는 식민지에서 억압받는 무슬림 민족들을 혁명의 주체 중 하나로 삼아 러시아 제국의 무슬림 소수민족들에게 자치권을 확대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이는 상당수 무슬림 사상가들이 레닌주의에 대한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서방 제국주의는 무슬림에게 있어서 적이었고, 자신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존재였기에 이러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제국주의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게 되었고, 이들 이론가들은 이슬람 제국이 초창기에 복지국가로써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많은 영감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에 대한 자유와 선택을 주었으며 거기에 이슬람의 다섯 가지 원칙은 자선(Zakat)의 행함, 그리고 이를 복지로 활용했던 이슬람 국가들의 정책에서 사회주의와 융합 사상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이슬람 사회주의 이론은 탄생하게 된다.

이란 이슬람 사회주의의 선구자 알리 샤리아티(Ali Shariati), 출처 : Newsweek Pakistan 


물론 아랍 사회주의나 아랍 민족주의와는 같은 사상이 아닌, 다른 맥락이지만 서로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많았으며 실제로 이집트의 가멜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 Gaddafi)의 자마히리야(Jamahiriya), 그 외에도 바트당이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수단, 차드, 아프가니스탄이 패망했고, 소련을 포함한 공산권들이 붕괴된 이후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도는 찾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사회주의답지 않게 기독교와 쿠르드족, 투아레그족 등을 비롯한 타 종교 및 기타 소수민족들을 탄압했으며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아랍인들을 우대하며 아랍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등, 민족차별까지 하면서 존재의 정당성을 상실했다. 소련의 이슬람계는 보통 자디드 운동으로 통용되는 편이다. 이슬람 사회주의는 주로 특정 국가와 정권의 정치사상을 분류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다만 소련에서는 하디스 모음집 중 하나인 <사히흐 알 부카리(صحيح البخاري)>가 편찬되어 역사적 상징성이 강한 당시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 이슬람 신학교를 세워 제3 세계 무슬림들에게 이슬람 사회주의를 홍보했다. 이것이 이슬람 사회주의의 모든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소련 공산당에 의해 사회주의 선전 전략으로 쓰였다. 이러한 이슬람 사회주의도 내부에서 계파가 갈리고 있다. 


아랍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란,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등은 진보적 사회주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쪽이 보수적 사회주의로 분류되고 있다. 이슬람 사회주의에서 진보적인 측은 기존 공산권과 밀착하면서 세속주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슬람 사회주의에서 보수적인 측은 신정정치와 반(反) 세속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란에서는 진보적 이슬람 사회주의가 유행했는데 이러한 이란의 이슬람 사회주의를 주도한 이는 알리 샤리아티(Ali Shariati)였다. 알리 샤리아티(Ali Shariati)를 알아야 이란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샤리아티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시아파 12이맘파 신학 사이의 통합을 추구했다. 이는 수니파 측의 무슬림형제단을 창설한 하산 알 반나(Hassan Al Banna)와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이 비공식적으로 레닌주의의 교리를 흡수한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슬람을 투쟁의 종교라고 해석한 종래의 시아파 전통 신학으로 볼 때, "검은 시아파" 혹은 "사파비 시아파"라 정의했다. "사파비 시아파"의 경우, 사파비야 교단을 중심으로 했는데 이 교단은 신비주의와 구세주 신앙이 강해 사파비 왕조가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단순한 무장 집단에서 왕조로 구색을 갖추어가는 과정에서 12이맘파 자파리파에게 서서히 밀리며 도태되어 갔다. 따라서 샤리아티는 이러한 "사파비 시아파"의 계승을 선언하면서 자신의 이슬람 사회주의 이념을 "적색 시아파"라고 불러 구분했다. 


샤리아티는 정의로운 사회 자체가 이슬람적인 가치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으며 세속주의 무신론 계열의 공산주의자들과 자신을 구분지었다. 샤리아티의 독창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신학과 철학은 이란 대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당시 이란의 세속주의 지식인들 중에서 이란의 시골에서 강의하고 있는 율법학자들을 보고 문맹인 농민들을 대상으로 혹세무민을 일삼는 기생충이라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이란의 상황으로 볼 때, 시골의 보수적인 율법학자들은 농민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했었다. 원래 이슬람에서는 고리대금업을 강력하게 금지했는데도 율법 학자들이 연이율 30% 이상의 고리대금업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동시에 문맹 퇴치 운동을 반대했다. 그래야 고리대금업으로 농민들을 착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세무민을 일삼는 기생충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이 나올 만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론적인 주장으로 볼 때, 당시 이란인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매우 급진적이었으며 팔레비 왕조의 신분제에 지친 이들에게 대안으로 자리잡아 샤리아티의 사상이 큰 인기를 얻었다. 샤리아티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재교육 받아 이슬람 신정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이슬람주의 철학을 전파했다. 이는 이란의 진보적인 대학생들이 이란 이슬람 혁명 당시 보수 율법학자로 인기를 끌고 있었던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의 편을 드는 계기가 되었다.


샤리아티는 반서방주의자였기 때문에 특히 당시 이란 사회에 퍼져 있던 반영, 반미 감정을 공유했으며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당시의 샤리아티 사상의 감명을 받은 이들이 샤리아티를 중심으로 1965년 9월 5일에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MEK(Mujahedin-E Khalq, 인민무자헤딘기구)이다. 이들은 1970년대 팔레비 왕조에 대해 반(反) 정부 무장투쟁에 나서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반군 조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샤리아티는 루홀라 호메이니와 비밀리에 연계했지만 이러한 시도가 중간에 탄로나 샤리아티는 영국으로 추방된다. 샤리아티는 추방된지 얼마되지 않아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그러나 MEK 조직은 사라지지 않고 샤라아티를 추종하던 마수드 라자비(Masud Rajavi)가 그의 아내인 마리암 라자비(Maryam Rajavi)와 함께 이란에서 호메이니의 조직에 들어가 투쟁에 나섰다. 다만 마수드 라자비는 직접적으로 활동하지 못했었고, 그의 부인인 마리암이 호메이니를 도왔다. 당시 마수드는 사형선고와 종신형을 받고 투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 마리암은 MEK 동지들을 이끌고 호메이니와 함께 팔레비 왕조를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동시에 마수드 또한 석방되었다. 그러나 혁명 동지였던 마수드 부부의 MEK와 호메이니는 결국 찢어지고 말았다. 


이들은 거대한 팔레비와 서구 세력 및 미국에 저항하기 위해 서로 동맹을 맺었지만 마수드 부부의 MEK와 호메이니는 사상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신정체제를 꿈꾸었지만 사회주의적 신정체제를 꿈꾸았던 샤리아티 정신을 갖고 있던 마수드 부부의 MEK와 전통적인 원리주의 율법학자 출신인 호메이니의 신정체제와 서로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호메이니는 MEK에 대한 숙청을 개시하면서 상당수가 척살되고 살아 남은 조직원들은 국외로 탈출해 이란 호메이니-하메네이로 이어지는 이란 정권에 대해 투쟁을 선언하게 된다. 당시 공산진영의 대부인 소련은 이란의 3대 좌파 조직인 마오주의의 페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정통으로 하는 이란 투데당(Tudeh Party)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MEK는 소련 정부로부터도 주목 받지 못했다. 당시 소련은 호메이니 정권이 팔레비 왕조 시대에 풀어놓은 사기업을 재국유화하는 등, 비(非) 자본주의적인 경제를 채택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이란 투데당에게 지령을 내려 호메이니의 신정체제와 협력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여기에 얼마 가지 않아 둘의 연대조차도 깨지고 말았다. 둘의 연대가 파쇄된 것은 소련이 원하는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아랍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이라크의 조직들이 이란을 침공했고, 페다이 조직과 MEK마저 이라크에 합류해 무장 투쟁으로 전환한 사건이 발생한다. 


여기에 분노한 호메이니는 이란 정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이란 투데당에 대해 소련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숙청해버렸다. 당시 이란 해군의 총사령관이 이란 투데당이었고 고위직을 여러 역임한 당원들도 존재했지만 1984년까지 이들은 호메이니에 의해 철저하게 제거되면서 소련이 이라크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성향의 이라크 대신 이란을 지지하려 했던 이유가 있었다. 이는 사담 후세인이 1978~1979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이라크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며 공산당과의 연정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이 때 이라크의 공산당들은 게릴라 조직으로 변모했으며 같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쿠르드족의 PKK와 연대하여 사담 후세인에 저항하면서 이란의 페다이 조직과 MEK와도 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란까지 공식적으로 침략했고, 호메이니의 숙청 작전으로 인해 소련은 이라크의 게릴라 조직들을 지원했던 것이다. MEK는 무장 투쟁을 재개하면서 사상적으로 맞지 않지만 중도 보수인 이란 초대 대통령 아볼하산 바니사드르(Abolhassan Banisadr)를 적극 지지했다. 당시 마수드 부부의 계획으로는 바니사드르 대통령을 이용해 호메이니를 제거하고 바니사드르마저 타도하여 이란을 완벽히 공산화시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바니사드르가 좌파는 아니었지만 이란 원리주의 보수파들은 그를 좌파로 의심했었다. 바니사드르 본인 또한 MEK나 페다이 조직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명확하게 해명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랬던 이유는 권력 기반이 호메이니에 비해 매우 약했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 당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아 팔레비 왕조를 뒤엎었고, 여전히 대중들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반면 바니사드르는 대중들의 지지도가 낮았기 때문에 그의 권력을 지탱해줄 수 있는 세력이 필요했다. 바니사드르나 MEK는 서로 정치적인 필요와 계산에 의해 연대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매우 단호한 인물이다. 그는 바니사드르를 좌익 분자로 찍어 놓고 그에 대한 탄핵을 과감하게 의결해버렸다. 이 또한 호메이니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가 대단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이었지만 당시 이란의 헌법에 의하면 이는 명백히 불법이었고, 불법 탄핵이었던 것이다. 결국 호메이니의 입김을 강하게 받은 모함마드알리 라자이(Mohammad-Ali Rajai)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와 더불어 교육부 장관이었던 모함마드자바드 바호나르(Mohammad-Javad Bahonar)가 총리가 되었는데 이들이 취임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MEK는 테러를 개시해 둘은 폭탄테러로 암살되고 말았다. 한 때 라자이 대통령은 MEK 소속이었지만 숙청 때 MEK를 배신해 살아남았던 인물이었고, MEK가 그를 암살한 것은 배신에 대한 보복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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