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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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군대를 해산하고 들어오라는 카이사르의 요구를 보란듯이 무시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처음에는 카이사르와 사절단으로 소통하다가 카이사르가 왕족 여성들과 불륜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직접 보기 위해 카이사르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역사학자 디오 카시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남동생에게 전혀 알리지 않은 채 홀로 매력적인 옷차림을 하고 들어가서 재치있게 시저를 매혹시켰다고 기록한다.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오파트라가 궁전으로 은밀하게 들어가기 위해 침대 자루 안에 묶여 있었다고 기록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여동생이 카이사르와 함께 궁전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알렉산드리아의 군중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키려 했지만, 카이사르가 웅변으로 군중을 진정시킨 뒤 카이사르에게 체포되었다.

클레오파트라를 묘사한 이집트 기제의 벽화,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알렉산드리아의 시민 회의 앞에 데리고 온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폼페이우스에게 맡긴 서면 유언장의 내용을 공개하는데, 이 유언장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둘이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나머지 남매 아르시오네 4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로 하여금 키프로스를 공동 통치하도록 하여, B.C 58년 로마에게 키프로스를 빼앗긴 이집트를 달래게 된다. 이와 같은 결정이 프톨레마이오스 13세보다 클레오파트라에 편향된 것이라고 판단한 포테이노스는 아킬라스로 하여금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하게 한다. 이는 당시 카이사르가 4천 명의 병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에 기인한다. 그러나 포테이노스는 카이사르에 의해 처형당하고, 아르시노에 4세는 아킬라스의 군대에 합류해 스스로 여왕에 오른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킬라스는 아르시노에의 개인교사였던 환관 가니메데스에 의해 살해당하고 총지휘관의 자리를 빼앗긴다.
니메데스는 카이사르를 속여 억류되어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과 직접 협상하고 싶다고 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빼내 군대에 합류시키는데 성공한다. 결국 알렉산드리아에는 카이사르와 남게 되고, 이렇게 시작된 알렉산드리아 공성전은 B.C. 47년까지 계속되었다.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명목상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B.C 46년 말 로마를 방문하는데, 카이사리온은 동행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카이사르는 테베레 강 건너 자신의 정원 내에 있는 별장을 숙소로 제공한다. 카이사르는 그들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마찬가지로,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 모두에게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Socius et amicus populi Romani)"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는데, 로마에 충성을 맹세한 종속국의 군주에게 부여하는 호칭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의 별장에 머물 때 그녀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원로 키케로도 있었는데, 그는 후에 클레오파트라가 거만했다고 언급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신하인 알렉산드리아의 소시게네스는 카이사르를 도와 B.C 45년 1월 1일 시행될 새로운 율리우스력을 제작했다. B.C 46년 9월 25일 카이사르의 포럼에 세워진 비너스 신전에는 3세기까지 클레오파트라의 황금 조각상이 있었는데, 로마인의 어머니인 비너스 여신과 카이사르의 아이의 어머니로 비정되는 클레오파트라를 동일시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 금상은 이집트 여신 이시스를 로마 종교와 교묘하게 연결시키는 기능도 했다. 클레오파트라 이전에 등장한 여성들의 캐릭터는 종교적·신화적·형이상학적 차원에 머물렀다.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이브, 미의 여신 비너스, 어둠과 죄의 시작으로 통하는 판도라(Pandora)는 그런 차원의 여성 캐릭터들이었다. 남성 무용담을 장식하는 도우미, 출산과 자식을 위한 어머니로서의 역할도 여성의 주된 운명이자 미덕으로 통해왔다. 클레오파트라 스타일의 삶과는 무관한, 이른바 현모양처로서의 여성이다.
부활의 여신인 이시스(Isis), 창녀 출신으로 고대 그리스 정치가 페리클레스와 함께 산 아스파시아(Aspasia) 역시 남성과 자식을 위해 살아간 ‘모범적인’ 여성 캐릭터들이다. 물론 클레오파트라에 대해서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를 비롯한 고대 로마 영웅들의 유희 대상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일 듯하다. 성적 매력으로 무장한 이집트 절세미인에 관한 얘기는 ‘핑크 빛’ 여성 파라오 전설을 수놓는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클레오파트라이자 남성용 액세서리라 해석할 근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남성이 아닌 클레오파트라에 무게 중심을 두면서 살펴보자. 거꾸로 51살 카이사르가 20살 젊은 여성의 권력을 유지시켜준 방패이자 장식물로 활용됐다고도 볼 수 있다. 여성이자 피해자·약자·장식물로 본다는 점 자체가 이미 남성 중심 역사관의 산물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4,400여년 고대 이집트 역사가 끝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파라오의 영광과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 노력한 권력가이자 전략가가 클레오파트라의 진짜 모습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