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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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릿 타나랏은 송크람과 파오 샤놈(Phao Shanom) 내무대신을 추방하고 잠시 동안 폿트 살라신(Pott Salasin)에 이어 타놈 끼띠카쫀 육군중장을 수상으로 임명했지만 다시 부정 선거라는 구실로 인해 1959년 2월 10일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태국 수상에 취임해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이후 태국은 민주주의가 맞지 않다고 말하며, 태국 국왕에게서 절대 권력을 얻은 이후 태국의 관료 기관과 군 조직을 통치 기반으로 반대파들을 탄압했다. 이후에도 수없이 주장하게 되는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공산주의자와 반체제 인사, 그리고 언론인과 문학가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으며, 타나랏은 왕실을 이용하면서 국민 결속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독재 정치를 정당화했다. 그래서 이 때부터 태국의 국왕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타나랏의 독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불력 2502년 임시헌법”이다. 이 헌법은 고작 2페이지 정도의 분량에다 20개 정도의 조항 밖에 없는 간단한 법조문이지만 헌법 제17조에는 국가 안정을 위해 태국의 수상은 합법적인 대응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태국의 이념전쟁,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이 조치는 후일 대한민국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이후, 사용했던 긴급 조치들과 유사했다. 그리고 타나랏은 이 헌법 17조를 바탕으로 독재 정치를 실시하며 살인과 강간, 방화 등을 저지른 중범죄자들에게 공개 처형을 했으며, 태국의 조직폭력단과 범죄자들을 사회 정화를 위한다면서 “캉 소이(Kang Soi)"로 불리는 잔인한 형벌을 사용했다. 캉 소이는 약 1년 정도 징역형을 사는 것에 불과하였지만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좁은 방에 범죄자들을 가둔 이후 식사를 외부에서만 공급하는 방법의 형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형벌은 태국 내에서 공포의 상징처럼 되었다. 다만 이와 같은 무자비한 형벌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웠던 태국 사회의 질서가 회복되고 범죄도 감소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실제로 타나랏 통치 시기에는 화재 사건이나 중범죄의 발생 빈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잔혹한 통치와는 달리 사회적으로는 아편 재배를 금지했으며,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에서 차관을 빌려 상당한 수준의 경제 성장을 했다. 물론 많은 군인과 퇴역 장성들이 기업을 설립해서 태국 군부의 자금줄을 담당하는 부정부패가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농업에서 공업으로 전환하는 개발정책을 실시해 도로를 만들고 여러 가지 개발 독재를 실시하며 기업하기에 좋은 법을 만들기도 했다. 1962년에는 이른바 “신(新) 산업 투자 권장법”을 제정하며 해외 기업들이 직접 투자를 하는 일도 가능해져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도 이 때 태국으로 대거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나랏은 권력을 장악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63년 12월 8일에 방콕에서 간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55세였으며 사후 태국의 독재자는 타놈 끼띠카쫀이 계승했다. 타나랏은 태국의 독재자들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독재정치를 실시했지만, 혼란스러웠던 태국 사회를 바로 잡고 전쟁 이후 피폐해진 태국을 성장시켰다는 영웅이라는 두 가지 평가가 현재 태국에 존재한다고 하며, 민주화에 성공한 현재의 태국은 사실 타나랏의 경제 성장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다. 타나랏의 쿠데타 이후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 정치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일단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해 정권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지만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해 붕괴되는 경우가 많았다.
태국을 연구하는 학계에서는 의외로 태국 관료들과 기업인, 국민들이 군부 정권을 지지했다고 견해를 밝혔는데,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집권 동기를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았으며,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받은 것도 여기에 동참했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제대로 된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이 훌륭해도 일단 무한한 권력을 잡으면 결국엔 부정부패에 오염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때문에 군부 정권은 부패하며 각종 실책들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났고, 1973년 학생 민주화 항쟁으로 타놈 정권이 추방되면서 3년 동안 잠시 민주정이 들어섰지만, 1975년 인도차이나 공산화를 계기로 이듬해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했다. 당시 방콕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 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단체 등에게 학살당하는 참사가 발생하여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을 벌이는 등, 위기로 놓이게 되었으나,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민중들에게 굴복했고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
학계의 논문과 단행본들에서도 군부 정권이 60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방식으로 서술되었지만, 실제로는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 정부가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된 것이다. 특히 수쩐다 장군이 그동안 자신이 했던 약속과 다르게 수상 직위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이자,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Chamlong Srimuang)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죽음까지 각오하면서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후일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이에 대해 시민들의 편을 들어서면서 수쩐다도 견디지 못하고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섰고 태국은 엄연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토지 개혁 부정 사건이나 외환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갔고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 총리가 취임한 이후 정부가 30밧 의료 보험 등 하층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자 왕가나 군부 등 보수파들이 크게 반발했고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 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태국 내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태국의 여당인 민주당은 1946년에 창당되었으며, 현재 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다. 이 정당의 창당인은 후앙 아파이웡(Khuang Aphaiwong)으로, 창당 전후로 세 차례나 총리로 재임했다. 민주당은 처음 도전한 1948년 총선 때 99석 중 54석을 얻은 것을 끝으로 현재까지 과반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연립 정당으로 여러 차례 정권을 차지한 바 있다. 사실 기회를 여러 차례 잡아 연립 정권의 형태를 취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집권 기간이 길었다. 수시로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를 제외하면 사실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태국의 실세를 차지했던 정당인 셈이다. 물론 중간에 군부에 의해 강제로 정권을 상실해왔기 때문에 군부와 대결하는 정당이었다. 그러나 2001년 총선을 기점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특히 2006년 쿠데타 당시에 민주당이 군부의 쿠데타에 찬성을 하고 군부도 과거와는 다르게 민주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면서 태국 정치에 변화가 오게 된 것이다.
이들은 범보수정당이며, 왕실 존속을 강하게 천명하기도 한다. 21세기 들어서 보수화가 진행되고 후일 탁신 진영이 태국에서 진보로 간주되어 과거에 적대 관계였던 군부 진영과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보수 정당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는 태국에서는 군부에 맞선 대표적인 정당으로 손꼽혔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당계 정당과도 위상이 비슷했다. 아시아 각국의 사회 자유주의 성향 정당들의 협의체인 자유민주협의회(CALD)에 가맹되어 있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태국인들의 인식과 위상은 21세기에 들어 크게 바뀌었다. 과거에는 군부 계통 정당들이 우세했기 때문에 민주당은 이러한 군부 계통 정당에 대항하는 범 진보 세력으로 간주되었으며,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재야 투사들도 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후반에 태국이 정치와 경제면에서 혼란을 겪게 되었는데 민주당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2001년 총선에서 탁신이 등장하고, 이를 위시로 한 새로운 복지 정당인 애국당과의 양당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세력을 잃게 된 기득권 세력들의 지지가 민주당으로 옮겨오게 되며 전반적인 판세가 변했다.
이후 탁신 진영이 군사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되고, 애국당도 해산을 거쳐 최종적으로 태국인당에 이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군부와 결탁하기 시작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태국인당의 주요 지지 기반은 남서부다. 2011년 총선 지역별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말레이시아 인근에서 그 누구도 과반을 얻지 못한 2개 주를 제외하면 제3 세력이 자리 잡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최남단이면 더더욱 그러했다. 이는 최남단 파타니(Phatani) 지대의 말레이인 반군들로 인해 오히려 현재 태국인 불교도들이 결집하는 것이 원인이었다. 이 외에도 미얀마와의 접경지대에서도 지지가 강하며, 수도이자 최대 도시인 방콕에서도 태국인당 대신 이 당을 지지하고 있다. 1932년 절대 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 바뀐 이래, 태국은 선거로 선출된 민간 정부와 쿠데타로 등극한 군사 정권이 번갈아 집권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군부 독재는, 1948~1957년 피분 송크람(Phibun Songkram) 시기, 1958~1973년 사릿 타나랏과 그의 파벌이 주도한 전제적 사릿-타놈(Sarit-Thanom)의 시기, 2006년과 2014년에 탁신(Thaksin) 정부와 그의 여동생 잉락(Yingluck) 정부를 각각 붕괴시킨 최근의 왕당파 군사 정권 시기를 두고 세 가지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