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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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의해 주룽반도가 할양되고 청나라가 서양 열강들에게 패배하자 베트남도 서양 열강들의 제국주의 침략을 피해갈 수 없었다. 17세기 초기, 베트남에 통상을 요구하는 프랑스 사절이 첫 방문하면서 서양 세력의 본격적인 접근이 시작되었다. 응우옌 왕조 성립 직후인 1804년 영국 사절 로버츠(Roberts)가 서방과의 통상관계 개선을 요구하면서 다낭을 내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1832년에는 미국으로부터 사절 에드먼드 로버츠(Edmond Roberts)도 그와 비슷한 목적으로 하이퐁에 내항했지만 이번에는 상륙 자체가 거절되었다. 이와 더불어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자주성은 아시아 식민지 사업의 첫 시작을 인도차이나 반도로 정하고 진출을 시도하던 프랑스에 의하여 서서히 잠식되었다. 응우옌 왕조가 건국되었던 초기 시대에 몇 년 동안 베트남과 프랑스는 교섭이 없었다가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종전 이후, 적극적으로 통상관계를 요구하고 베트남에 사자를 파견하는 등 베트남의 경영문제에 대하여 보다 강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La bataille de Hué de 1885 fait suite à la fin de la guerre franco-chinoise (1883-1885) et du traité de Tientsin par lequel la Chine reconnait le droit aux Français d’occuper le Tonkin. Hué fut déjà prise en 1883 mais la Chine refusa de laisser échapper son vassal vietnamien au profit de la France. 출처 : WordPress.com, Vinagéo
이와 같은 요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이 당시 베트남 떠이선 왕조의 내분이 심화되었고 응우옌 아인(Nguyễn Ánh, 阮暎)이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아 떠이선 왕조를 타도하고 1802년에 새로 응우옌 왕조를 건국했다. 건국자 응우옌 아인은 이 때 묘호가 세조(世祖)였기 때문에 묘호를 부르기로 한다. 세조는 프랑스군의 응우옌 왕조 건국의 공적을 인정하여 프랑스 사람을 우대하고 있었지만, 통상요구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대해 프랑스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 정부와 동인도회사의 태도를 보고 경계하기 시작하여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게다가 성조(聖祖) 명명제(明命帝)가 1820년에 즉위하면서 점차 프랑스인에 대한 우대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1826년에는 개항을 요구하는 프랑스 군함의 함장과의 접견을 거부하고, 1826년에는 역시 응우옌 왕조 건국 때의 공적자인 프랑스인 쇼니(Shoni)의 조카가 영사자격으로 순방을 해왔지만 이러한 방문마저 거부했기 때문에 베트남과 프랑스의 공식적인 관계는 한동안 중단되었다. 그리고 광동 지역의 흠차관(欽差官)이 광서, 광동의 양광총독(兩廣總督)을 겸임하게 되어 육로로 독점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로써 광저우에서 하노이까지 무역 로가 개설되었는데 이 도로를 흠차대로(欽差大路)라 하여 남방지역의 1번 국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흠차대로는 이후 광저우와 하노이를 이어주는 중국-베트남 간의 주요 도로가 되었다. 더구나 같은 시기에 베트남에서 기독교가 박해받음으로써 베트남-프랑스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특히 명명제가 즉위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어 1836년에는 국적 상관없이 유럽인 선교사 7명을 처형하고 수백 개의 협회가 파괴되자, 탄압을 두려워한 수만의 기독교 민중들이 산이나 들로 숨어들었다. 19세기 중반 베트남의 카톨릭 교도들이 45만 명으로 늘어나자 응우옌 왕조는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으로 1840년~1860년까지 유럽인 선교사 25명과 베트남 성직자 300명을 처형하여 2만 명의 신도가 죽었고 그들이 전교하던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특히 1842년 영국이 아편전쟁의 성공으로 중국에 개입하는데 성공하자, 프랑스는 남쪽인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접근함으로써 이러한 영국의 개입에 대응했고 베트남을 장악함으로써 영국과 청나라의 광동 무역을 견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1843년 프랑스의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는 장바티스트 세실(Jean-Baptiste Cecille) 제독과 레오나르 샤르네르(Leonard Charner) 대령의 지휘 하에 베트남에 함대를 파병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베트남 응우옌 왕조에 대한 개입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중국 내에서의 영국의 활동을 도와주는 한편 베트남 내에서 프랑스 인 선교사들의 박해에 대한 보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1845년 프랑수아 기조는 세실을 베트남으로 보내 카톨릭 교회 선교사인 도미니크 레페브르(Dominique Lefebvre) 주교를 구출해 오도록 했다. 한편 1847년에 즉위한 사덕제(嗣德帝)도 선대와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와 쇄국정책을 목표로 하여 서양 세력의 접근을 원천 차단했다. 1847년에는 2명의 프랑스 인 선교사들로 베트남에 은밀히 들어갔다가 2번째로 수감된 도미니크 레페브르 주교와 뒤클로스(Duclos) 주교가 수감되자 이들을 구출하고, 베트남에서의 기독교 의식의 자유와 상업적으로 통상을 얻어내기 위하여 세실은 2대의 전함인 글르와르(Gllwar), 빅토리외즈(Victoriwez)와 오귀스트 라피에르(Augustin de Lapierre) 대령을 다낭으로 출격시켰다.
만약 라피에르 대령이, 레페브르 주교 일행들이 이미 석방되어 싱가포르로 가는 길이었다는 소식을 미리 접수했다면, 라피에르가 베트남 함선들의 마스트(Mast)를 해체함으로써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협상이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자 결과적으로 1847년 4월 14일, 프랑스는 다낭 항에 정박 중이던 나머지 5척의 황동 갑판으로 되어 있는 함선들을 침몰시키는 공격을 이어갔다. 1847년 4월 15일, 프랑스 함대와 베트남 함대들 간의 전투에 이어 다낭 시내를 폭격하는 전투가 벌어져, 베트남 함대들 중 3척이 침몰하고 프랑스 함대는 대부분 도주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1851년 쿠데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가 동아시아에 세력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2류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가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문명화된 서구 문화를 전파해야 할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상이 퍼져 있었다. 결국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영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전쟁(1858~1860)을 수행하는 한편 인도차이나 반도에 프랑스 식민지를 구축하기 위한 단계들을 설정해 나갔다.
1857년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디아스(San Jose Maria Diaz Sanjurjo) 신부가 살해되자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로마 카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의 박해를 응징하고 베트남 조정에 프랑스군의 베트남 주둔을 강요하고자 전쟁의 개시를 승인하게 된다. 이로써 1858년부터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프랑스 해군은 리고 드 주누이(Rigault de Genouilly) 제독의 지휘 하에 1858년 9월 1일과 1859년 2월 17일에 다낭과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사이공의 점령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식민지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해군은 남부 베트남의 요충지에서 응우옌 군과 격전을 벌여 패퇴시켰다. 프랑스는 1861년에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 결국 사덕제(嗣德帝)는 1862년 항복하고 말았다. 프랑스와 베트남 간에는 불평등 내용을 담은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사이공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남부 베트남의 비엔호아(Biên Hòa)성, 자딘(Gia Định)성, 딘 뜨엉성(Định Tường) 3개의 성을 할양한다.
② 베트남은 프랑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한다.
③ 프랑스의 전함이 메콩 강을 자유 항해하는 것을 허용한다.
④ 프랑스의 베트남 내에서의 자유로운 가톨릭 포교 특권을 인정한다.
⑤ 3개의 항구를 프랑스와의 무역을 위해 개항한다.
⑥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