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중화민국이 탄생한 이후, 중국 땅에 근대 자본이 생기기 이전에 중국 역사에서 예금과 대출 등 은행 업무를 담당하며 중국 경제를 장악했었던 거대 상인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진상(晋商)으로 알려져 있는 상인이다. 진상은 명(明)나라와 청(清)나라의 500년 동안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산서상인(山西商人)을 지칭하는 말이다. 고대 춘추시대에 진(晋)나라의 지배 영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해서 진상(晋商)이다. 이들은 남방의 신안(新安)상인과 더불어 중국 상계의 2대의 거대 세력을 이루었을 정도로 중국 북방을 대표하는 상인 집단이었다. 진상 상단들은 가장 먼저 명(明)나라의 몽골-타타르족의 방위를 위해 군량 수송을 맡는 등, 군상(軍商)으로 참여를 독차지 했으며 그로 인해 매우 큰 이익을 얻었다. 이와 같이 군상으로 참여하여 축적한 부를 토대로 진상은 대량의 소금과 곡물을 공급받았고, 비단과 철제 기물들을 비롯하여 일용 잡화 거래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중국 산서성 평요고성 내에 위치한 진상(晋商)의 일승창(日升昌) 표호 건물, 출처 : 新华财经
또한 러시아 및 몽골과의 차(茶)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중국 속담에 ‘참새가 있는 곳에 산서 사람들이 있다(只要有麻雀, 就有山西人).’가 존재하는데, 이는 진상의 장사 수완과 이들의 네트워크가 중국 북방 어디든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지만 진상을 최고의 상인집단으로 길이길이 역사에 남도록 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선구적인 금융업 덕택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의 진상은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특히 청나라 강희제 시대에 중국 전당포의 25%가 산서성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이들 산서상인 집단들은 중국 내에서 최대 규모의 고리대금업을 성행시켰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동아시아, 중국은행의 모태가 되는 ‘표호(票号)’라는 사업장을 탄생시켰다. 이 표호(票号)는 현대 시대 은행의 3대 업무라고 할 수 있는 예금과 대출, 그리고 타 국가와 환전 업무 등을 통해 이윤을 챙기는 과거 대한민국에 존재했었던 상업은행과 유사한 기능을 지닌 기관이라 볼 수 있다.
이같은 중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표호는 1823년에 설립된 평요현(平遥县)의 일승창(日升昌) 표호이고, 이곳이 흔히 중국은행의 모태로 알려져 있는 기관이었다. 일승창은 중원 대륙 곳곳에 지점을 두었으며 청나라 시대 통틀어 51개의 표호가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 43개의 표호가 산서성 사람들이 설립한 것이다. 그 중에서 평요에 22개의 표호가 존재했다. 당시 평요는 청나라의 월 스트리트나 다름없었으며 청나라가 멸망하여 사라질 때까지 청나라 북방 금융의 허브로 전성기를 누렸다. 일승창 표호는 종업원들에게 '신고(身股)'라는 이름의 주식을 증여함으로써 수익을 철저히 분배하는 선구적인 경영 모델을 일찍부터 실현했다. 또한 암호화되고 복잡한 장부기재 방법으로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리를 철저히 차단했다.또한, 표호의 소유주는 총지배인으로 불리는 CEO에 경영을 일임했다. 또한 표호는 고객과의 신용을 최우선으로 하였으며 명나라와 청나라에 걸쳐 시대와 제도에 따라 그 업종과 경영 방식을 탄력적으로 바꾸어 나갔다.
진상은 때에 따라서 혁신을 마다하지 않았고, 지분을 크게 은고(銀股)와 정신고(頂身股)로 분류시켰다. 은고(銀股)는 현대 시대 주주의 납입자본금에 해당한다. 이는 무한 배상 책임을 가졌으며, 부자(父子)와 부부 사이에서 상속도 가능했을 정도였다. 양도와 양수가 가능하고 새로운 출자자를 추가로 영입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지속적으로 배당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정신고(頂身股)는 실적이 뛰어난 경영인괴, 지점장, 사원에게 주었다. 물론 사규를 엄격히 적용하여 이를 위반하거나 과실을 범하면 과감히 삭감했다. 이와 같은 정신고 지급의 평가는 은고를 소유한 자본주가 한다. 따라서 지분에 대한 책임은 유한하다. 정신고를 받는 사원은 월 스트리트 투자 은행의 파트너와 유사하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진상들은 정신고 제도를 도입해 점원들 개개인의 이익과 상점의 이익, 자본주의적인 이익을 아주 요긴하게 결합시켰다. 정신고는 직원들의 이익을 높여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래서 공로에 따라 정신고를 지급하는 비율이 달랐다. 전근대적이고, 서양의 입장에서 야만적으로 표현하던 청나라에도, 이와 같은 선진적 금융업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호들은 결산기에 자본주와 영장, 그리고 증인들을 불러 함께 회의를 한다. 그 때 지분 규약과 지분당 은자의 액수, 배당 주기, 은고와 정신고의 배당 비율을 결정하고, 그 내용을 문서에 기록하는 철저함까지 보였다. 당시 표호는 고객의 돈을 받은 다음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없는 환 어음으로만 한 장 써줬다. 그 어음이 다시 돈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로지 표호의 신용에 따라 달려 있었는데, 진상은 이를 의(義)로서 이(利)를 제약한다는 원칙으로 수백년 동안 신용을 지켰기 때문에 표호업에서 장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상(晉商)은 명나라나 청나라 황실에서도 돈을 빌릴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서양의 8국 연합군이 원명원(圆明园)을 불태우고 북경을 함락한 이후 청나라 정부에 배상금을 요구할 때 정권을 잡고 있던 서태후는 당시 진상의 교가(乔家)로부터 돈을 빌리려 했던 일화가 있다.
또한 훨씬 이전인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의 교체 시기에 무측천의 부친인 무사확(武士貜)이, 이연(李淵), 이세민(李世民) 부자가 태원(太原)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막대한 자금을 제공했다. 따라서 이연, 이세민 부자의 정예 군사들과 측천무후의 무씨(武氏) 재력이 천하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매우 유명했다. 당나라가 건국된 이후, 무씨(武氏)는 국공(国公)에 봉해져 지위가 당나라 초기 건국 공신인 능연각 24공신(凌煙閣二十四功臣)과 동등했으며 이후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 무측천(武則天)을 낳은 이야기는 진상(晉商)의 경제력이 당시에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진상의 3대 상업 수칙은 신용(Credit)과 근면(Diligent), 지혜(Wisdom)로 나타난다. 진상은 신용(Credit)을 최상위 덕목으로 삼아 남을 속이거나 탈취하지 않고 부자가 되었다. 진상에서도 '거상(巨商)'으로 통했던 교치용(喬致庸)의 상점에 있었던 일화가 진상의 핵심 철학을 말해주는데 이에 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당시 많은 상인들은 저울을 조작해 밀가루 무게를 속이는 일이 빈번했다. 그런데 교치용은 무게를 속이지 않은데다 1근을 팔면서 실제로는 1근 2냥을 더 주었다. 처음에 교치용의 진상은 손해를 보았고 다른 상인들은 그를 비웃었지만 그곳에서 밀가루를 사 본 소비자들은 교치용의 상점 만이 믿을 수 있다면서 그곳에서만 물건을 샀다고 한다. 흔히 작은 부자는 머리와 속임수에 의존하지만 큰 부자는 덕(德)에 의지한다는 중국 격언이 있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속임수를 쓰지 않는 상업 윤리를 실천하여 산서 최대의 부자가 됐다. 산서인들에게는 이처럼 뛰어난 상술 유전자가 존재했던 것알까?
청나라 옹정제 당시, 산서성 총독 유악(劉岳)은 황제에게 산서성 경제 흐름과 동향에 대한 상소를 올렸는데 산서성에서 뛰어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사를 한다고 했다. 장사꾼이 못될 것 같으면 차라리 농사를 짓거나 군인이 되어 출세길을 노린다고 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나 글을 읽어 과거를 본다고 썼다. 이처럼 사람들이 배워서 뛰어나면 관직에 나아가던(學而優則仕) 시대에 경제 가치를 부르짖었던 진상의 전통은 오늘날 화교 상인들의 정신으로 자리잡게 된다. 물론 진상에서 가장 유명한 상인이라면, 중국 소설과 드라마 교가대원(乔家大院)의 주인공 교치용(喬致庸, 1818~1907)을 꼽고 있다. 교치용은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자 경제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혼란스럽던 청나라 말기에 교치용은 산서 지역에서 신용을 바탕으로 상업 질서를 세우고 근대 은행 시스템과 물류 유통의 기반을 세웠다.
교치용의 사업 철학은 "장사의 첫째, 의리(義), 둘째, 신용(信), 마지막, 이익(利)"이라는 신조를 토대로 사업을 했다. 이처럼 의리와 신용을 지키는 상인에게 이익이 따라온다는 말은 통했다. 교치용은 청나라 정부가 정한 토지 제도를 위태롭게 할 정도로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산서성에서 비즈니스를 할 기회가 된다면 삼국지의 관우(關羽)보다, 교치용(喬致庸)을 언급하면 그 비즈니스가 성사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하니 참고하는 것이 좋다. 이처럼 진상(晋商)은 부(富)를 기반으로 풍부한 건축 유산들도 여럿 만들었다. 저명한 교가대원(喬家大院), 상가장원(常家莊園), 조가(曹家) 삼다당(三多堂) 등의 유적은 산서성에서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와 같이 부유한 진상 또한 근대화의 급격한 변화를 넘지 못했다. 태평천국의 난과 백련교도의 난 등 농민 봉기가 잇달아 발생하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청나라 조정의 금고로 전락하고 만것이다. 게다가 아편전쟁 이후, 몰려 들어온 외국계 상사와 은행은 진상의 영역을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더불어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한 이후 진상의 표호(票号)들은 사천과 산서 일대에서 발생한 군벌들 간의 내전과 습격으로 인해 신뢰도가 떨어지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대규모 자금 인출 사태가 벌어졌고, 중국이 공산화 되었을 때,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진상의 전통은 중국은행이 그대로 흡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