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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삼국시대 오(吳)나라 소속의 사씨(士氏) 가문 교지국(交趾國, 현 베트남) 이야기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3 16:53:58

베트남은 쯩 자매의 혁명 이후, 베트남 북부는 후한(後漢)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사(士)씨 가문이 득세하면서 이 지역은 조금씩 한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본래 베트남 북부 지역은 호전적인 성향의 지주들이 많아 후한 조정의 수탈에 대해 매우 저항적이었다. 후한 정부는 복파장군 마원에 의해 쯩 자매의 난을 진압하고 후한의 한 주(州)로 편성하여 정부의 직접적인 통치에 놓이게 했지만  워낙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임명한 유능한 인물 한두 명에 의존하는 형태로 반발을 진압해왔는데 사(士)씨 가문은 그들 중 한 가문으로 보여 진다. 본래 사(士)씨 가문은 노국(魯國) 문양(汶陽) 현이 본관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서 노국(魯國)이란 옛 노(魯)나라가 있었던 오늘날의 산동성 곡부(曲部)가 중심인 지역을 말한다. 사씨 가문의 6대 전에 전한(前漢)이 멸망하고 신(新)나라가 건국되는 혼란 시대를 피해 남하하여 교주로 이주했다. 후한 말기에 사섭의 조부인 사사(士賜, Sĩ Tứ)는 일남(日南) 지역의 태수를 지냈고 이러한 배경들이 사섭 특유의 베트남 통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이전의 남월 지방에 세워진 군현을 다스리는 지방관들은 대개 교주 외부에서 부임되어 왔기 때문에 현지 사정에 매우 어두웠다. 그리고 이를 통치하려는 의욕도 없어 변방 지역에서 수탈하고 빠르게 중앙으로 진출하기에 여념이 없던 반면, 교주에서 6대를 살아오고 또 부친이 교주 최남단인 일남군의 태수를 지낸 배경으로 인해 사섭은 이 지방의 사정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베트남 하노이 왕궁터에서 발견된 교지국 명패,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또한 이곳을 떠나 중앙으로 진출하기보다는 지방에 머무르며 안정된 통치를 하면서 중앙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는 것이 목적이기도 했다. 사섭은 유년 시기에 후한 정부의 수도 낙양에 유학하여 후한의 지식인들과 교류를 갖고 영천의 유도(劉陶)에게서 학문을 배워『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주석을 달아『춘추경(春秋經)』을 지었다. 사섭의 지식과 교양이 상당히 뛰어나, 후에 사섭에게 몸을 의지했던 원휘(袁徽)는 순욱(荀彧)에게 “사섭은 학식이 풍부하고 정치에 정통하다”라고 말하며 그를 칭찬했다 전하고 있다. 이후 경사에 유학해 병법을 익혔으며, 부친의 사망 직후에 교지(交沚) 태수로 임명되어 교지에 복귀하게 된다. 사섭이 교지태수를 지내다가 196년에 당시 교주자사였던 주부(朱符)가 이민족인 크메르계 민족들에게 살해당해 교주 전 지역이 혼란에 직면하게 되자 사섭이 후한 조정에 표를 올려 각 형제들을 태수로 임명했다. 사일(士壹)은 합포(合浦) 태수, 사유(士䵋)는 구진(九真) 태수, 사무(士武)는 남해(南海) 태수로 임명되었다. 이렇게 사씨 일가는 교주 전체를 차지하였고 사실상 독립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이후 교지는 사섭의 통치로 크게 번성하게 된다. 당시 사섭의 권세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三國志-吳書-士燮傳』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섭 형제의 권세는 견줄 자가 없었다. 외출이나 귀가를 할 때는 종이 울렸고, 악대가 뒤따랐으며, 거리는 수레와 말들로 가득했다. 좌우에는 향을 피우는 호인(胡人)들이 수십 명이었고, 아내들은 전용 수레를 사용하였으며, 보병과 기병들이 아이들을 따랐고, 이민족(원주민)들이 복종하였다."


사실 주부가 죽은 직후에는 조정의 영향력은 그때까지도 어느 정도는 남아있었다. 장진(張津)을 파견하여 교주자사로 임명했는데, 장진은 이후에 또 그의 부장 구경(區景)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후한 조정에서는 사섭을 교지태수를 겸하면서 수남중랑장(綏南中郞將)에 봉하고 교주의 7개 군(郡)인 교지(交趾), 남해(南海), 창오(蒼梧), 울림(鬱林), 합포(合浦), 구진(九眞), 일남(日南)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사섭은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여 수백 명의 사람들이 후한 말기의 난세를 피해 교지로 왔고 망명객들을 우대하여 교지 일대의 문물을 개발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베트남에 한자를 전파한 최초의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그 지방의 이민족들을 정벌하는 등 교지군은 국가 못지않은 번영을 누리게 된다. 베트남 통치에서는 유교를 위시한 중국 문화를 이식하는 것에 적극적인 관심이 없었고 당시 남방을 통해 들어온 불교 등에도 관용을 베풀었다. 이는 이후 베트남사가 중국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성립되는 것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섭은 201년부터 죽을 때까지 손권(孫權)에게 종속하여 아들 사흠(士廞)을 인질로 보내고 진상품을 매년 조공하면서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 인해 사섭은 손권의 총애를 받았으며 손권 또한 항상 편지를 보내고 후한 상을 내려 보답하였다.


손권은 210년 보즐(步騭)을 교주자사로 보내 사섭에게 모시게 하면서도, 동시에 사섭을 좌장군에 임명했다. 그리고 손권은 사흠을 무창태수(武昌太守)에 임명하는 한편 사섭과 사일(士壹)의 아들들을 모두 중랑장(中郞將)에 임명하였다. 사섭은 말년에 옹개(雍闓)가 일으킨 남만(南蠻) 반란의 실질적인 배후 세력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죽은 후 오나라가 교주를 탈취할 것이라 예상하여 남만까지 아울러 오나라에서 독립을 하려 했던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촉한(蜀漢) 남부 남만의 반란을 유도한 공로로 손권에게 특별한 지위와 상을 받았으며 아마도 사섭은 여기에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듯하다. 교지와 남만이 연결되는 부분은 운남과 베트남 북부로 연결되는 지형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실제로 사천성 남부부터 운남성 일대에 이르는 지역의 인종과 교주의 인종은 거의 같다. 실제로 이 지역들은 몽골군이 베트남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육로로 진군했던 길이며, 당나라 시기에는 운남성에 세워진 남조(南詔)가 교주 지역을 공격해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참고로 여기에 나타나는 남조는 후에 운남성 지역을 기준으로 건국된 대리국(大理國)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사섭은 226년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유경숙(劉敬叔)의『異苑』卷7에 의하면 창오왕(蒼梧王) 사섭(士燮)은 한나라 말기에 교지(交趾)에서 죽었는데, 남쪽 변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그의 무덤에는 항상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고, 신령스럽고 이상한 기운이 불항(不恒)하여 누차 중원에서 발생하는 전란을 피하게 되니 아무도 다시는 무덤을 파내지 않았다. 


진(晉) 나라 흥녕(興寧) 연간에 태원(太原) 사람 온방(溫放)이 자사가 되었는데, 기병들을 대동하여 무덤을 파보게 하였다. 그러나 무덤을 파고 돌아온 직후, 기병들이 타고 갔던 말들이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사섭이 사망한 이후 여대(呂臺)는 220년에 장사로 오게 된 보즐을 대신해 교주자사를 겸임하여 교주에 도착하자마자 인근 구진군에서 반란을 일으킨 전박(轉博)의 투항을 받아냈다. 게다가 형주(型州)에서 데려온 자신의 세력에 더하여 울림 지방의 남방 민족들과 인근 북방 산세에 정착하던 산적들을 토벌하고 남해의 도적 왕금(王禽)을 포로로 잡아 수도인 건업(建業)으로 보내는 전공을 세우니 손권으로부터 부절을 받고 안남장군(安南將軍), 도향후(桃鄕侯)로 봉해진다. 226년 손권은 여대의 의견에 수렴하여 교주와 광주(廣州)로 분할 하였는데 교주자사와 광주자사를 사씨 일족과 관계없는 인물들을 임명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특히 교주자사 여대(呂臺)는 손권의 승인을 받아 스스로 광주자사가 됨으로써 교주와 광주는 이후에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분리되어 교주는 베트남, 광주는 중국 광동성의 성도(省都)가 되었다. 한편 이후 교주자사에는 장군 대량(戴良)이 임명되고 태수에는 진시(陳時)가 임명되어 교지로 오게 되었다. 사섭의 아들 사휘(士徽)를 안원장군(安遠將軍)에 봉하는 한편 구진태수에 임명하여, 교지국을 통치하는 직위에서 배제시키니 자신들을 축출하려는 사실에 분노한 사섭의 아들 사휘는 그의 형 사지(士祗)와 함께 손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교지국 통치에 사씨 가문을 배제한 오나라 손권의 의도는 교지를 장악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올라오는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사휘와 그의 형 사지(士祗)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스로 교지태수라 칭하고 대량을 따를 것을 주장하는 환린(桓鄰)을 처형한 이후 해구(海口)를 지키는 병사들을 동원하여 대량과 진지에게 대항했다. 환린을 죽인 일에 분노한 환린의 형 환치(桓治)와 그의 아들 환발(桓發)이 사휘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사휘와 강화를 맺으면서 떠나게 되었는데, 당시 여대는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사휘를 토벌할 것을 요청하면서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출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군관 중 하나가 사섭 일가는 교주에서 인망이 깊고 세력이 크니 성급한 공격은 금물이라고 조언하자 여대는 사섭 일가가 오군의 공격에 방비하기 전에 공격을 해야 한다고 답한 뒤 주야를 항해하여 합포에서 대규모 군대와 합류하니 사휘는 오군의 강한 군세에 사기를 잃고 교주성의 성문을 통제하면서 수성전을 기획했다.여대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사일의 아들 사광(士匡)을 사우종사(師友從事)로 임명하여 사휘에게 보내 그를 태수의 자리만 해임하고 숙부들의 목숨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권고하였고, 사지와 사휘, 그리고 그의 동생 6명은 윗옷을 벗고 저항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 뒤 여대를 영접하며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여대는 사휘가 항복하자 그들의 앞에서 조서를 반포하고 사섭의 집안에 대한 죄목을 열거한 뒤 사휘와 사지를 처형하여 그 머리를 무창(武昌)에 보냈으며 이후 사섭 집안의 또 다른 일족인 사위, 사일, 사광은 모두 여대에 의해 죄를 용서받았지만 사일과 사위도 몇 년 후 범법 행위를 적발하고 그들을 주살해 버린다. 이후 사섭의 일족은 몰살되거나 유배됨으로 인해 거의 멸족되었다. 이러한 여대의 행위에 대해『魏氏春秋』의 서문에서 저자인 손성(孫成)은 여대가 사섭의 아들들을 투항시킨 다음 모두 죽게 한 것은 신의가 없으니 여씨 가문의 봉록도 오래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서술했다. 이러한 처사에 오나라 손권에 협력하여 사씨 집안에 반기를 들었던 사휘의 부하인 감례와 환치가 반발하며 여대를 공격하게 되지만 여대는 이들과 전투를 벌여 사휘의 옛 부장들을 모두 제압했다. 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여대는 반우후(番禺侯)로 승진했다. 여대의 토벌로 인하여 사섭 일가의 문제가 해결되자 설종(薛綜)과 함께 구진(九眞)까지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으로 수천 명을 참수했으며, 인도차이나 남부까지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부남(扶南), 당명(唐明), 임읍(林邑)까지 손권에게 공물을 조공한 왕들이 늘어나자 여대는 진남장군(鎭南將軍)으로 승진하고 개선하게 된다.


오늘날 사섭은 베트남의 역사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사왕(士王)이라고 불리며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베트남 민족 독립의 관점에서 볼 때 베트남 민족을 탄압한 압제자로 폄하되기도 한다. 그로 인하여 교지의 문화를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문화로 만들었다는 공로도 존재하기 때문에 분명히 공과는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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