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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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현종 당시 페르시아인 상인들이 자주 왕래하던 광주(廣州)에 설치된 것이 강남 교역의 최초이며 이후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초기까지도 축소, 재설립 등을 반복하며 해외 무역을 관리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당 현종 시대 서기 714년에 시박사가 처음 설치된 것으로 전해지나 당시에는 절도사가 시박사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전문성이 떨어졌고, 송나라 시기에는 해상 무역이 크게 융성한 것을 계기로 항주, 천주(泉州), 영파 등에도 시박사가 설치되며 기능이 강화되었다. 당시 송나라에서는 쌀과 차 이 외에도 경덕진(景德鎭)의 도자기를 수출했으며 대신 진주, 상아, 코뿔소 뿔 등의 사치품을 수입하였다. 본래 중국 중부, 남부에 서식하던 코끼리와 코뿔소가 멸종하는 와중에도 중국에서 상아와 코뿔소 뿔의 수요는 여전했고 이러한 수요를 결국 수입으로 채운 것이다. 시박사는 주로 지방관이 통솔하였으나 시대에 따라 환관, 절도사도 시박사를 통솔하였다. 실크로드 이외의 해외 무역을 장려하던 북송 시대에 가장 융성했다. 고려와 송나라 사이의 무역도 시박사의 관리를 거쳤다.

중국 남방화교의 상인들,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이후 명나라에서 해금 정책을 펼치면서 밀무역이 흥하고 시박사의 기능이 상당 부분 약화되었다가, 청나라 때 시박사 대신 해관(海關)이라는 관청이 설치되면서 해체되었다. 시박사는 기구의 명칭도 여러 차례 변천을 겪었으나, 현대에는 시박사라고 통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려 상인들의 내항은 7∼8월에 가장 많았다. 7월에 약 22회, 8월에 약 38회로 전체의 약 반 정도였다. 이는 서남 계절풍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0월에 10회, 11월에 8회 내항하였다. 11월에 역풍으로 내항하는 것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횟수가 많은 것은 11월에 거행되는 중추절을 기회로 일종의 입공무역(入貢貿易)을 했기 때문이다. 고려 상인들은 대개 7∼8월에 와서 중추절을 거친 후 북풍을 이용하여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항로는 남북항로가 그 주된 간선이었다. 북선항로는 대동강 어구 초도(椒島)를 거쳐 옹진항 또는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에서 출발하여 동북 직선로에 의해 산동 등주(登州) 방면으로 해당 항로는 1074년 무렵까지의 주 항로였다. 그러나 거란족이 강성해지면서 북선항로가 위험해지고 중국 남부의 국제무역이 번성하여 1074년 무렵 이후에는 남선항로가 발달하였다.
남선항로는 명주(明州)에서 동북으로 흑산도(黑山島)에 이르고 다시 동북행하여 위도(蝟島)와 고군산도(古群山島) 등 서해안 도서를 거쳐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다. 당시의 항정 일수는 계절풍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송나라 상인들의 출신 지역을 보면 천주(泉州), 광동(廣東), 명주(明州), 복주(福州), 태주(台州) 등 남쪽 지역, 특히 천주와 명주의 상인들이 많았다. 명주는 고려나 일본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내외상선의 발착 항구로 지정되어 있었다. 고려에 오는 송나라 상인들은 명주 시박사(市舶司)에서 발급하는 공빙(公憑)을 가져야 하며, 귀국 때에도 시박사에서 귀환 수속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송나라 상인들의 무역 방식은 조공 무역과 상인에 의한 무역인 호시(互市)로 대별되었다. 양국 사절의 왕래에는 국신물(國信物)이 증답(贈答)의 형식으로 교환되었으며, 사행을 중심으로 일반 무역이 성행하였다. 상인들의 무역은 합법적인 것과 밀무역으로 분류되어진다. 고려에서는 외국 상선을 예빈성(禮賓省)에서 접제하고, 무역품은 감검어사(監檢御使)가 금물(禁物) 유무를 조사하였다. 중국에서는 고려 상선이 등주와 명주에 입항하면 입항세를 내야 했고, 특수 물종에 한하여 박매(博買, 官買)를 행하고 난 다음에 일반적인 교역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밀무역에 관한 엄격한 금지 조처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밀무역이 매우 성행하였다. 남송 말기, 명주에서는 외국 상선에 대해 1/15의 입구세(入口稅)를 징수하였다. 그런데 고려 상선에 대해서는 1/19을 징수하였다. 이것은 출입이 빈번한 고려 상선에 대한 특혜였다. 이로 보아 고려 상인의 활동은 상당히 활발하였던 것 같다. 무역품을 보면 수출품은 금과 은, 구리, 인삼, 송자, 문피, 황칠 등 원료품이 존재했고 각색 능라, 세저포, 세마포, 백지, 향유, 금은동기, 나전기구, 완초석, 부채. 금은장도, 낭미필, 송연묵 등 가공품들이 중심이고, 유황 및 도검, 청서피 등 일본 및 여진산 물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입품은 능견금라, 자기, 금박, 약재, 차, 서적, 악기, 금은전 등이며, 특히 서남아시아산 향약, 서각, 상아, 산호, 호박, 주배(珠琲), 빈철, 수정, 소목 등도 송나라의 중계 무역에 의해 수입되었다. 수출품 중에는 종이를 비롯하여 부채나 문방 4보를 이루는 필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고려 종이는 아름답고 질겨 필기에 쓰이는 외에도 장정이나 배첩(背貼)에도 많이 사용되었으며, 송나라의 온주산(溫州産)보다도 상품적 가치가 높았다.
고려 종이는 사신이나 상인이 잘 다니는 수도나 항구만이 아니라, 장강(長江) 유역 안쪽에까지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문방구는 송나라 사람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상품(上品)의 종이뿐만 아니라 송나라 사람들이 찬상(讚賞)한 문방 4보 모두를 다 만들었다는 것은 고려의 공예수준이 높았음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무역 품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있음이 주목된다. 첫째, 중세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교역품 중에는 사치품과 무기류들이 많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교역권의 내용이 우수한 문화의 전파라는 면과 아울러 각국 지배층의 사치적 수요와 군사적 수요에 크게 규정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 송나라의 수출품목은 국가의 수취체제와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강제적 교역 품목과 거의 일치한다. 송나라 전기 수취체제나 지배층의 강제적 상행위가 대외무역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배층의 사치와 군사적 목적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외 무역은 선진적인 직조 기술, 농업 기술, 의술 등을 부수적으로 도입해 주었으나, 그 국내 기반은 피지배층의 경제적 희생 위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셋째, 금, 은, 동 특히 금속 화폐의 재료로 쓰이는 은과 동이 대외 무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송에서는 국내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대외적으로 동부 이슬람권과의 교역에서 중국 은의 서방 유출 현상과 주변국에 대해 막대한 세폐(歲幣)와 사여(賜與)로 인하여 은 수출량이 크게 증대하였다. 이러한 은에 대한 수요의 증가는 11세기 이후 은값 폭등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북송의 화폐 정책은 원풍(元豊, 1078∼1085) 시대 이후 주목되는 변화를 보였다. 동전과 철전 주조가 감소하고 대신 은전이 새로운 화폐로 상정되었다. 송나라의 은 수요 변동이 동아시아 교역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은 수출도 그 영향권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한편 티베트 국가인 서하(西夏)와 이슬람 제국 등에 의해 육로를 통한 실크로드(Silk Road)가 봉쇄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중국의 동남해안선을 따라 해로를 통한 실크로드(The Silk Voyage)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880년에는 광주(廣州)에서만도 이슬람, 유태인, 페르시아 상인의 수가 12만 명, 인도네시아, 실론, 인도 상인들은 각각 그 수 천 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했다.
특히 남송(南宋)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전까지 농경과 방어 중심의 견고한 성으로 만들어진 성이 아닌 중국 통일왕조 최초로, 바다에 면한 도시인 항주(杭州)에 수도를 정하여 해상 무역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중국 해상무역의 발달은 화교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로 나타났다. 송나라 시대부터 세계에 화교들이 나가기 시작한다. 한나라가 멸망했을 때 북방의 재력가들은 이민족의 위협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후 송(宋)나라가 멸망했을 때 나라에서 많은 혜택을 받던 사람들이나 혼란과 위험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피난한 곳은 동남아시아 일대였다. 송나라 많은 사람들이 동남아시아, 태국 등의 나라에 이주를 했다. 또한 원(元)나라가 멸망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길을 선택했다. 또한 13세기 말 원나라 때 최초로 해양 원정이 시도되었지만 실패로 끝나고 남송(南宋)은 수도를 바다와 인접해 있는 항저우(杭州)로 정하여 해상 무역의 발전을 도모했다. 사적인 민간 무역은 공적인 조공무역에 비하여 훨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동북아시아 각 국가들 사절의 내왕한 횟수와 송나라 상인의 내항 횟수를 비교하여 보면 알 수 있다. 사절의 내왕은 962년부터 1173년 사이에 고려, 일본, 베트남의 사신이 송나라에 간 것이 약 400회이며, 송나라의 사신들이 이들 국가들에 온 것이 약 300회 정도이다.
한편 송나라 상인의 내항 횟수는 고려로 한정 지어 볼 때 1012년부터 1278년까지 약 120여 회에 달하였고, 내항한 송나라 상인의 총인원도 약 5,000명에 달하였다. 송나라의 민간 무역은 태종 때부터 휘종 때까지 빈번하였는데, 특히 진종 시기에 가장 활발하였다. 진종 때는 북송 전 시기를 통하여 정치가 안정되고 문물제도가 크게 갖추어졌으며 국력이 또한 왕성하여 내부에서는 평화로운 시기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송나라는 이 시대가 신종 때부터 산업이 크게 발달하여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개발되던 때였다. 신종 때는 주조된 동(銅), 철전(鐵錢)이 매년 600여 만 관에 이를 정도였고, 이 동전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는 물론 남양(南洋)과 인도양(印度洋), 멀리는 아프리카 동해안의 여러 나라에서 사용할 정도였다. 송나라 상인들의 동아시아 각 해안 지대의 출입이 잦아짐에 따라 송나라 상인 가운데는 동아시아 각 국에 귀화하여 양국 무역에 활약하는 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처럼 활발하던 동아시아 각 지역의 민간무역은 남송 시대에 이르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에 대한 이유는 송나라가 금나라에 대한 대책으로 고려 및 일본, 거란의 잔존 세력들과 더불어 금나라에 대항하려는 연려제금책(聯麗制金策)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왔으나 고려는 중립적인 태도로 적극성을 갖지 않았고, 일본은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거란의 잔존 세력은 매우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려와 일본, 거란 잔존 세력에 대한 송나라의 감정은 점차 악화되어 남송 고종 때는 특히 고려의 태도를 의심하여 고려와 통교를 원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고려 사신이 간첩 행위를 하지 않았는지를 의심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영향은 다시 민간무역에도 나타나게 되어, 송나라 조정에서는 상인들이 동전을 가지고 고려에 가는 것을 금지하며 고려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 이러한 국가 차원의 제재 조치와 남송의 국제적 위상이 약해짐에 따라 상인들의 활동도 위축되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고려 명종(明宗) 재위 기간 동안에 송나라와의 무역은 3회에 불과하였으며, 신종(神宗)의 재위 기간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희종(熙宗)의 재위 기간에는 1회, 고종(高宗)의 재위 기간에는 2회, 원종(元宗)과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각각 1회씩 보일 뿐이다. 한편 고려에서도 이 당시 송나라 상인에 대하여 좋지 않게 여기고 억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원종 때 제주(濟州)는 해외의 거진(巨鎭)이기 때문에 송나라 상인과 도왜(島倭)가 아무 때나 내왕하니 마땅히 방호별감(防護別監)을 보내어 비상사태에 대비할 것을 조정에서 의논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