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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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중국은 베트남을 조공국으로 삼고 있었으며 무력에 의한 병합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실제로도 여러 차례 점령하여서 중국은 베트남을 '남월'이라고 부르며 오랫동안 상국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맹획의 종족 연합을 베트남이나 버마로 생각하는 경향이 오랫동안 있었지만 사실 베트남 북부 지역은 손권의 영향 아래 있었다. 애초에 베트남의 시작인 남월이 진나라 멸망 후 이 곳에 내려간 장수 임오와 그의 부관 조타가 세웠고 이 둘은 한나라에 강력히 저항했으므로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베트남 내 화교들의 경제권 장악이 겹쳐서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대단히 복잡했다. 베트남 전쟁 때 대만이 중국의 개입에 대항해서 남베트남에 대해 병력 및 군수 지원을 천명했으나 남베트남 정부에서 강력히 막았다.

Chinese soldiers are kept by Vietnamese fighters on the battlefield of Cao Bang on February 26, 1979. 출처 : AFP, Hoang Minh Vu
물론 대만의 참전이 중국의 개입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 남베트남은 지원을 받아들여서 대만 육해군 소수 병력이 군수 지원대로 참전했다. 일단 건국 초기 북베트남은 중공과 우호적인 관계기는 했다. 중국 대륙을 1949년에 중공이 석권한 덕분에 베트남 공산당은 베트남 국민당을 사이공으로 밀어내는데 큰 이득을 보기도 했다. 북베트남을 공산당이 장악하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이 바로 중국 국민당의 동맹이었던 베트남 국민당이었기 때문에 중공의 승리가 없었다면 베트남 공산당 역시 큰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초기 북베트남과 중공은 친밀했고 쯔엉찐처럼 중공 쪽에서 영향을 받은 인물들도 많았다. 하지만 북베트남의 경제 역시 중공처럼 악화일로를 걷게 되자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지도부도 중국이 자신들을 보호해 준다는 명분으로 개입할까 노심초사했으며 중국이 공식적인 파병을 해서 지원해 주겠다고 수차례 제안했는데도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물론 적지 않은 중국군 병력이 북베트남에 들어오긴 했지만 대부분 북베트남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공병이나 대공포 및 대공미사일 부대 혹은 물자 지원을 위한 보급 부대였다. 미군 및 남베트남군과 직접 전투하는 것은 전적으로 북베트남군이 혼자했다. 심지어 중국이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동안에도 북베트남 정부는 적극적으로 중국과 베트남의 투쟁사를 홍보하고 교육했다. 구정 공세도 중국군의 만류에도 무시하고 강행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호치민이 중공 고문단의 견해를 듣고 중국식 토지개혁 정책을 시행했다가 정권이 붕괴될 뻔했었던데다 이를 겨우 진압했지만 이후에는 자아비판을 했다.
한편 소련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북베트남에 제공한 군사원조는 최소한 50억 달러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미국에 비해 적은 액수지만 소련의 입장에서는 국가 재정에서 방위비를 몇 % 정도 증가시킬 정도로 큰 규모였다. 중국은 베트남전쟁 기간 중 북베트남에 호치민 루트를 제공하는 등 결정적 물적 ·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역사적으로 베트남인들의 대중국 감정이 좋지 않은데다가, 통일 후 공산 정권이 남베트남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교를 탄압하여 양국 관계는 험악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베트남 공산당은 소련 중국 간 분쟁에서 소련 측을 지지하여 중국의 분노를 샀다. 어찌됐든 베트남 전쟁은 양대 진영의 대립과 냉전, 그리고 현지 내전이 복합적으로 투영된 전쟁이었지만, 베트남이 통일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베트남의 승리였다. 그러나 중국과 가까운 캄보디아와 베트남 간에 분쟁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1979년 2월 17일 새벽 3시 30분(하노이 시간) 600,000명의 중공군이 갑자기 베트남의 북부 국경 지방 6곳(라이쩌우, 라오까이, 하장, 까오방, 랑선, 꽝닌)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중공군의 침공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됐고, 당 중앙위원회는 베트남 국민과 군인들에게 조국 수호와 영토 사수를 촉구했다. 이 전쟁에는 수만 명의 대학생과 교사 그리고 교수들이 자원해 참전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침공 후 한 달만인 3월 18일에 철수했지만 실제로 북부 국경선에서의 크고 작은 전투는 1979년 2월부터 198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중공군은 1989년 국경에서 완전 철수했다.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분쟁 10년 동안 약 1만 명의 군인과 수백 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가장 치열했던 비수옌(Vi Xuyen) 전선에서만 5,000명의 군인이 희생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비수옌 전선에서만 2,000명, 북부 국경 전체로는 4,000명 이상의 전사자 유골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은 25,000여 명이 전사하고 엄청난 군사적 손실을 입어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월중전쟁 때는 베트남의 여인들도 베트남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군복을 입고 직접 총포를 쏘며 참전한 경우도 있었지만 군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평민들 사이에 숨어 중국군을 교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게릴라 전략으로 평민들 사이에 평상복 입고 숨어 중국군을 습격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중국군들은 베트남 평민들을 베트남 게릴라 군대들과 구별하지 못해 대량 학살하곤 했다. 베트남이 여군을 동원한 것은 비단 중국과의 월중전쟁 때만이 아니었다. 대 프랑스와의 독립 전쟁 때와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여성 군인들의 끈기와 용맹, 게릴라 전 및 폭탄 의거 등으로 베트남이 독립하고, 북베트남에 의해 베트남 전역이 공산화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20세기의 고단한 베트남의 흑역사에서 나타난 여성들로 인해 그 강인한 DNA가 현재 베트남에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