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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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상인들이 송나라와의 민간 무역이 활발하지 못하였던 이유는 고려가 개국 초부터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부(富)를 중앙에 집중시키도록 통제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중앙의 왕실과 귀족들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물건으로도 그들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양국 무역품의 종목은 민간 무역품도 관영 무역품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는 고려에서 송나라의 수입품을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은 왕실과 귀족 뿐이었으며, 형식적인 조공 관계를 통한 공무역이나 사무역은 이러한 특수 계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대 송나라에 관한 수출품과 수입품은 대개 다음과 같다. 먼저 고려에서 송나라에 수출한 것은 금(金), 은(銀), 금은기구(金銀器具), 화문능라(花文綾羅), 세저(細苧), 생포(生布), 인삼(人蔘), 문피(文皮), 시피(豺皮), 해시피(海豺皮), 초피(貂皮) 등이고 백지(白紙), 향유(香由), 송자(松子), 화문석(花文席), 나전(螺鈿), 장도(長刀), 지(紙), 필(筆), 묵(墨), 선(扇) 등을 들 수 있다.

중국 강남 영차 일대의 활발한 거리,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반면 송나라로부터 고려에 들어온 수입품은 의대(衣帶), 안욕(鞍褥), 채단(彩緞), 칠갑(漆匣), 옥(玉), 서(犀), 금은기(金銀器), 금박(金箔), 차(茶), 향료(香料), 약재(藥材), 자기(瓷器), 서적(書籍), 서화(書畵), 약품(樂品), 화폐(貨幣) 등이었다. 수입품 가운데 특이한 것은 그 물품이 모두 중국산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그 가운데는 서남아시아의 물산도 있었다. 이러한 물건들이 송나라 상인들에 의하여 고려로 중계 무역이 이루어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송나라 상인들이 고려 조정에 바친 물품 가운데 향약, 침향, 미각, 상아, 공작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서남아시아의 물품으로 당시 아라비아, 자바, 三佛齊(삼불제, 팔렘방) 등 여러 나라 상인에 의하여 광주, 천주, 명주, 항주 등지에 들어온 것을 송나라 상인들이 다시 고려에 싣고 와서 물역을 청하였던 것이다. 한편 송나라 시대의 3대 발명품으로 화약, 나침반, 인쇄술을 꼽고 있다. 이슬람 세력을 통해 서양에 전해진 이들 발명품들은 서양의 근대 사회를 이룩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화약은 중세의 기사 계급을 몰락시켰고, 나침반은 지리상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으며, 인쇄술은 새로운 문화를 시민 계급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송나라 시대의 중국은 분명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없는 최고의 문명국이었다. 자연 과학, 인문 과학 할 것 없이 과학 기술들이 전반적으로 발달하고, 이를 배경으로 해서 산업이 급격히 발달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산업 발전의 배경은 무엇이었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중국이 유목민족들의 침입으로 국토의 일부를 내주고 나름대로 시련이 컸던 시기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와 같이 시련이 다른 분야에서의 도전과 자극이 되어 새로운 기술이 다투어 촉진되고 경제 및 산업 전반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해외 무역도 활발히 일어났다. 화약은 초석, 유황, 목탄 등을 혼합하여 만들어 지는데, 이미 당나라 초기 시대의 어느 도사는 이들의 배합을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화약이 무기로 처음 사용되었던 것은 당나라 말기 때부터였으며, 그 제작과 사용법이 널리 발달한 것이 송나라 시대였다. 이는 1161년 남경 부근까지 남하한 금나라 군과의 전투에서 폭발력이 강한 화약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당시는 종이로 만든 용기에 화약을 담고 점화한 다음 손으로 던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13세기에는 철제 용기가 출현하여 통 모양의 용기에 넣고 정확히 조준 발사하는 장치가 발명되어 명중률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화약은 13세기 중엽, 이슬람 제국에 출정한 십자군에 의해 유럽에 전달되었고, 유럽은 14세기 전반부터 화약을 제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 중국에 나타난 서양인들에게 입수된 화약 무기는 옛 중국인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위력이 강한 것이었기에, 이 때 이미 화약을 다루는 응용 기술이 중국을 뛰어 넘은 것으로 보인다. 나침반을 놓고 볼 때, 중국인들은 일찍부터 자석의 원리를 알고 있었으며, 11세기에는 자침이 정확히 남북을 가리키지 않고 한 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이러한 원리는 송나라 시대에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나침반의 제작을 이끌어냈다. 낮에는 태양, 밤에는 별을 기준삼아 원시적인 항해를 해왔던 항해 기술이 급격히 진전하여 원양 항해에 큰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인쇄술도 급격히 발전했다. 송나라 시대에는 산업의 발달에 따라 문화층이 확대되고 과거제가 정착되어 수험용 참고서 등 서적의 수요가 크게 증대되고 있었다. 중국에는 일찍이 제지술이 발달하였고 제지업이 발달한 곳을 따라 인쇄업도 발달했다. 서적이 상품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당나라 말기부터였다고 한다.
1041년, 필승(畢昇)이 찰흙을 아교로 굳혀 최초로 움직이는 활자를 만들었다. 목판으로는 다른 책을 인쇄할 수 없는 것에 비해, 활자는 철판 위에 글의 순서대로 배열하여 인쇄를 한 다음, 다른 책을 찍을 때는 또 다시 배열하여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문자는 표음문자가 아니라 표의문자이고 글자의 수가 무수히 많다 보니 활자가 널리 사용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활자가 사용됨에 따라 송나라 시대에는 각 분야의 서적 출간이 매우 활발히 일어났다.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구양수(歐陽脩)의 <신당서(新唐書)>,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이 있다. <신당서(新唐書)>는 <구당서(舊唐書)>의 오류를 바로 잡고자 한 기전체(紀傳體)의 저술이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사마광이 19년 동안 편찬한 통사로서 편년체(編年體)로 되어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역사 서술에서의 새로운 방법, 사건의 본말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이른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가 출현했다. 금석학이 새로이 개척되어 구양수의 <집고록(集古錄)>, 조명성(趙明誠)의 <금석록(金石錄)> 등이 발간되었다. 송나라 시대의 과학을 논하면서 제외할 수 없는 인물이 심괄(沈括)이다.
그는 11세기 왕안석(王安石)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정치가이자 다방면에 박학했던 과학자로서 당대의 천문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 약학, 기술학 등의 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역사, 행정, 군사, 지리, 행정 분야의 성과를 깊이 있게 일괄하는 백과사전적 저술인 <몽계필담(夢溪筆談)>을 남겼다. 몽계(夢溪)는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거주했던 곳이다. 대략 1086년에서 1093년 사이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심괄은 고대에 있어서의 기후의 변동과 해륙의 변동을 추정해냈고 각종 천문 기계들을 제작했다. 태양력의 사용을 주장했으며 자침이 정남북을 가리키지 않는 것에 유의하여 입체 모양의 지도와 천하도(天下圖)를 만들었다. 한편 송자(宋慈)는 중국 최초의 법의학 저서인 <세원집록(洗冤集錄)>을 1247년에 완성했다. 그는 법관으로 있을 때 청렴하게 법정을 펼쳐, 간악한 자를 엄징하고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형정과 사법 경험을 총괄하고 많은 관련 문건들을 검토하여 법의학의 검시법, 응급처치 및 해부, 생리, 병리, 및 외과 수술의 성과를 종합하였는데, 특히 법의학 검험(檢驗)에 관한 것은 근대 과학 원리와도 부합되는 점이 많아 중요한 자료로 알려지고 있다.
각종 잉여 농산물과 농산물의 상품화, 수공업의 발달, 소비 성향의 증대, 외국 무역의 발전과 국내 시장권의 확대, 화폐 경제의 보급 등은 송나라 시대 상업이 발달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농촌에서 정기적인 시(市), 초시(草市)와 허시(墟市), 이를 합하여 방장(坊場)이라고 부르는 시장이 있어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사고팔았다. 또한 도시에서는 전문 상가는 물론 야시장(夜市場)도 있었다. 상인도 고정적인 점포를 갖고 있는 좌고(坐賈)와 이동하는 객상(客商), 그리고 중개 상인으로 아인(牙人)이 있었다. 상품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화폐의 유통도 날로 활발해졌다. 이에 사천 지방에서의 철전은 휴대하기 불편하여 진종 때 성도(成都)의 16가(家) 부호가 처음으로 1차 발행 3년 유효 기간의 교자(交子)를 찍어 유통시켰다. 그러나 부호들의 현금 부족으로 철전으로 바꿀 수 없어 분규가 일어나 정부에서 교자 발행을 중지시켰다. 1023년에 익주에 교자무(交子務)를 설치하고 정부에서 교자를 재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섬서, 하동로(河東路)까지 확대시켰는데 북송 말기 시대에 교자를 남발하여 교자의 신용이 떨어져 전인(錢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따라서 북송 시대의 지폐는 일정한 지역에서만 사용되고 민간에서는 크게 유통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송 시대에 들어와 군사비의 지출이 늘어남에 따라 현전관자(見錢關子), 교자(交子) 등을 발행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수표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상품 유통이 늘어나면서 동전의 수요도 급증하였으나 동(銅)의 생산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에 정부에서 회자(會子)를 발행하기 시작하여 회자가 각지로 확대 유통되었다. 송나라 시대의 대외 무역은 육로를 통한 무역 이 외에도 해상 교통로가 발달되어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서양 상인으로는 유태인, 페르시아 인, 아라비아 인들이 중국으로 와 교주(交州), 광주(廣州), 천주(泉州), 명주(明州, 영파), 양주(揚州)가 중요한 무역 항구가 되었다.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에는 유태인들의 거주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광주, 명주, 항주와 남송 시기의 천주에는 시박사를 두고 무역을 관리하였다. 육로에는 관에서 설치한 각장(榷場), 민간의 밀수를 통하여 국경 무역이 이루어졌고, 각장은 쌍방 정부가 전문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하는 고정된 무역 장소로 각각 일정한 각세를 징수하였다.
무역 물품은 정부에서 정해주었는데, 송나라에서 요나라로 보내는 것은 차, 비단, 칠기, 자기 등이며, 요나라에서 송나라로 수출한 것은 양, 말, 낙타로 양이 많았다. 송나라는 전마(戰馬)가 필요하여 대부분 서하로부터 구입하였으며, 서하는 도자기, 비단, 칠기, 차를 수입하였다. 이처럼 각장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만족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민간 무역으로 밀수가 성행하였다. 한편, 상인들은 행(行)이란 동업 조합을 조직하여 외지의 상인은 반드시 행을 통하여 상품 거래를 할 수 있었다. 행에는 행두(行頭) 또는 행노(行老)가 있어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였다. 그에 상업의 발전에 따라 도시의 구조도 바뀌게 되었다. 즉, 당대의 장안은 방(坊, 주택구)과 시(市, 상업구)로 나뉘고, 영업시간도 엄격하게 통제되었으나, 송나라 시대에는 이러한 제한이 없어졌다. 심지어 야간 통행금지도 폐지되었다. 따라서 도시의 관리 체제도 변화가 일어나 기본 조직인 방(坊) 위에 상(廂)이 있었다. 이 상과 방의 조직은 관을 협조하여 방화(防火), 방도(防盜)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 이 외에 물가 감시, 탈세와 밀수 적발 등 부정을 찾아내는 활동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5대 10국 시대를 거치면서 도시가 더욱 발전하여 당나라 시대에는 인구 10만 호 이상의 도시가 10여 곳에 불과하였는데 북송 때는 40여 곳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동경(東京) 개봉부(開封府), 북경(北京) 대명부(大名府), 서경(西京) 하남부(河南府), 남경(南京) 응천부(應天府)의 4부를 두었다. 도시에는 도처에 기관(妓館), 주루(酒樓), 와사(瓦肆, 오락장) 등의 환락가가 있었는데, 특히 와사에서는 각종 기예를 공연할 수 있었으며, 삼국시대의 고사를 이야기하는 설삼분(說三分)과 5대 10국 시대의 정사를 이야기하는 설화인(說話人)이 있었다. 북송의 수도인 변경, 개봉(開封)에서는 변수(汴水)가 가로 질러 흐르고 있으면서 전국 정치 중심이며 상업 도시이기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개봉에는 약 20만 호가 살고 있었으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상업 활동이 이루어졌다. 상인의 동업 조합인 행(行)도 160여 개, 여기에 가입한 행호(行戶)가 6,400호였다. 당시 변경의 모습을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와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을 보면 번화하였던 개봉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또한 남송의 수도인 임안부(臨安府), 항주는 남송 말기 시대에 390,000호, 124만 명의 인구를 갖고 있었다.
5경이 되면 아침 시장이 열리기 시작하여 밤 3~4경이 되어야 점포나 주루(酒樓), 가관(歌館)이 비로소 조용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사(茶肆)에는 유명한 글씨나 그림을 걸었고, 생화도 꽂아 놓아 내부 장식을 하였다. 성 안에는 금, 은, 옥기, 도자기, 칠기 등 각종 상품을 파는 상점이 즐비하였으며, 각종 일용품은 물론 수리점도 있어 도시 생활의 활기가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