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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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22일 독일 국방군과 추축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대조국전쟁이 발발한 뒤, 1941년 가을까지 소련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패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맹렬하게 저항하던 소련군과 러시아의 혹독한 날씨와 기후조건 등으로 인해 독일군의 모스크바 점령은 실패하게 된다. 이에 당초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독일 국방군의 목표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41년 12월부터는 소련군이 반격을 시작되었으며, 1942년 새해 1월까지의 공세로 독일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모스크바 일대에서 150km~250km 가까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모스크바가 점령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었고 초기 반격에서 축출하는 데 실패한 르제프 돌출부에 소련군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공격을 명령했으나 르제프(Ржев) 전투에서 소련군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독일군의 전술에 걸려 들어 엄청난 사상자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에 위협이 되는 돌출부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연이어 데미얀스크(Демянск)에서 포위된 독일군이 방어에 성공하면서 독일 중부 집단군은 큰 타격을 받긴 했지만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전선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사진 : 러시아 볼고그라드(옛 스탈린그라드)에 위치한 마마예프 쿠르간 대조국전쟁 현충원,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1942년 봄 독일 국방군 장성들은 모스크바에 대한 재공격을 건의했지만 모스크바 공격을 담당하던 중부 집단군이 많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고 히틀러 또한 모스크바를 또 공격하는 것은 소련 측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는 바람에 미국이 참전했고 그로 인해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히틀러는 미국이 유럽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동부 전선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을 선봉대로 삼아 카프카스의 마이코프(Майкоп)와 그로즈니의 유전 지대를 점령하고 돈 강과 볼가 강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차단하면서 소련의 수운을 마비시킴과 동시에 독일의 고질적인 연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따라서 1942년 하계 공세로 방향을 잡고 이를 청색 작전(Fall Blau)이라 명명했다. 이를 통해 1943년경에 소련의 경제를 붕괴시키고 군사력 및 그 저항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이처럼 독일이 계획한 청색 작전은 크게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1. 보로네시에서 저항하는 소련군을 격파하여 진격로 측면의 안전을 확보한다.
2. 돈 강을 넘은 독일군은 점점 전선을 밀어 버리며 볼가 강까지 진격한다. 스탈린그라드로의 진격은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3. 위와 같은 과정으로 카프카스를 소련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이어 독일군은 카프카스 유전 지대와 주요 산업 기반을 탈취하는 최종적인 목표를 달성한다.
모든 준비를 마친 독일군은 1942년 6월 28일, 지금까지 소련군과 대치하고 있던 돈(Don) 강을 건너 쾌속 진군을 개시했다. 청색 작전의 초기 돌격은 1년 전, 대조국전쟁 개전 당시의 바르바로사 작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히틀러의 계획은 결국 나폴레옹의 전철을 능가하는 최악의 실수로 역사에 기록된다. 바로 대조국전쟁의 흐름을 극적으로 바꾼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가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청색작전이 실행되고 독일군은 카프카스로 진군하게 되면서 소련군은 이에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독일군의 측면 포위로 인해 제대로 된 방어선 구축은 실패했다. 그나마 바르바로사 작전 때와 다르게 전력의 결정적인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이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로 진입하여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했으나,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과 마주하게 되고 무려 3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엄청난 피해를 내며 도시 점령에 실패하게 된다.
한편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놓여 있는 거대한 협곡 모양의 코카서스 지역으로 내려간 남부 집단군은 내부로 진격할수록 전선이 3배 이상 늘어나면서 보급선이 길어지게 되므로 남부 집단군 단독으로 점령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보급로의 원활한 수송을 확보하기 위해 배후를 보호해야 했는데 이를 보호할 군대도 모자랐다. 이렇게 늘어날 전선 측면의 보호를 남부 B집단군이 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스탈린그라드 점령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한 의도대로 보로네시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독일 남부 B집단군은 다시 속도를 내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간간이 소련의 저항이 있었지만 유전 지대를 비롯한 소련의 중요한 거점이 하나 하나 독일군에게 점령되기 시작했다.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할 임무를 부여받은 남부 B집단군 예하 제6군도 선봉이 되어 앞으로 나아갔다. 돈 강 동쪽부터 촘촘히 배치되어 있던 소련군은 제6군에 밀려 볼가 강 서쪽으로 점점 밀려들어갔다. 8월 중순이 되었을 때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 외곽에 도달했고, 이제 스탈린그라드의 점령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카프카스와 달리 주변에 별다른 고지가 없는 평원 위에 노출된 스탈린그라드는 손쉽게 점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로네시를 거쳐 300여 km를 빠르게 진격해 온 제6군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앞으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1942년 8월 23일 새벽 4시 30분, 폭격기들의 대대적인 공습을 신호로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공군의 폭격 직후 제6군의 선봉대인 제16 전차사단이 스탈린그라드 외곽의 볼가 강 북쪽을 향해 돌격했다. 예정대로 이들이 볼가 강 북쪽 서안을 점령하자 후속 부대들이 신속히 투입되어 시와 혹시 모를 외곽으로의 돌파구 확대에 나섰다. 시내 입성을 다음 날로 정한 파울루스(Friedrich Paulus) 제6군 사령관은 폭격으로 불타는 시내를 바라보면서 상황을 낙관했다. 그렇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첫날은 독일군이 생각했던 것처럼 평안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제16 전차사단이 서서히 불이 꺼져가고 있던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시내를 향해 돌입했다.
하지만 이 희미한 불이 꺼지지 않고 6개월 동안 계속 타오르고 있어 스탈린그라드의 도심이 파멸의 수렁으로 변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제16 전차사단은 시내 초입에서부터 예상치 못한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봉쇄되었고 오후에는 오히려 2km나 후퇴했다. 이 때부터 독일군에게 있어 매우 암울한 악몽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때까지도 독일은 통상적으로 나타난 어려움 정도로 이와 같은 사태를 치부하고 있었다. 독일의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서쪽으로의 진입에 난항을 겪게 되자 바익스 B집단군 사령관은 남측에서 함께 진격하던 독일 제4 기갑군을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들 또한 제6군과 같이 하루 종일 공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돌파에 실패했다.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하는 소련군이 예상 외로 강하게 저항하고 나선 것이었다. 소련은 독일의 공격 목표가 코카서스라는 것이 확실해진 7월 초부터 방어선 구축에 들어가 모든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소련군 최고사령부인 스타브카(Ставка)는 신편 제21, 62, 63, 64군과 제1, 4전차군을 배속시켜 보로네시 전투에서 궤멸되다시피 한 소련 남서 전선군을 즉시 재건한 이후, 스탈린그라드 외곽부터 도심까지 겹겹히 이어지는 방어선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그 동안의 격전으로 전력이 약화된 제28, 38, 57군도 재편이 끝나는 대로 후속 투입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스탈린그라드 방어에 나선 소련군은 무려 50여 만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소련의 방어선이 강력하다는 것을 깨달은 파울루스는 다른 방법으로 도심에 진입하고자 했다. 남쪽의 제64군과 북쪽의 제62군의 연결 고리를 끊어 각개격파하기로 한 것이다. 먼저 방어선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곳으로 파악된 제64군의 우측을 집중적으로 타격하기 시작했고 그의 예상대로 일대의 소련군 전력 대부분이 이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바로 주력을 북으로 돌려 방심하고 있던 제62군을 향해 돌진했다. 마치 성동격서(聲東擊西) 방식으로 예상 외의 공격을 당한 제62군은 완벽하리 만큼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그와 동시에 측면이 약화된 제64군도 어려움을 겪었다.
전황이 급속도로 불리하게 돌아가자 신임 남서전선군 사령관 안드레이 예료멘코(Андрей Ериоменко)는 전선을 좀 더 시가지 안쪽으로 축소하기로 하고 점진적으로 부대를 후퇴시켰다. 간신히 전력을 추스른 제64군이 엄호에 나서게 되자 거의 전멸에 이르다시피한 제62군은 도심으로 후퇴하여 겨우 부대를 살릴 수 있었다. 이처럼 치열한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 동안 B집단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독일군,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은 사령부에 계속 지원 요청을 했다. 장비가 불충분하고 훈련도가 낮은 헝가리 제2군의 경우, 스탈린그라드 북방의 정면 200km를 수비하고 있었다. 이는 매우 취약한 수비로 1~2km의 전선을 일개 소대가 맡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나치 독일군을 제외한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군은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던 것이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규모만 컸지 나치 독일 남부 집단 주력을 제외한 추축국의 군대가 형편없는 약졸임을 깨닫게 되었고, 볼가 강 남쪽 기슭의 여러 곳을 장악하며 버티기를 시전했다. 이는 남부 B집단군에게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시 자체를 함락시킬 것만 강조했고, 측면에 대한 지원 요청은 거부했다. 독일군 측면에 대한 소련군의 대폭적인 증강은 매우 비밀리에 수행되고 있었지만, 각종 정찰과 포로 심문을 통해 독일 측에서도 이를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Franz Halder, 1884~1972)는 측면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며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히틀러의 집착에 대해 매우 큰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소련군의 병력 증강에 대해서 해당 정보를 모여 봤자 오합지졸이라 일축하면서, 10월 중순 총참모장을 할더에서 쿠르트 차이츨러(Kurt Zeitzler, 1895~1963)로 총참모장을 교체하게 된다. 이렇게 벌어준 시간 동안 소련군은 점점 독일군에게 숫적 우위를 점하게 되고 마침내 11월 19일, 천왕성 작전(Операция Уран)을 통해 독일군의 측면을 보호해주던 루마니아군을 분쇄하고 도시에 있던 독일군 330,000여 명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독일은 공중 보급을 통해 포위된 병력을 살릴 방법을 구상했으나 이내 포기하고 최대한 소련군에게 저항해 그들을 묶어두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최종적으로 소련에게 항복하게 된다.
이처럼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8개월 동안 처절한 사투를 벌인 끝에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파울루스의 제6군은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항복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그들을 저주하면서 벽과 책상을 주먹으로 치고 격렬히 분노했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분노한 이유는, 파울루스와 제6군이 저급한 볼셰비키 슬라브인들에게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군대를 사지로 몰아넣고 죽음 직전까지 밀어 붙였던 인물은 바로 히틀러 자신이었다. 독일을 포함한 추축군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간인 194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대략 500,000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무려 15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포위를 당한 독일군 330,000의 대부분이 전사하고 포로가 된 병력은 24명의 장성을 포함한 90,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도 대부분 포로수용소에서 각종 질병과 노역으로 죽어갔으며 결국 전쟁이 끝난 뒤,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은 겨우 5,000명뿐이었다. 거기에 더해 독일은 전차 및 자주포 3,500대, 공군기 3,000기를 비롯해 70여 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장비들을 손실해버렸다.
이 정도의 피해는 사실 대조국전쟁 초기인 1941년 하반기 동안 소련이 독일에게 당한 엄청난 피해에 비한다면 극히 적은 숫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그 무한한 잠재력을 전격적으로 가동하여 피해를 최단 시간 내, 극복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독일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을 완전히 좌절시키고 전세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독일군의 병력과 자원은 이미 스탈린그라드에서 지나치게 소모되었고 더 이상 소련군을 압도할 만한 군사력과 무기 및 자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소련군은 초기의 패배를 딛고 이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군과 대등하게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전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대조국전쟁은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워낙 규모가 대단위라 대개 중요한 전역이나 전투별로 나누어 살펴볼 수밖에 없게 되고, 이 자체만으로도 제2차 세계대전 중 하나가 아닌 별개의 전쟁으로 분류해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종종 전투와 전투 사이에 공백이 있는 것과 같이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1945년 5월, 전쟁이 완전 종결 때까지 단 한 시도 총성이 멈춘 적은 없었다. 모스크바 전투 이후에도 르제프, 레닌그라드, 크림 반도 등지에서 연일 격전이 이어졌으며 이처럼 남북으로 2,000km에 이르는 전선 어디에서도 평화로운 곳이 존재하지 않았다. 양측 합쳐 약 800만의 대군이 팽팽히 맞선 1942년 봄이 되자, 전쟁은 흔한 일상이 되어버린 형국이었다. 전쟁사를 볼 때 기습에 나선 공격자의 진격이 멈추고 전선이 급속도로 정체되면 결국 지구전의 형태로 빠져들게 된다. 이 때부터는 엄청난 소모전을 감당할 수 있는 측, 장기전을 잘 버틸 체급과 체력이 되는 측이 결국 승리하거나 유리한 위치에서 정전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라 볼 수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현재 러시아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2013년 2월부터,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년에 6일, 전투와 관련된 기념일에 한 해 현 러시아 볼고그라드를 스탈린그라드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에 대해서 소련의 부활이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물론 스탈린이라는 인물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스탈린그라드'라는 러시아 입장에서 위대한 승리의 이름을 기념하는 것이며 공식적인 변경은 아니고 이름이 스탈린그라드였던 시절에 존재했던 대승리를 되새기는 의미로 어디까지나 이벤트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스탈린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스탈린의 이름이 들어간 도시 이름을 굳이 다시 사용한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볼고그라드 뿐 아니라 프랑스 파리에도 같은 스탈린그라드란 이름의 광장과 지하철역이 있을 정도로 이는 일반적이다. 물론 파리의 이 이름 또한 정확하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동맹이었던 소련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명한 곳인데, 이 지역이 최근 이민자들로 인해 슬럼화가 되어 저소득층 치안이 불안 지대인 파리 19지구(Arrondissement)에 위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러시아 볼가 강 유역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한 볼고그라드는 영국의 코번트리와 자매도시로 연결되어 있다. 이 두 도시는 세계 최초의 자매도시로 등록된 곳이다. 자동차 공업으로 유명한 코번트리는 제2차 세계대전아 한창인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런던, 플리머스와 함께 독일군의 폭격을 가장 심하게 받은 도시 중 하나였다. 이에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이 전쟁으로 겪는 고통을 들은 코번트리 시민들은 이에 대한 동병상련으로 자발적인 응원 메시지를 보내게 되었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두 도시는 자매도시가 되었다. 이는 현대의 자매도시 제도의 유래가 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코번트리는 그 이후로도 드레스덴이나 사라예보, 바르샤바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은 도시들과 자매결연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