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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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이기도 하다. 이 날은 나치 독일의 노동 수용소이자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가 소련군에게 넘어가 해방된 날인데 이 날을 기려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로 정하고 매년 추모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Auschwitz Birkenau)는 나치 독일 시대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였던 곳이다. 수용소의 요새화된 벽, 철조망,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은 이곳에서 벌어졌던 대량 학살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던 150만 명의 수용자가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굶주림과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되었던 곳이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이 세운 수많은 절멸 수용소 중 하나로 나타난다. 주요 절멸 수용소는 6개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외에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마이데네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아우슈비츠는 가장 규모가 컸다. 무엇보다 증거가 되는 시설이 상당부분 남았기 때문인 것도 있고, 대중들의 인식이 나치 절멸 수용소의 보통 명사처럼 불리는 곳이 아우슈비츠다. 물론 예를 들어 북한에 수많은 수용소가 존재하지만 인권 절멸의 보편적으로 보통 명사처럼 굳어진 것이 "아오지 탄광"인 것과 유사하다 보면 된다.

Аушвиц-Биркенау 1940-1945: 1,100,000 убитых, 출처 : rfi, Гелия Певзнер
절멸 수용소는 보통의 노동 교화소나 강제 수용소와 다르게 오로지 반 나치 성향이 의심되는 세력을 절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아우슈비츠는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동 가능인원으로 분류되는 인원은 10~20%에 불과했던 데다 최종적으로 사망 확률이 85%에 이르렀다. 홀로코스트의 주된 방식은 노동 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보다는 포로가 되거나 잡힌 직후에 집단적으로 총살을 당하거나 절멸 수용소로 보내진 이후 가스실로 끌려가 살해되고 그 시신은 불태워져 재가 땅에 묻히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이 일반적일 정도다. 그럼 아유슈비츠는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건설되었을까?
아우슈비츠는 처음부터 유태인들을 절멸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은 1939년에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 첫 목표는 폴란드 지식인들을 제거하여 그들의 독립 정신과 의지를 꺾어 버리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폴란드의 지식인들을 정치범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수용할 목적으로 1940년 5월에 세워지게 된다. 이 수용소가 지어질 때, 노동 수용소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물론 처음부터 절멸 수용소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다른 노동 수용소들과 마찬가지로 무작위 처형이 자주 일어나긴 했지만 아직 대규모 학살이 일어나거나 처형이 발생하지 않았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이후에는 엄청난 수의 소련군 포로를 잡아 아우슈비츠에 소련군 포로를 이송했고 이후에도 밀려드는 새로운 소련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1941년 9월에 이전 포로와 정치범에 대한 첫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소련군 포로 650명과 250명의 폴란드인을 수용소 지하의 11블록에 모아 놓은 뒤 치클론 B를 투입하는 실험을 했는데 이 실험은 매우 성공적으로 나타나 이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치클론 B를 이용해 재소자들을 학살했다. 본래 11블록은 수용소의 규칙을 어긴 제소자들을 처벌하고 고문하는 장소였다. 이 블럭 내부에는 독방들이 존재했는데, 작은 창문이 존재하는 90cm x 90cm의 공간에 4명을 수용하고 학대했다.
나치는 1941년 10월 소련군 포로를 더 많이 수용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제1 수용소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제2 수용소인 거대한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건설했다. 이 때 공사에 동원된 소련군 포로들은 식량과 보급품이 모두 모자라서 굶어죽는 것은 다반사였으며, 인육을 먹고 생존해야 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에 있었다. 결국 1941년부터 1942년까지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짓는 동안 10,000명이 넘는 소련군 포로는 겨우 수백 명이 살아남았을 정도로 처절했다. 한편 1941년 10월 하인리히 힘러는 친위소장 오딜로 글로보츠닉(Odilo Globočnik)이 수장으로 있는 폴란드 총독령 루블린 SS경찰 본부에 폴란드 유태인들을 색출하고 절멸할 것을 구두로 지시했다. 따라서 이 때 라인하르트 작전(Operation Reinhard)이 시행되었고, 이 작전은 1942년 3월부터 1943년 11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작전으로 인해 폴란드 각지에 5개의 절멸 수용소가 추가로 생성되었다. 1942년 1월, 체코를 지배하는 총독이자 체코의 전 국가 보안 본부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반제 회의를 주도하면서 유태인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책이 절멸(Vernichtung)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로써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는 절멸 수용소로 개조되었으며 1942년 초반부터 1945년 1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기 전까지 잔인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다른 절멸 수용소들은 소련군이 도착하기 한참 전인 1943년 말, 라인하르트 작전이 취소되자마자 폐쇄된 것과는 다르게 아우슈비츠는 그대로 남았다. 수용소마다 수감 인원과 구조가 조금씩 달랐는데 가스 살인 공장은 제2 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이곳은 여성과 노인 등 노동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로 곧 제거될 인원으로 충당되었다. 모든 희생자들의 절반 이상은 기차역이 존재하는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우선적으로 살해했기 때문에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시체 처리실은 규모로는 가장 컸다. 상대적으로 노동 능력이 있는 남성의 경우,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이후, 강제 노역을 통해 말려 죽였다. 비르케나우의 경우, 화학 공장이었기 때문에 유독 화학품에 대한 위험이 높았다. 원래 절멸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비르케나우에 대한 안전 장치는 전무했다. 따라서 유독한 화학품에 노출된 많은 수용자들이 강제 노역 과정에서 사망했다. 수용소가 건립된 초기에는 친위대의 각 사단에서 차출된 인원들이 직접 교도관 등의 역할을 하기 위해 근무했다. 그런데 전쟁이 진행되고, 나치 독일군 중 젊은 장병들의 숫자가 부족해면서 이들은 대부분 전쟁 최전선으로 보내지고 독일 국방군 중 육군과 공군에서 주로 30~50대의 중장년층 예비역들과 국민 척탄병들이 아유슈비츠에 투입되어 수용소 간수들로 근무했다.
비르케나우 절멸 수용소의 가스실은 불과 4~5개밖에 없었지만, 다른 절멸 수용소보다 훨씬 대용량이었고 더 많은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학살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소각장이 바로 같은 건물에 있어서 시체도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비록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가스실들은 해방 직전 나치가 증거인멸 차원에서 폭파시켜 해체시켰지만 가스실과 소각장 건설에 참여한 독일의 건설기업 토프 운트 죄네(J. A. Topf & Söhne)가 설계도를 남겼기에 이를 바탕으로 학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지하의 가스실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나면 곧바로 지상에 있는 소각장으로 시신들을 옮겨 가 소각시키는 방식이었다. 반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은 작은 공장처럼 생겼으며 지하에는 샤워실 같이 꾸며진 가스실이 존재했다. 나치는 가스실을 샤워실처럼 꾸미고 희생자들에게 샤워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옷을 벗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탈의한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들어가면 고체 치클론 B를 굴뚝을 통해 주입해서 살해했다. 학살이 끝난 후, 뒤처리는 유태인 특수직무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가 맡았다. 시신은 머리카락과 금니 같은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뺀 후 소각 처리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전세가 역전되어 나치 독일군이 몰리게 되었고, 점차 소련군이 접근하자 나치 독일은 60,000여 명의 수용자들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1943년 11월 라인하르트 작전이 중지됨에 따라 이 작전의 일부로서 세워졌던 절멸 수용소들은 마이다네크 수용소를 제외하고 모두 폐쇄되고 자료들은 철저히 은폐되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는 여전히 나치 최대의 절멸 수용소로서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으며 다른 지역의 학살 시설들이 줄어들면서 유태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자 이들을 수용소에 도착하는 즉시 학살했다. 1945년 초 비스와-오데르 대공세(Висло-Одерская операция)로 인해 이미 바르샤바까지 소련군에게 함락되었던 1월 17일이 되어서야 하인리히 힘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폐쇄 명령을 내렸다. 이 때까지 살아남은 수용소 수감자들은 겨울에 도보로 이동해야 했고 이와 같은 과정에서 이미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져 있던 많은 유태인들이 기아로 사망했으며 얼어 죽기도 했다. 이들 수감자들을 모두 이동시킨 뒤 SS는 조직적으로 수용소의 시설을 파괴하려고 했지만 이미 소련군은 매우 가까이 진주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아우슈비츠 제3 수용소와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건물 만을 파괴하고 비르케나우의 화장터, 그리고 아우슈비츠 제1 수용소는 원형 그대로 남아 나치 독일이 유태인들을 학살했다는 강력한 물증이 되었다.
수용소가 폐쇄된 지 불과 9일 뒤, 1월 26일 소련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1-й Украинский фронт) 제60군이 이 지옥과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해방했다. 이 수용소의 참상을 목격한 소련군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선군 사령관 이반 코네프(Иван Конев) 원수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참상을 전해 듣고 아우슈비츠를 직접 보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되어 작전 지휘에도 영향을 끼칠까 우려해 일부러 수용소를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련은 이곳에 진주하면서 각종 자료들을 수집했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나 비르케나우의 참상과 관련된 대부분의 자료는 모스크바 외무성과 레닌 도서관의 비공개 열람 목록으로 들어가 있다. 결론적으로 아유슈비츠는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서방 연합군이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소련이 해방시켰다. 한국에서는 아우슈비츠를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서방 연합군이 해방시킨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러나 각 나치 절멸 수용소 해방에 대해 연합군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대부분 소련이 해방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인해 연합군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하여 나치 독일 국회의사당에 소련 깃발을 꽂고 승리를 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과 승자는 소련이었다.
그런데 올해 1월 27일, UN 총회는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에 막상 지옥에서 해방시켜 준 러시아를 초대하지 않고, 가해국인 독일을 초대했다.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은 2005년 유엔 총회 결의로 제정된 공식 국제기념일이다. 나치 정권과 그 협력자들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반유대주의와 모든 형태의 혐오·차별을 예방하며 인간 존엄과 인권, 민주주의 가치를 국제사회에 환기하기 위해 지정됐으며 올해로 제정 11주년이 된다. 그런데 러시아는 10주년 때도 불참시켰고, 11주년인 올해도 초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독일은 해마다 이 행사를 통해 역사적 비극을 직면하고 기억과 책임, 화해와 연대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공동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추모일은 국제적 연대와 윤리적 책임의 상징적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를 주도적으로 홀로코스트에서 해방시켜 준 나라에 대한 고마움 따위는 전혀 없다는 것에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러시아를 초대하는데 껄끄러움이 있다면 우크라이나라도 초대해야 맞다. 우크라이나도 소련군에 합류해 홀로코스트들을 해방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준 당사자다. 그런데 UN 총회는 우크라이나도 부르지 않았다. 이를 보면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인들이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같은 슬라브계 국가들을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 대해 조금의 고마움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치가 이들을 인종청소해서 쓸어버리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