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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아프가니스탄의 전쟁과 러시아 제국,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그레이트 게임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4 15:54:58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두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이를 정치 외교 용어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183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를 언급하고 있다. 영국 동인도회사 기병대 정보 장교인 아서 코넬리(Arthur Conolly)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영국 소설기 루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이 1901년 소설 킴(Kim)에서 이 용어를 쓰면서 공식화되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러시아가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인도를 점령한 영국이 이를 저지하는 가운데서 비롯되었다. 이 기간의 전투 중 대영제국이 가장 치명적으로 패배한 전투가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1838년 아프가니스탄의 칸 도스트 무하마드(Dost Mohammad)는 영국 측과 동맹을 맺었다가 러시아 측으로 기울어졌다. 영국 본국과 인도 총독은 무하마드를 제거하고 영국에 우호적인 인물을 아프가니스탄의 새로운 칸으로 옹립하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영국인들은 여러 인물들을 아프가니스탄의 대칸 후보로 올려놓고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무하마드에 의해 추방되어 지금의 파키스탄으로 망명해 재기를 노리던 전 국왕 샤 슈자(Shah Shujah)를 대체 칸으로 정했다. 샤 슈자를 적극 추천한 인물은 캘커타의 정치국장 윌리엄 맥노튼(William Macnaghten)이었는데, 그는 이 망명자가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아프가니스탄 특유의 게릴라 공격, Sir-I-Khajur in the Bolan Pass, 1839, 출처 : First Anglo-Afghan War


그러나 맥노튼의 주장과 달리 샤 슈자는 아프가니스탄 주민들 사이에 인기가 없었다. 이 때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된 군대는 동인도회사의 병력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도는 영국 직할령이 아니라, 동인도회사라는 주식회사의 지배하에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공격할 군대는 인더스 군(Army of the Indus)이라 불렀다. 영국인과 인도인 2만 1천 명으로 병력을 구성하고, 보병과 기병, 포병대를 거느렸다. 그 뒤를 짐꾼 및 세탁부, 요리사, 편자공 등 잡다한 민간인 3만 명이 따랐다. 슈자가 왕권 회복을 위해 조직한 민병대도 영국군을 따라 카불로 향했다. 1839년 3월 말, 영국군 대부대는 볼란 고개(Bolan Pass)를 통과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입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했을 때 현지의 발루치 족은 영국이 샤 슈자를 권좌에 올리는데 성공하더라도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영국인들, 특히 맥노튼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4월 25일 영국군은 총 한 번 사격하지 않고 칸다하르(Kandahar)에 입성했다. 하지만 칸다하르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새로운 칸이 입성했는데, 환영식에 참석한 사람은 고작 100명에 불과했으며 이에 맥노튼은 실망하면서도 현지인의 충성심은 돈을 주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즈니(Ghazni) 요새를 공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군은 500명의 사망자를 내면서도 완강하게 저항했고, 영국군도 200명 이상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영국군은 성벽을 폭약으로 폭파해 간신히 요새를 함락시켰다. 가즈니 전투에서 영국군은 아프간인 1천 6백 명을 포로로 잡았다. 여기서 샤 슈자의 잔혹함이 드러나게 된다. 슈자가 포로를 자기 앞에 줄지어 걷게 하자,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은 신의 배반자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분개한 슈자는 자신의 병력을 동원해 그 자리에서 포로 40~50명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새로운 칸이 되려는 인물이 저지른 잔혹 행위는 빠른 속도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사이에 전해졌다. 이에 영국군은 이어 카불로 진격했고, 1839년 7월 카불에 무혈 입성했다. 도스트 무하마드는 러시아로 도주했으며 샤 슈자는 망명한지 30년 만에 영국의 도움을 받아 카불에 들어왔고 이어 칸의 자리에 올랐다. 영국군은 국경을 넘은지 4개월도 못되어 수도를 점령한 것이다. 몇 달 후 전임 국왕 무하마드는 영국인 앞에 나타났고, 영국은 그에게 예의를 지켜 인도로 망명하게 해주었다. 샤 슈자는 영국의 이중성에 크게 분노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영국군의 공격이 성공한 것으로 보았다. 샤 슈자가 왕권을 회복하자,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은 신임 칸과 영국인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카불 주재 대사로 임명된 맥노튼은 그 동안의 공로에 대한 대가로 뭄바이 총독으로 발령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의 불만을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여인들을 강간하고 무슬림 국가라는 것을 알면서도 길거리에서 술을 마셨다. 


이슬람 왕국에서 경건하게 살아온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은 그와 같은 부분을 매우 싫어했다. 슈자는 복종하지 않는 부족들에게 엄한 형벌을 내려 강제로 복속시켰다. 영국군의 일부는 인도로 철수했지만 4천 5백 명의 병력은 여전히 카불과 주요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다. 영국군 주둔과 영국인들의 이주는 카불 시민들에게 대단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매우 척박한 산악 국가에 호화 생활자가 늘어나면서 세금이 늘어나고 물가가 급상승했다. 영국 군인들은 아프가니스탄 여인들을 유혹했다. 가정을 가진 어떤 현지 여인은 남편을 버리고 영국인과 사귀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군 병영에도 여자들이 불러들였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여성의 명예를 중시했으며 그들은 복수심을 갖게 된다. 이슬람 지도자들은 샤 슈자와 영국군에게 대항하는 대규모 봉기를 준비했다. 카불을 점령한지 2년이 넘은 1841년 11월 1일 밤, 대규모 시위대가 알렉산더 번스(Alexander Burnes) 부대사의 집을 포위했다. 그의 집에는 엄청난 금이 있다는 소문도 퍼져 나갔다. 영국인에 대한 적개심에 가득 찬 사람들, 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 때 시위대 한사람이 총을 사격하여 영국군 장교 한 사람이 사망했다. 영국 장교들은 고용된 인도인 용병 세포이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시위대와 영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교전으로 인해 번스 부대사와 때마침 그의 집을 방문한 동생 찰스 번스가 사망했다. 


30명의 세포이 경비병도 모두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군은 아프가니스탄 시위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카불에서의 철수까지 생각하게 되었고 시위는 카불에서 벗어나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틈을 타서 강제 퇴위 되어 인도에 끌려간 전임 칸 무하마드의 아들 와지르 악바르(Wazir Akbar)가 6천 명의 병력을 소집해 반란군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영국군에 대항하게 된다. 영국군은 이미 병력 중 300여 명을 잃었고, 규율이 엉망이 되어 패잔병과 같이 진지를 고수하며 고립되어 있었다. 이에 아프가니스탄 악바르의 게릴라 군은 보병과 기병을 합쳐 3만 명으로 늘어나면서 영국군을 압도하게 되었고 영국군 사령부는 7배나 많은 아프가니스탄 게릴라 군 앞에 전멸할 것인지, 혹은 기근으로 죽을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인도에서 지원군이 도달하기에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또한 폭설로 인해 카불로 지원군을 보낼 수 없는 최악의 악재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 악바르는 영국군에 협상을 제의해 왔다. 악바르는 영국군이 안전하게 철수하는 조건으로 아버지 무하마드를 귀환시킬 것을 제시했다. 그리고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영국군의 장교와 그 가족 일부를 인질로 잡겠다고 하였다. 영악한 맥노튼 대사는 악바르의 제의를 역이용하려 했다. 무하마드가 다시 제위에 오르면 반대할 지도자들을 충동시켜 아프가니스탄 민중들을 분열시키자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악바르도 그러한 영국의 속셈을 간파했다. 그는 협상을 하자며 맥노튼을 협상 장소로 불러들인 후, 매복한 군대로 하여금 급습하여 참수해버렸다. 이제 카불의 영국군 입장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카불 주둔군 사령관인 윌리엄 엘핀스톤(William G. K. Elphinstone) 장군은 일부 인질을 남겨 두고 무조건 철수한다는 악바르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결국 1842년 1월 1일 엘핀스톤과 악바르 사이에 철군 협정이 체결되었다. 악바르는 영국군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무장 호위대를 제공하고, 영국군은 대포 몇 문을 제외하고 모두 아프가니스탄 측에 내주기로 했다. 1월 6일 영국군 4천여 명과 그 가족들을 합쳐 1만 6천명이 카불에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악바르 칸은 영국군에 안전하게 귀환하도록 보장해 준다고 하면서 철수하는 영국군 대열의 후미로 군대를 보내 약탈과 살인 행위를 자행했다. 악바르의 군사들은 전혀 무장을 하지 않은 민간인도 주저하지 않고 살해했다. 영국군은 후방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철수를 해야 했다. 그러나 불필요한 짐이 많은데다 민간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후퇴하는 속도가 느렸다. 낙오자도 있었고, 동상 걸린 사람들도 속출했다. 게다가 악바르는 직접 군대를 동원하여 영국군의 후방을 계속 급습해 살육을 저질렀다. 철수한지 5일 만에 영국군 750명이 죽고, 민간인 3분의 2가 사망했다. 


이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윌리엄 브라이든(William Brydon)이었다. 그는 샤 슈자의 의사로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카불을 떠났다. 아프가니스탄 국경의 마지막 고개에서 영국인 생존자들이 내려오는데 아프가니스탄 군이 기다리고 있다가 도륙을 시작했다. 브라이든도 당시 머리에 아프가니스탄 군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 그는 다행히 모자 속에 잡지책을 넣어두었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후 정신을 차려 주변을 보니 치명상을 당한 기병을 발견했다. 그 기병은 자신의 조랑말을 타고 가라고 간청했으며 그 병사는 곧 사망했다. 브라이든은 조랑말을 타고 혼자서 밤새 힌두쿠시의 고개를 탈출했다. 얼마 후 잘랄라바트의 영국 요새에서 근무하던 보초가 브라이든을 발견하게 되었다. 브라이든을 태우고 온 조랑말은 요새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죽었다. 1월 13일, 브라이든은 유일한 생존자로 영국 본국과 인도 총독에게 생존 보고와 아프가니스탄의 정보를 전달했다. 잘랄라바트의 영국 주둔군은 그 후 며칠 동안 성문에 불을 피워 놓고 정기적으로 나팔을 불었다. 혹시 브라이든처럼 살아서 돌아오는 낙오병이 있다면,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낭가르하르 주의 주도로 인구는 20~3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카불과 칸다하르, 헤라트, 마자르이샤리프에 이어 아프가니스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주민은 파슈툰 족이 다수이다. 해발 575m의 카불 강 계곡에 위치해 있어 아프가니스탄 내에서는 비교적 해발고도가 낮은 도시 중 하나로, 수도 카불에서 카이베르 고개를 거쳐 파키스탄 북부의 주요 도시 페샤와르로 나가는 길목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이다. 영국군은 이러한 1842년의 대참사를 잊지 않았다. 36년 후인 1878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공격했다. 이를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고 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자는 무하마드의 또 다른 아들인 셰르 알리(Sher Ali)였는데, 영국군의 공격을 받자 알리는 친 러시아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번에 영국은 5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카불로 진격했다. 셰르 알리는 직접 러시아로 찾아가 차르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유럽 열강의 국가들도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믿었던 러시아가 영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의 입국을 거부했다. 러시아의 도움을 얻는데 실패한 알리는 화병에 걸려 1879년 2월에 사망했다. 알리의 뒤를 승계한 아들 무하마드 야쿠브(Mohammad Yaqub)는 아버지와 견해를 달리했다는 이유로 억류되어 있다가 새로운 칸의 지위에 올랐다. 야쿠브 칸은 즉각 영국과 협상을 벌여 영국의 보호령이 될 것을 수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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