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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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아라비아 반도 남부 지역에서 예멘 지방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문명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멘에 거주하고 있는 부족들에게 무역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또한 예멘 부족 단체들은 시리아까지 해안선을 따라서 소위 상당히 넓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식민지들에 아라비아 반도 북부에 거주하고 있는 유목민들을 이용하여 운용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남부 아랍인과 북부 아랍인 사이의 혼합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역을 통해 예멘은 일부 이주민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러자 아프리카와 에티오피아 이주민들이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 해안으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남부에는 북부 지역의 언어와는 다른 아프리카 지역의 토속 언어가 섞이게 된 것이다. 게다가 비 아랍인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남부 지방 언어에 상당히 많은 외래어가 섞이게 되었다. 고대에 예멘의 향료 무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라 알려진 오리엔트 지역에서 온 정착민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예멘 지역의 인구 증가로 인해 어떤 씨족들은 사막으로 추방되어 북쪽 사막으로 유랑하게 되었고 결국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Bedouins in the Sinai Region, 1967, 출처 : Wikipedia, Arab
킨다(Kindah) 부족은 임루 알 까이스(‘Imru’ al-Qays)라는 유명한 시인이 그 부족장이었는데, B.C 5세기경에 예멘을 떠났으며 이슬람 발생 전 잠시 예멘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시리아 사막을 유랑했다. 프랑키시스 유향나무는 이슬람 이전의 종교들에서 종교의례에 향료로 대량 사용되는 유향의 생산원료였다. 다른 한 나무의 향료는 화장이나 시체를 썩지 않게 보존하는데 사용되었다. 기독교가 지배하기 이전 고대에는 이 두 나무는 예멘 지역 부족들의 부를 축적하는 원천이었다. 아라비아 남서부 지역에는 향료 무역과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이 외에도 유목민들이 거주했는데 그들은 시리아와 이집트 시장에서 거래되는 낙타와 가축 사육 및 유목 생계를 유지해 갔다. 이렇게 나타난 아라비아 반도 남쪽 지역의 언어는 주제가 강하고 표현이 약한 언어로 변화되었으며, 결국 셈어 중 하나인 에티오피아어와 더욱 가까운 언어가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예멘에서 아랍어와는 차이가 있는 사바어 또는 힘야르어가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아라비아 반도 북부 지역의 언어는 쿠라이쉬 부족의 언어로써 예멘을 제외한 아라비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 통용어로 사용되었다. 이 언어는 명사의 구성과 동사, 대명사의 변화에서 남부 언어와 다르지만 불규칙한 복수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 북부 지역의 언어는 다소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명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라비아 남부의 국가들의 발전된 역사들이 종식되고 아라비아 반도의 무역이 북부 아랍인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또한 아랍인들이 종교 중심지로서의 메카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고 메카의 지위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게 된다. 따라서 아라비아 북부 지역의 언어들이 크게 성장하고 남부 언어는 쇠락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슬람이 등장하여 꾸란이 북부 언어인 ‘쿠라이쉬어’로 계시되면서 마침내 이 언어가 아라비아 반도의 전체를 지배하였으며 남부 언어는 점점 더 사멸하여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에 세력이 강한 국가로는 반도의 북쪽에 히라 왕조와 갓산 왕조가 있었다. 두 왕국은 페르시아와 로마 제국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라비아 반도 사이에 자리 잡아 국제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히라 왕조는 페르시아와 자주 교역하고 국가적인 도움을 받았으며 갓산 왕조는 로마 제국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 두 아랍 왕국은 페르시아와 로마라는 거대 세력 사이에 완충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민들의 삶은 페르시아와 로마 등 두 강대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갓산 왕국이 출현하기 이전에 페트라를 수도로 한 나바트 왕국과 타드무르가 수도인 팔미라 왕국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왕국은 이슬람 발생 직전까지 존속했기 때문에 중요시된 갓산 왕국과 히라 왕국보다 이슬람 연구에 있어 그에 대한 관련성이 당연히 적으나, 그렇다고 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역사를 무시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랍인이라는 의미의 아랍어, ‘아랍’은 어디서 유래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해 현재에도 큰 논란이 있다. 아랍이라는 단어의 근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학자들은 이 단어의 뿌리는 아카드어, 아시리아어, 히브리어 등 고대 셈족 언어에서 유래된 셈어라고 가정하며 서쪽에 사는 사람들 또는 남쪽의 후손들, 사막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주민들이 유프라테스 강 지역 서쪽에 거주하는 민족들을 통칭하여 아랍인이라고 지칭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아랍(Al-Arab)이라는 아랍어 단어들은 예멘과 메소포타미아에 여러 국가들을 설립한 셈족 국가들에 이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막을 의미하기도 하는 아랍이란 단어는 그 출처가 아직 명확하지는 않으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B.C 853년의 아시리아 문헌에서 처음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이 비문에 의하면 아랍인은 시리아 사막과 반도 북서쪽에 거주하는 집단으로 표현되고 있다. 아랍이라는 최초의 아랍어 표시는 328년 킨다 왕국의 왕인 이무룰 까이스(Imurul Qaise)의 무덤, 네마라(Nemara) 비문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비문에서 쿠자아(Khujaa) 부족 출신인 까이스 빈 후다디야(Qaise Bin Hudadiya)라는 자힐리야 시인이 자신의 부족과 아일란(Aillan) 부족 간의 전쟁에서 쿠자아 부족을 찬양하면서 아랍을 언급하였다. 아랍이라는 단어는 이슬람의 출현 당시 메카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잘 알려져 있었다. 26장 195절과 41장 44절 등 꾸란의 여러 구절에서 아라비(Arabi) 단어를 외국어와 비교하여 아랍어로 관련지었으며, 역시 정착민과 비교하여 유목민을 지칭했다. 아랍이라는 단어의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네게브 사막의 종족 언어들을 분석해볼 때 “말하다” 또는 “발음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동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는 현대 아랍어에서 아랍은 텐트를 이용하는 무리를 뜻하는 집합명사로도 쓰이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아라비아 반도의 거주민들을 아라비아 반도 북부에 거주하던 한 부족들의 이름인 사라센(Saracen)으로 표현했다. 이슬람 이전 시대, 아랍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라비아와 시리아 사막에 거주한 유목민을 지칭하고 있다. 유명한 아라비아의 역사학자인 이븐 칼둔(Ibn Khaldun, 1332~1406)은 아랍이란 용어를 유목민으로 인식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에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사람들은 아랍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오아시스 주변에서 간단한 농사를 하며 정착한 무리들은 아랍인이라는 범주에 포함된다.
따라서 유목민과 오아시스 주변에 거주하는 유목민 모두가 아랍인이라는 단어에 분류되었다.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이들은 부족의 조직과 낙타를 소유하였다. 아랍 유목민은 낙타를 사육하고 이용하는 점에서 다른 유목민과 구별되고 있는 편이다. 이슬람 초기 시대의 정복으로 인해 이와 같은 원래 아랍인의 고전적인 의미가 확대되었다. 정복 사업에 많은 부족민들이 참여하였는데 메카의 지도급 인사들이 이들을 지휘하였고 여기에는 남부 아라비아 출신들도 함께 이동하여 정복 전쟁에 다수 참여했다. 따라서 그들도 모두 포함되어 아랍인으로 간주되었다. 이슬람이 발생하기 오래전에 남부 아라비아 부족민들은 유목민 아랍인과 구별되었었지만 이슬람 발생 직전 아랍어를 채택하여 언어적 동화가 된 이후, 중동을 정복하는 도중에 유목민 그룹에 연결된 것이다. 물론 혈통적으로 남부 아랍인들의 조상은 다르다. 그러나 아랍인은 유목민과 남부 아라비아 부족민들을 포함한 아라비아 반도의 토착 아랍인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유목민 아랍인이 순수 아랍인의 원형 또는 표준으로 계속 간주되었고 이들의 언어가 곧 아랍인들의 언어였으며 아랍 문화의 핵심인 시와 학문에는 아랍 유목민들의 가치관과 전통이 반영되었다. 고전적 의미의 아랍인은 750년경까지 아라비아 이슬람 제국 건국 및 정복 전쟁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 후로는 오히려 부차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아라비아 반도 이 외의 지역인 비옥한 초승달 지방으로 알려진 오리엔트 지역에는 낮은 평원의 주민들이 7세기 이슬람 세력의 정복 이후 대략 한 세기에 걸쳐 이슬람교를 믿고 아랍어로 말하며 때로는 혼혈을 통하여 완전히 아랍화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의 일부 지역은 정복 이전에 이미 아랍화 된 상태였다.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마그리브 지역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이 베르베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11세기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아랍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집트 등 일부 북아프리카 지역의 아랍화 과정은 추적하기 쉽지 않은데 이는 기독교 세력의 끊임없는 저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서 이슬람으로 전향하고 조상 대대로 이어 온 자신들의 언어를 포기하였으며 대체 언어로 아랍어를 채택했다. 이러한 이집트인들이 광의적으로 아랍인에 속하게 되었다. 근대 시대에는 아랍어를 모국어로 말하고 아라비아-이슬람 세계에서 거주하거나 아라비아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이라크에서부터 모로코에 이르는 지역의 거주민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1950년대 이전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한 사람들이 주로 자신들을 아랍인으로 생각하였으나 1950년대 이후에는 주민 대다수가 아랍인인 이라크에서 모로코까지의 아라비아-이슬람 세계 거주민들을 아랍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19세기 등장한 아라비아 민족주의의 산물로 보여 진다. 이라크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며 시인인 자브라 이븐 샤왈리(Zabra Ibn Shawali)는 “아랍인이란 아랍어를 자신의 언어로서 말하고 따라서 스스로 아랍으로 느끼는 사람”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언어적 요소가 아랍인의 자격에서 매우 중요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非) 아라비아 권역의 문화에서 성장하더라도 모국어가 아랍어이면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으로부터 아랍인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확실히 과거보다 더 폭넓은 지역에서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살아가는 아랍인을 발견하기에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에 모로코의 역사학자인 아부 빈 왓슬람(Abu Bin Watslam)이 언급하기로는 “아랍주의가 본질적으로 볼 때 언어와 문화를 말한다.” 라고 주장한다. 많은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종교적인 부분이 아닌 아랍 문화에 참여하면 아랍인이라는 왓슬람의 언급은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목민들은 집시와 같이 유랑과 방랑을 목적으로 정처 없이 다니지 않고 있다. 사막의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유목생활은 그들에게 가장 과학적인 생활방식이다. 유목생활이 주된 유목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적합한 사회적 단위는 부족이며, 씨족으로 세부적인 분류를 이룬다. 또한 가장 작은 사회단위는 하나의 유르트를 함께 사용하며 거주하는 집단이었다. 유목민 사회에는 정부도, 경찰도, 이들을 단속할 자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에게 의탁하는 약자들이나 노예들은 부족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었고, 부족과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그 부족의 보호 하에 그들 이웃에서 거주했다.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습격하여 그 부족을 지배하기도 한다. 아라비아 부족들은 관습과 사회 통념을 따르고 있다. 이는 개인은 부족의 유대를 인식하고 부족의 이익을 지지하며, 부족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모든 부족의 구성원들은 서로 결연한 공동 책임과 연대감을 갖고 있었다. 이 부족들의 연대감은 관용, 환대, 명예와 같은 그들의 이상과 함께 부족 안에서 비교적 부유하고 강한 개인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허약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부족이 아닌 외부의 어떠한 정치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복종하지 않는 등 소위 부족적 자치(Tribal autonomy)를 중요한 가치로 간주하였다. 부족들의 재산은 서로 공유하고 있다. 활, 화살, 그물과 사냥개 등은 모두 부족 전체의 공동 자산이며, 음식도 나눠 먹는다. 주인과 종으로 구별하지 않았으며 무리의 대표는 봉사자일 뿐이다. 부족들은 독특하게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각각의 씨족 대표들로 구성된 원로회의인 마즐리스(Majlis)에서 셰이크(Shaykh), 또는 부족의 대변인이라고 부르는 부족의 대표인 부족장을 선출하며 부족 내 의사를 결정한다.
선출된 부족장은 경력, 지혜, 용기, 달변, 명예, 관용 등 지도자의 강력하고 최상의 품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왕 등의 절대적인 통치자들과는 달리 매우 제한된 권위를 가지며, 책임이나 의무가 권리보다 훨씬 더 많다. 이러한 부족장의 영향력은 어떠한 정착민의 통치 제도보다는 개인적 위엄이나 품위로 행사된다고 보아야 한다. 강력한 물리적인 세력보다는 각 씨족 간의 설득을 통하여 그 영향력이 나타난다. 새로운 목초지로의 이동, 타 부족에 대한 습격 및 원정, 필요에 따라 부족 연합의 가입 등 중요한 결정들은 전체 원로회의에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부족장의 통치력은 많은 부분에서 의례적이었다. 평화 시에는 부족을 대표하여 외부의 손님을 접대하고 자신의 몫에서 부족 중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며 숙소를 빌려줄 의무가 있다. 전시에는 지도자로서 가장 앞에 서서 부족민들을 독려해야 한다. 승리할 경우, 전리품 중에서 20~25%가 부족장에게 할당되나 그 할당 분은 부족을 대신하여 손님에게 환대를 베푸는 등 그와 같은 공식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부족 구성원이 범죄를 저지르면 부족의 이름으로 책임을 지지만 만일 부족이 결과에 대한 책임 이행을 거부하는 범죄를 누군가에게 저지르거나 부족의 권위를 실추시킨다면 그 구성원은 부족에서 추방된다. 부족의 구성원은 부족장에게 복종할 의무는 없으나 그의 결정에 거역하는 자는 부족 전체로부터 떠나야 한다.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들은 실제로 이러한 법 집행을 많이 취하였으며 이와 같이 여러 이유로 자신의 부족으로부터 이탈한 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요소로 연결되어 유랑민 집단을 구성하였다.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에게 있어 자유라는 것은 씨족들이 누리는 최선의 자부심으로 발현된다. 어떠한 대가를 위해 자유를 양보할 수는 없는 것이 원칙이다. 오늘날 전체를 위한 자유를 실현시키기 위해 개인이 자유의 일부를 양보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러한 경향은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종의 사기이다. 자유를 상실하는 것보다 죽음이나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사막 유목민에게는 훨씬 더 용이한 일이다. 부족원이 부족장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절대적인 자유, 지나친 이기주의와 자만은 유목민의 의식 속에 살아서 움직이는 주된 요소였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일례로 어느 유목민이 이슬람교에 귀의한 후 큰 소리로 기도하였는데 “알라 하느님, 저와 무함마드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와 함께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마옵소서.” 라고 하였다 전한다. 이와 같이 전형적인 개인주의적 같은 성향을 가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족사회에서는 왕국 등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부족 구성원 사이의 연결이 이루어지기에는 결코 쉽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은 그 세력이 성장할 때마다 내부적으로는 또 다른 분파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상당수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부족을 떠나거나 추방당했고 떠나거나 추방당한 이들은 자신들의 부족을 재구성하기도 했다. 사막 유목민 사회에서 부와 권력이 측정되는 요소들은 크게 세 가지로서, 보유한 동물들의 수량, 여름철 우물의 소유와 겨울철 목초지로의 접근 여부에 따라 부와 권력의 판도가 결정된다. 따라서 아라비아 반도 내에 제한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부족들 간에 치열한 경쟁들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특히 가뭄과 기근 그리고 인구 과잉으로 인해 정착 농업이 가능한 남부 아라비아 지역의 예멘이나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역인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하였으며 지역 내 분쟁이 잦았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습격이나 약탈은 부도덕한 것이거나 불법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비록 분쟁은 잦았지만 7일장 개최와 같은 관습은 유지시켰다. 시장에서 평화롭게 물물교환이 이뤄졌으며 때로는 상설 마을시장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아라비아 유목민들은 국제 무역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멘에서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왕래하는 낙타 대상들이 반드시 경유하는 곳은 중부와 북부 아라비아였으며 유목민은 주로 경호 업무를 담당하거나 물과 음식, 숙박 등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지리적, 사회적 주변 환경으로 인해 혈통의 순수성과 강한 품성을 지닌 유목민들은 생존경쟁에 필사적이었고 예술과 학문 등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어서 낮은 문화 수준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소위 종교적, 철학적인 사색은 거의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언어 개발에 몰두하게 되어 아라비아 특유의 정형시를 탄생시켰고 이는 중, 근세 세계사에 있어 빛나는 문화적 유산을 후대에게 물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