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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경전 <꾸란>에 대한 지하디스트들의 사상적 영향과 이븐 타이미야의 살리피즘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4 16:04:05

일부 무슬림들은 이성으로 알라(Allah)를 알고 이성이 종교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세속적인 무슬림이라고 자처한 무라드 와흐바(Murat Wahba) 교수는 13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슬람 세계는 이성적 성장이 느린 시기(Takhalluf)였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타칼루프는 후진, 후퇴라고 번역되지만 이슬람 철학자들은 무슬림이 믿은 것을 이해하는데 이성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라드 와흐바는 종교적 기사에는 드러난 의미(자히르, Jahir)와 숨은 의미(바띤, Batin)가 있는데 바틴은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무라드 와흐바는 이슬람 세계가 13세기 이후 타칼루프 속에 살아왔다고 하면서 이성의 작동을 막아 왔다고 주장한다. 13세기에 이븐 타이미야가 자히르의 의미를 진짜 의미(마으나 하키키, Maana Hakiki)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히르를 넘어선다는 것은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슬림 형제단은 이성을 사용해 종교적 기사를 이해하는 것을 금지 시켰다. 사실 수니파의 <꾸란> 해석에서는 이성을 사용하기 이전 전수에 의한 해석을 우선하는 것을 해석의 원리로 삼아왔다. 

Photo showing the cover of the book, ‘Ibn Taymiyya in the Literature of Contemporary Jihadists’, 출처 : Aliyu / HumAngle


결국 무슬림들이 자히르에 머물기 시작하면 점차 <꾸란>의 문맥과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해당 단어만을 해석하는 극도의 문자주의적 해석(타프시르 하르피, Tafsir Harfi)을 하게 된다. 여기서 “하르피(Harfi)”라는 말은 Letterism (극도의 문자주의)을 지칭한다. <꾸란>을 한국어로 번역해 놓은 책을 보면 <꾸란>에 대한 문자주의적인 해석(하르피)이 보인다. 이것은 곧 종교적 기사의 본래 의도를 전하지 못한 것이고 이와 같은 번역이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에서 비생산적인 논쟁으로 발전했다. 문제는 그들이 <꾸란>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인가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꾸란>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전에 반드시 꾸란 해석의 원리를 먼저 숙지하고 있었어야 했다. <꾸란>과 <하디스>의 종교적 기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본래의 의도를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한국에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사의 해석은 인간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지 신의 의도를 반드시 나타내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기사에 대한 이해가 법학파들, 이슬람 운동(타이야르, Taiyar), 사상들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고 그 기사의 의미와 의도와 목적에 대해 다양한 해석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기사에 대한 하르피 해석은 위험한 것이다.


종교적 기사에 대한 하르피 해석과 이것을 이념적으로 사용하려는 시도, 일례로 오늘과 이슬람 세계에서 보여주듯이 이는 파국적인 결과를 낳았다. 종교적인 서사가 특정 무슬림 집단을 위해 해석되면 IS의 만행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흔히 ‘칼의 구절’로 알려진 <꾸란> 9:5은 극도의 문자주의적으로 읽는 자는 그 구절에 내려온 역사적인 배경이나 문맥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구절이 <꾸란>에 나오는 모든 ‘평화’의 구절들을 무효화시킨다고 주장한다. IS는 “알라에 대한 믿음이 없고 이슬람을 안 믿는 자(Those who do not believe in Allah and do not believe in Islam, 이른바 불신자들)”는 전쟁터의 적이 아닌데도 그들을 죽이는 것은 무방하다는 것을 정당화했다. 그래서 IS는 비무슬림은 물론 신앙이 없다고 판단된 무슬림들도 살해했다. 아라비아 이슬람 세계의 타칼루프(이성의 작동을 막아버림)는 근본주의를 가져오게 했다. 아라비아의 근본주의는 종교적 기사에서 이성의 사용을 금지하거나 막아버린다. 이러한 근본주의는 아라비아의 대학가에도 퍼져 있어서 동료 무슬림들의 사상을 비판하고 심지어 동료 무슬림을 카피르(Kafir, 알라를 믿지 않는 자)로 몰아서 직장에서 추방되고, 또한 카피르는 법원의 판결이 나면 무슬림 부인과 이혼을 당해야 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타즈디드(Tajdid, Renewal, 갱신)를 주장했으나 지난 500년 동안 아라비아에서는 종교적 타즈디드는 없었다고 한다. 


무함마드 압두흐(Muhammad Abduh)가 이슬람의 타즈디드를 주장했으나 근본주의자들은 해석과 유산에서 극도의 문자주의적(하르피, Harfi)인 것에 집착했다. 결국 종교적 개혁과 계몽주의(탄위르, Tanwir)는 완성되지 못했다. 아라비아 세계에서 근본주의(우쑬리야, Ussuliya)의 반대말은 세속주의(알마니야, Almaniya)이다. 무라드 와흐바(Murad Wahba)는 지금의 아라비아 이슬람 세계가 필요한 것은 세속주의, 계몽주의, 아라비아적인 루쉬드 사상이라고 했다. 무슬림 학자들에게 시대가 흐르면서 타즈디드 앞에 장애물이 놓여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거기에는 종교적 사상이 굳어져 동결되고 이즈티하드(Ijtihad, 법학자의 법적 판단)가 굳어져 버리고 이러한 종교적 사상이 문화적 후퇴와 함께했다. 2021년 9월 무함마드 우스만 알 코쉬트(Muhammad Uthman Al-Khosht)는 ‘인간의 재건과 이집트 이성(Al Aql Al Misri)의 발달’이라는 주제에 대해 ‘비평적 이성(Akle Nakdi)’을 가진 새로운 청년 세대를 세워가자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을 재건하는 일은 이성을 재건하는 일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다. 인간 이성은 인간의 행동과 신앙 뒤에 잠재되어 인간을 이끌어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나라가 발전하려면 이성을 재건하여 다시 세우고 발달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그런데 이집트인의 이성의 동인, 즉 움직이게 하는 것은 종교적 이성(Aql Dini)이라고 했다. 이집트인들은 7,000년 동안 종교적 이성에 지배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적 이성의 발달은 종교적 기사인 <꾸란>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고 잘못된 인간의 이성을 바꾸자는 것이라 부연했다. 다시 말해, 종교이자 기사인 <꾸란>과 종교적 담론을 구별하자는 것이다. 종교적 담론을 발전시키자는 것은 <꾸란>을 발전시키자는 것이 아니고 종교에 대한 사고에서 인간의 사고방식을 발전시키자는 것이라 설명했다. 종교적 담론은 종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과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담론은 인간의 담론이고 신적인 것은 <꾸란>이라고 했다.  그는 테러리스트들은 파괴로 이끄는 방식으로 <꾸란>을 이해한다고 했다. 보통의 무슬림이 믿는 <꾸란>과 테러리스트가 믿는 <꾸란>은 같은데 문제는 그 종교에 대해 서로 이해하는 방식, 사고하는 방식 그리고 이야기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종교적 담론의 타즈디드(갱신)는 사고하는 방식에서 발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IS가 행하는 폭력과 테러를 정당화 시키는 명분이 된다. 알카에다(Alkaeda)가 9.11 테러를 통해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였으며 IS(Islam State)라는 새로운 이름의 이슬람 테러 단체가 등장하여 한동안 활동하였다. IS는 1999년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로 출발하여 2013년 발발한 시리아 내전을 계기로 알카에다와 결별하고 IS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2014년 6월 29일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Abu Bakr al-Baghdadi)를 칼리프, 즉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추대하며 이슬람 국가의 설립을 공포하였다. IS는 국가 설립 공포 이후 무력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면서 무슬림, 비 무슬림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하고 유럽의 심장부에서 까지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행동을 저지하려는 주변 이슬람 국가들과 서구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IS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수의 이라크, 시리아 무슬림들이 이들의 이념과 방법에 동조하고, 북아프리카, 유럽에서 태어난 무슬림들과 최근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IS에 가세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IS를 두고 어떤 무슬림들은 IS가 이슬람과 상관없는 단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이슬람 내부에 존재하는 소위 온건한 무슬림들과 서구의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서 반복되고 있다. 이들은 벌써부터 IS와 선을 긋고 IS가 이슬람과 상관없는 테러 집단이라고 비판해왔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이전부터 무슬림들에 의한 테러가 있을 때마다 반복되어 온 것이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 신학자 세예드 호세인 나스르(Seyyed Hossein Nasr)는 <이슬람의 심장(The Heart of Islam)>이라는 책에서 이슬람의 종교적 목적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다가 죽을 수 있도록 평화를 확립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이슬람과 9.11 사이에 분명한 한계를 그었다. 


한국 이슬람 사원의 이주화 이맘 역시 IS와 관련해 SBS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프랑스와 호주 그리고 IS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폭력적인 활동은 이슬람의 근본적인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IS가 발생하게 된 책임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 침공하여 무슬림들을 탄압한 서구의 패권주의에 돌리고 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인데 서구가 조장해서 이 지역에서 테러 집단이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많은 무슬림들이 이러한 주장에 동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동조는 서구와 기독교에 대한 분노와 공격으로 바뀌게 되어 또다시 테러를 만들어 내게 된다. 무슬림들이 아니지만 한국인들 가운데서도 그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에 의해서 IS가 행하는 폭력이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으로 변하게 된다. 물론 모든 이슬람이 IS이고 모든 무슬림이 IS 대원은 아니다. 그러한 생각은 IS의 책임을 서구로 돌리려는 시도 만큼이나 종교적 마찰이나 충돌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IS가 이슬람에서 나왔지만 이슬람 그 자체는 아니다. IS는 이슬람이 생겨난 후 이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수행해 온 다양한 이슬람 해석의 한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그와 같은 방식의 이슬람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모든 무슬림들이 동일하게 믿으며, 모든 무슬림 들이 근본주의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IS가 이슬람과 관계없다는 주장 또한 맞지 않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주장만 반복한다고 IS와 같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외부적 환경이 무슬림들을 자극한 것은 분명하지만 IS는 이슬람에 속해 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IS의 문제를 종교분쟁이나 문화 충돌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고 무슬림들이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IS는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에서 발생한 현상이며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슬람에 속해 있다.  이는 IS는 이슬람의 전통적인 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IS는 이슬람에서 살라피즘(Salafism)이라는 신학적, 해석학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살라피즘은 선조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살라피(Salafi)라는 아라비아어에서 나온 것으로, 이슬람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을 실천하고 이슬람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함마드와 정통 칼리프 시대의 언행과 삶의 양식을 가감없이 문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신학적이고 해석학적인 주장이다. 살라피즘은 <꾸란>과 무함마드의 언행을 포함한 기록된 초기 전통인 <순나>에 기록된 것 이 외의 모든 교리와 해석을 비록 이슬람에서 합법적이고 정통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는 한발리(Hanbalis)를 비롯한 하나피(Hanafis), 말리키(Malikis), 샤피(Shafiis) 학파의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만든 것(비드 아 : bid`a)으로 규정하고 배척한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추론이 가미된 그러한 해석은 무함마드의 언행과 <꾸란>의 의미를 변질시킨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살라피즘은 이슬람의 초창기로 돌아가자는 하나의 복귀 운동이지만, 이슬람이 축적해 온 전통적이 해석을 따르는 것(Taqlid)을 거부하고 개인적인 해석(Ijtihad)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살라피즘이 이슬람 초기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살라피즘은 이슬람이 압바스 왕조 시대의 정점을 지나 하향세로 접어들기 시작하던 13세기 이슬람의 회복과 재건을 추구하는 하나의 신학적 운동으로 등장했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살라피즘의 기원이 이븐 타이미야(Ibn Taymiyyah 1263~1328)와 그가 제시한 이슬람 해석 방법에 있다는데 동의한다. 그리고 실제로 정치화한 와하비즘과 글로벌 살라피즘(Global Salafism)을 추구하는 단체들로부터 극단적인 IS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살라피주의자들은 살라피즘에는 단 하나의 올바른 교리만 존재하는데 그것은 이븐 타이미아의 교리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IS의 이슬람 해석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븐 타이미야라는 인물과 그의 신학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븐 타이미야는 1263년 현재 터키의 동남부에 위치한 하란에서 태어났다. 


출생한 지 얼마 후 그의 가족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압바스 왕조를 몰락시킨 몽골 제국의 침입을 피해 술탄 맘룩(Mamluk)이 통치하던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이주하였고 타이미야는 그 곳에서 성장했다. 그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치하던 맘루크(Mamluk) 왕조 치하에서 한발리 학파의 법관으로 종교적 경력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시리아를 침공한 몽골과 항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이슬람 신학자로서의 타이미야의 경력은 몽골이 이슬람 역사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압바스 왕조를 붕괴시키고 이슬람 세계를 위협하던 시기와 때를 같이한다. 이슬람이 위기에 처한 이 시기에 이후 이슬람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될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두 개의 운동이 생겨나는데 하나는 근본주의 살라피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메블라나(Mevlana)와 같은 신비주의 수피 종파들의 출현이었다. 이 두 개의 운동은 둘 다 이슬람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였지만 추구했던 방향과 방법은 전혀 달랐다. 메블라나와 같은 수피주의 자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내면이나 초월의 세계로의 도피하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타이미야는 이슬람이 축적해 온 역사적 경험을 탈피하여 정통 칼리프들의 시대로 되돌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타이미야가 그와 같은 방법을 선택한 것은 이슬람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이 세월이 지나면서 축척되어 하나의 신학적 교의에 기반한 잘못된 이슬람 해석 방법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슬람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은 외부로부터의 이교도들의 침입이 아니라 시아파 이슬람과 정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슬람 학파들과 수피즘의 이름으로 관행화 된 잘못된 이슬람의 해석과 실천에 있었다. 그래서 타이미야는 <꾸란>과 <순나>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기록된 대로 실천하지 않고 외부의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유입된 사상과 방법을 수용하여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은 이슬람의 본질인 알라의 '신성의 단일성'과(Al-tawhid Aluluhiyya) 알라의 주권의 단일성(Al-tawhid Al-rububiya)을 약화시키고 변질시키는 배교적인 행동이라 비난하였다. 타이미야는 서구의 철학과 사변에 영향을 받은 이슬람 신학자들이 알라의 단일성(Tawhid)을 약화시키고 실천과 윤리의 종교인 이슬람을 사변화 한 것이 이슬람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라 주장하였다. 문제가 그곳에 있다면 이교도들의 영향과 통치에서 벗어나 이슬람의 영광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이슬람의 황금기였던 정통 칼리프 시대의 이슬람, 살라피들이 <순나>를 문자적으로 적용하던 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타이미야는 그러한 자신의 견해를 따라 몽골의 통치 아래에서 신음하며 이슬람의 옛 영광을 그리워하던 무슬림들에게 살라피 이후에 첨가되거나 해석된 모든 것(Bid`a)을 버리고, <순나>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추종하기를 거부하는 무슬림을 배교자로 선고하고(Takfir) 이슬람의 법에 따라 처형해야 한다고 설교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행동에 나섰다.


타이미야는 몽골과 몽골의 통치를 지지하는 세력뿐만 아니라 <꾸란>과 <순나>를 문자적으로 따르지 않는 시아파와 수피종단 더 나아가 이슬람 정통 법학파에 대해 강한 비난과 공격을 가했다. 몽골의 통치자였던 가잔(Ghazan)이 1295년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제 자신이 수니 이슬람의 합법적인 수호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항전을 중단하라고 요구하자, 타이미야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세 차례에 걸쳐 몽골의 통치자를 무슬림으로 인정하지 않는 파트와(Fatwa : 종교적 판결)를 선포하였다. 타이미야는 세 번의 파트와를 통해 몽골인들이 스스로를 무슬림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샤리아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법을 따름으로 이슬람을 변질시킨 악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뿐만 아니라 몽골을 지원하는 무슬림들도 배교자로 처단되어야 한다고 선고하였다. 타이미야는 무엇보다도 이슬람의 이러한 관행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당시에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복을 빌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무슬림 성인들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타이미야는 그러한 행동을 용인하지 않았다. 이는 그러한 행위가 무슬림들을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뜨리게 하고 <꾸란>에서 명령하고 있는 메카 순례를 방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타이미야는 1310년 기록한 <지야라트 알 쿠부르(Ziyarat al-kubur)>라는 저술을 통해 선지자들이나 성인들의 무덤을 방문하여 기도하는 것은 이슬람에서는 정당화되거나 허용될 수 없는 이교도적인 행위이며 무함마드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조차도 이교도의 영향을 받고 첨가된 것(bid`a)이라고 비난하였다. 신의 단일성(Tawhid)에 대한 신학과 살리피들의 신앙으로 복귀하자는 그의 호소는 몽골의 압제 아래서 실의에 잠겨있던 무슬림들의 호응을 얻어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하나의 성전(Jihad)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정통 법학파 이슬람 지도자들과 맘루크 왕조의 술탄에게는 타이미야의 신학과 주장이 이슬람의 전통과 왕국의 통치를 위협하는 극단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결국 맘루크 왕조의 술탄에 의해 7년 동안 이집트의 감방에 수감 되었다가 이후 다마스쿠스에서 다시 투옥되어 1328년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타이미야의 죽음으로 인해 살라피 운동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신학은 한 동안 이슬람 역사의 지평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와 그의 제자였던 이븐 콰임 알 자우지야(Ibn Qayyim al Jawziyya)의 저작들은 지면 아래에서 생명을 유지했다. 18세기 이후 그의 신학과 사상은 다시 부활하여 지난 3세기 동안 살라피즘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양하면서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근본주의 이슬람 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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