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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이란 지역의 이단아 쿠르드족 이야기 - 2편 : 소비에트 시기의 쿠르드족과 마하바드 공화국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4 16:05:46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인 수탈을 강화하였고,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세력권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간섭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은 반러 감정을 가지고 폭동을 일으켜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반러 감정은 이는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의 계기 중 하나였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이후 벌어진 적백내전 중에는 소련 적군의 도움으로 페르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Persian Socialist Soviet Republic)이 이란 북서부에 세워지게 된다. 그런데 이 페르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주축은 쿠르드족과 아제리인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이들 쿠르드족과 아제리인들을 통솔하던 인물이 장갈리스(Jangals) 가문의 미르자 쿠차크 칸(Mirza Kuchak Khan, 1880~1921)이었지만 그는 북서부 라슈트(Rasht) 출신으로 카자르 왕국의 사트라프(Satrap, 총독)이었다. 당시 북서부 아제리인이 중심이 되어 있는 장갈리스 가문 사이에서는 러시아의 볼셰비키가 러시아와 이란이 상호 공유하는 문제들, 상류층의 지배와 러시아 제국 황실 문제에 대해 진정한 해결책을 제공하고 있다며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쿠차크 칸의 2인자였던 에사놀라 칸 더스타(Ehsanollah Khan Doustdar)는 아제리인과 쿠르드족의 혼혈로써 이란에서 받은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에 분노하고 있었는데 마침 볼셰비키즘의 영향으로 인해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쿠르드족의 마지막 국가 마하바드 공화국과 지도자들, 출처 : Kapitalis


쿠차크 칸은 시아파라는 종교적인 배경과 이란의 민족주의적인 배경으로 인해 불셰비키즘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망설이고 있었고, 다소 조심스러웠지만 이란 국내에 기반이 부족한 당시 배경을 생각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장갈리스 가문은 즉각 볼셰비키와 협정을 맺게 된다. 이와 같은 러시아의 혁명가들과 협력으로 인해 쿠차크 칸의 지도 하에서 페르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언하고 공화국의 내정에 소련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등의 조건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1920년 5월에 신설된  페르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Persian Socialist Soviet Republic)은 페르시아 장갈리 운동으로 알려진 사회주의적 분배 형식을 따르기 보다는 급진적인 세력들이 페르시아인 중심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갑자기 국가 수입을 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분배 형식인 가난한 농민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지 않았다. 그러자 농민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쿠차크 칸과 그의 참모들 사이에서 에사놀라 칸을 중심으로 세력과 의견 충돌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려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 쿠차크 칸의 페르시아 공산당이 항의하면서 국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1920년 6월 9일, 미르자 쿠차크 칸은 에사놀라 칸에 대한 항의와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라쉬트를 떠나 타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공화국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결국 1921년에 소멸되어 다시 카자르 왕국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1923년,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 산하에 들어가 쿠르디스탄 군(Курдистанский уезд)이 설치됨에 따라 여기에 속하게 된다. 비록 이 군은 1929년까지 존속했지만 이전 페르시아 공화국에 비해 체계적이었다. 이후 스탈린이 조지아 일대에 거주하던 투르크계 주민들인 메스케티 투르크인(Meskhetian Turks)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이들 투르크계들과 같이 거주하고 있던 쿠르드족들 역시 약 100,000명 정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로 인해 카자흐스탄 내에는 현재까지도 소수의 쿠르드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남아 있는 쿠르드족들은 이란의 관할이 되었다. 그러나 이라크 일대가 영국이 새로 관할하게 되면서 이란과 중동 일대는 반영 전선이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그 사이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북아프리카 전선에 독일군이 나타나면서 영국은 중동에서 독일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라크 왕국은 친독일 내각을 세워 영국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19세기 이후 여러 이권 문제로 영국군이 이란을 자주 침공했고,이로 인해 반영 정서는 이란에도 생기게 된다. 당시에 소련-영국의 긴장관계 속에서 나름대로 중립을 세운 팔레비 왕조는 영국에 대한 반감으로 친독일을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당시 이란의 샤한샤였던 레자 샤 팔라비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외교공관을 철수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게다가 연합국의 철도 사용 요구까지 거절하게 되면서 영국은 이란이 독일에 가담할 것을 매우 두려워하게 된다. 이라크마저 독일에 넘어간 마당에, 이란 또한 독일에 넘어가게 되면 영국은 중동에서 사실상 세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영국은 전쟁을 위해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가 보유한 이란의 유전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소련또한 독일이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개전한 이래 참담한 패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 또한 병력 및 장비 물자의 소모가 극심했지만 이를 보충할 여력은 충분하지 않았다. 주요 산업시설들을 모조리 우랄산맥 너머로 이전하고 있는 중이었고 우럽에서 사실상 주요 생산 시설이 마비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인적자원이 풍부한 소련이라 해도 이들을 제대로 무장시킬 도리가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으로부터 물자 및 장비지원을 받기로 했으나 가장 짧은 루트인 영국-무르만스크 항로가 유보트의 공격과 함께 독일군과 핀란드군이 무르만스크로 다가오게 되어 점점 더 위험해졌다. 


따라서 북방항로의 대체로서 페르시아를 통해 안전한 렌드리스 루트를 확보하기로 했다. 이처럼 영국과 소련은 서로의 입장이 맞아 떨어지게 되면서 양국의 페르시아에 대한 침공을 결정했다. 1941년 8월 22일 영국군은 이라크 방면에서 이란을 기습 침공하게 되면서 제8, 10 인도 보병사단과 제2 인도 기갑여단, 제4 기병여단, 제21 인도 보병여단을 투입하여 사트 알 아랍(Sat al-Arab) 수로 및 아바단(Abadan)을 점령하고 트랜스-이란 철도를 확보하며 테헤란으로 북상했다. 소련군도 같은 시각에 자카프카스 전선군의 44, 47, 53사단 등 3개의 군을 투입하여 카스피해를 통한 수륙양공 책략으로 철도 및 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역시 테헤란으로 진격했다. 팔레비 왕조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미국에게 자국의 중립적 위치를 호소하며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개전 8일 만에 소련-영국 양군은 테헤란 서쪽 100km 지역에서 합류했다. 이에 팔레비 왕조는 소련-영국 양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테헤란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외교공관을 폐쇄했지만 소련-영국 연합군은 테헤란을 점령한 후 당시 팔라비 왕조의 샤한샤였던 레자 샤 팔레비를 강제 퇴위시킨 뒤, 황태자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를 새로운 샤로 옹립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 이후, 이란은 연합군 렌드리스의 중요한 루트가 되었으며, 이 무렵 이란에 영국군과 소련군이 주둔했다. 이 때 소련은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흭득했으며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소련은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소련의 영토에 편입시키기 위해 쿠르드 민족주의를 적극 추진했다. 소련은 쿠르드족의 자치와 자치권을 보장하였고 쿠르드족이 주로 거주하는 마하바드(Mahabad) 마을에서는 부족장들의 지지를 받는 중산층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설립되어 지역 행정부를 장악했으며 이들은 소련 공산당을 상부로 두었다. 그리고 쿠르디스탄 부흥 협회(Kurdistan Revival Association)라는 친소 정당이 결성되어, 이란의 의회에 진출했다. 이 정당은 5년 이상,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관리했으며 1941년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 인민정부(People's Government of the Azerbaijan Democratic Republic)를 건국하여 따로 독립시킨 이후, 5일 뒤인 12월 15일 마하바드 공화국(Mahabad Republic)이 마하바드에서 건국되었다. 1945년 9월 말,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Azerbaijan Socialist Soviet Republic)은 쿠르드 족장들과 마하바드의 본진을 바쿠로 이동시켰고, 쿠르드족 소비에트주의자들로 뭉친 마하바드 공화국은 바쿠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마하바드 공화국은 소련의 지원에 의존했다. 그러나 소련과 이들의 긴밀한 관계는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이란이 공산화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이로 인해 서방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중앙 정부인 팔레비 왕조를 적극 지원하면서 이들의 편을 들어 이란에 주둔한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게 된다. 문제는 소련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있었다. 쿠르드족 중심 정부에 대해 매우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마하바드 근처에 수비대를 유지하지 않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충분한 지위를 가진 인물 또한 파견하지 않았다. 마하바드 공화국은 매우 어정쩡한 지위에 소련-아제르바이잔이 세운 괴뢰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소련은 마하바드 정부를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에 흡수시키려 했지만 쿠르드족이 아닌 아제리족이나 해당 지역의 페르시아인 정치인들은 소련의 이러한 흡수를 매우 싫어했다. 이처럼 소련-아제르바이잔으로의 흡수냐, 아니면 독립이냐, 아니면 팔레비 정부로 흡수냐 등을 두고 팽팽한 대립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스탈린이 마하바드에 대해 확고한 장악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의 이란 서부와 카스피해 남부 일대는 모두 소련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었을 때, 해당 지역은 모두 당시 독립한 아제르바이잔 신생 정부의 영토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46년 3월 26일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마하바드에 대해 손을 떼라며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의 협정 내용을 근거로 소련에 압력을 가했다. 소련의 권리는 어디까지나 동유럽에 대한 권리 행사였지 이란은 해당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소련은 이란 팔레비 정부에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 및 이란 북서부에서 철수하겠다고 약속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팔레비 왕조는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게 되면서 소련의 빠른 철수를 촉구했다. 이같은 촉구는 마침내 마하바드 공화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마하바드 공화국의 멸망을 앞당기게 된다. 특히 소련의 관심도가 떨어지면서 마하바드 정부의 내부 지지도는 날이 갈수록 쇠락하고 있었으며 특히 마하바드 공화국 건국 초기에 그들을 지지했던 쿠르드 부족들 사이에서 또한 지지도가 더욱 낮아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농작물과 물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고 소련으로부터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이 사라진 상태에서 마하바드는 명맥만 겨우 유지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쿠르드계 부족들은 마하바드를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부족들 사이에 큰 분란이 존재했는데 이는 아제리인과 쿠르드인 사이에 민족적 갈등이었다. 그렇게 마하바드 공화국은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더불어 1946년 UN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안 2, 3, 5호를 통과시켜 여전히 이란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의 철수를 촉구했다.


1946년 12월 5일, 그래도 마하바드 지역을 지키고 싶어하는 마하바드 소비에트 정부는 만약 이란군이 마하바드 지역에 진입하려고 한다면 맞서서 전투를 벌일 것이며 카프카스의 산악 지대에 게릴라 기지를 설치하고 저항할 것이라 언급했다. 그러나 쿠르드족은 소련이 지원을 끊게 되면서 무기 부족으로 인해 내부 쿠르드족과 아제리족의 내전보다 이란군이 마하바드를 접수하기 위해 작전을 수행하는 상황을 마주했다. 이란군은 쿠르드족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으며 마하바드는 언급했던대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를 결정했다. 그로부터 10일 후인 1946년 12월 15일, 이란군은 마하바드에 진입했고, 결국 점령에 성공했다. 이란군은 마하바드에 점령하자마자, 그들은 쿠르드어의 활자를 찍어내는 인쇄소를 강제로 폐쇄했으며 쿠르드어 교육을 금지했다. 그리고 모든 쿠르드족 서적들을 불태워 없앴다. 이렇게 마하바드 공화국은 이란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이 마하바드 공화국은 소련의 괴뢰국이었지만, 현존하는 쿠르드족이 건설한 마지막 국가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한편 마하바드 공화국의 군대의 일부는 무기를 빼돌려 1947년 3월까지 카프카스 남부와 이란고원 일대를 전전하며 끊임없이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란군에게 밀려 이라크 왕국으로 후퇴하게 된다. 


당시 이라크 왕국은 친서방적인 입장을 가진 하심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라크는 이들 쿠르드족을 좋지 않게 여기지 않고 몇몇 지도부들을 체포하거나, 이란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쿠르드족을 보이는데로 학살했다. 이같은 사건은 이라크 북동부 지역의 쿠르드족이 현재까지도 이라크 정부를 증오하고 앙심을 품어 끊임없이 소요사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남아 있는 쿠르드의 군대는 소련으로 망명을 결정하게 되었고, 군대 500명은 소련으로의 망명에 성공했지만 나머지는 터키와 이라크북부, 이란 후제스탄 일대까지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았으며 이 마하바드의 소비에트 정신을 현재 터키 동부 쿠르디스탄의 PKK가 승계하게 된다. 그래서 쿠르드족의 PKK가 여전히 공산주의 사상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마하바드 공화국은 비록 짧은 기간존재했고, 소련의 괴뢰국이었지만 쿠르드족들은 터키에 세워졌던 아라라트 공화국(Republic of Ararat, 1927~1930) 이후 두 번째로 현대적 국민 국가였었다. 그러나 이후로 쿠르드족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였으며 이라크, 이란, 터키, 시리아 일대의 소수민족이 되면서 디아스포라를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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