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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수많은 시크교도들이 해외로 이주한 이유 - 특히 미국, 캐나다에 시크교도들이 많이 존재했던 이유
  • 알렉세이정
  • 등록 2026-04-14 16:06:35

15세기 말 인도-아시아 대륙의 서북부 펀자브(Punjab) 지역에서 탄생한 시크교는 현상을 신봉하고 윤회사상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시크교의 목표는 신과 하나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크교도들은 신상에 목메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기도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신에 대한 기억만으로 믿음을 갖는다고 한다. 시크교는 신이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흘러가고 있는 현상 자체가 신의 조화고 섭리라는 것, 보이지 않는 실체가 바로 신(神)이다. 그저 흘러가는 자연의 모든 섭리가 신의 섭리이자 신이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들 시크교도들은 평등과 포용을 강조하고, 인도에서 기원한 종교로서는 드물게 출가를 잘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살아나가는 세속적인 삶을 권유한다. 또한 역사성을 가진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절제를 수행으로 삼으며, 박애와 자선을 강조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세속적인 현실 세계에서 운용하는 시크교도들의 모습은 때로는 상당히 호전적이면서도 다른 세계와 융합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면을 보이기도 한다. 

Amritpal Singh Sandhu and his supporters at a village near Kapurthala in December 2022 with a portrait of militant leader Jarnail Singh Bhindranwale, whom he imitates. | Photo Credit: V.V. KRISHNAN


이들은 키르판(Kirpan)이라고 불리는 단검을 지니고 다니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머리는 장발, 터번(Turban)을 착용하는 등, 종교적 정체성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외양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교리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시크교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본래 시크교의 성장은 무굴 제국의 건국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초기 단계에 무굴 제국과 시크교도들은 상호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었으나 1606년 5대 구루 아르준 데브(Arjun Dev)가 무굴 제국의 황위 계승 분쟁에 말려들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시크교가 더 이상 국가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져왔다. 따라서 준 군사 집단 및 시크교도들이 거주하는 곳에 지역 사병들이 존재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시크교와 무굴 제국은 서로 화해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때로는 불편하지만 공존해야 하고, 힌두교와도 공존하여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측면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무슬림들과는 여전히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9대 구루은 테그 바하두르(Tegh Bahadur)가 이슬람교를 적극 장려하던 아우랑제브(Aurangzeb) 술탄에 의해 개종을 강요당했고, 결국은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의 뒤를 이은 10대 교주 고빈드 싱(Govind Singh)은 오늘날의 시크교를 완성시킨 인물이라 그의 존재는 역대 구루들 중에서 가장 각별하다. 고빈드 싱은 시크교의 경전인 <구루 그랑트 사히브(Guru Granth Sahib)>를 완성시켜 시크교만의 독립된 교리를 확립했고, 앞으로는 이 경전이 구루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전통과 오늘날 시크교도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외양을 규정하였으며, 칼사(Khalsa)라는 새로운 조직을 창설하게 된다. 칼사는 ‘순수한 동일체’라는 뜻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시크교도라면 누구라도 가입할 수 있는 조직이다. 칼사에 가입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저 흘러가는 섭리에 바치며 정의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여서라도 투쟁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고빈드 싱은 무굴 제국의 박해에 맞서 효율적인 투쟁을 위해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전사 집단을 창설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칼사는 18세기 시크 제국(Sikh Empire)이 세워졌을 때 군사적인 기초가 되었고 그 뿐만 아니라 오늘날 칼리스탄 운동의 정신적 배경이자 시크교도들의 매우 호전적이고, 때로는 강렬한 집단주의로 비치는 큰 배경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칼리스탄(Khalistan)에 대한 의미는 ‘칼사의 땅’, 혹은 ‘순수한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대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였다. 1947년 영국령 인도제국(British Empire of India)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하여 독립되었을 당시에도 일부 소수의 시크교도들은 칼리스탄 독립국가의 창건을 주장했다. 그러나 힌두와 무슬림들에 비해 적은 인구와 하나로 연결이 불가능한 집단, 그리고 이와 같은 집단들의 결집력과 지도력의 결핍, 또한 시크교도들이 집중하여 살고 있는 펀자브 지방이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인 불리함 등이 칼리스탄의 독립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시크교도들은 인도 공화국의 국민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시크교도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인도 사회에 공헌하는 것에 비해서 돌아오는 보상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노골적으로 힌두교도들에게 차별 받고 있다는 것이 그 불만의 근본적인 배경이었다. 이것이 노골화 되어 나타난 것이 1981년 3월에 열린 찬디가르(Chandhighar)의 제54차 시크 교육 회의(Sikh Education Conference)였다. 이 회의에서 ‘시크는 하나의 민족(Sikh Quam)’이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같은 지위를 갖을 수 있게 UN에 이를 청원한다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결의안에 대해 비록 회원들 사이에 이견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펀자브 주 전체, 그리고 펀자브어(Punjabi)를 사용하는 주변 주(州)들의 영토 일부분을 합쳐 시크교만의 국가, 즉 칼리스탄 공화국을 건국하여 인도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선언이 즉각적으로 대다수 시크교도들의 호응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니었다. 절대 다수의 시크교도들은 심정적으로는 이와 같은 칼리스탄 선언에 공감했지만 그 현실성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리스탄 분리주의자들은 시위와 선동을 계속했고,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펀자브 주의 공업 침체, 농업 생산 부진과 청년 실업이 분리주의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게 된다. 그리고 이 긴장 상태가 정점에 다다르는 사건인 동시에 인도의 현대사를 바꾼 사건이 1984년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시크교의 활동은 역사의 산물로 나타난다. 시크교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무력을 사용함으로 인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복수를 위해 휘두르는 무력보다 영적인 무기가 더 낫다는 자신의 믿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 때문에 현재의 칼리스탄 운동가들 중의 일부가 폭력적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펀자브의 암리차르(Amritsar)에 위치한 황금사원은 시크교도들에게 가장 신성한 장소로 나타난다. 1981년 중반부터 약 200명의 분리주의자들은 정부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이 사원을 피난처로 삼기 시작했고, 이어 동조하는 같은 교도들과 퇴역한 군인들 중 일부가 합류했다. 이들 중에서는 장군과 영관급 장교 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1984년 6월 당시 황금사원 내의 시크교도 분리주의자들의 숫자는 2,000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도 정부는 지금도 이와 같은 시크교 분리주의자들이 로켓 발사기, 기관총 등으로 무장했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다지 좋은 무장 상태들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당시 총리인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의 승인으로 인해 1984년 6월 5일, 황금사원을 비롯하여 펀자브 주의 38개 시크교 사원에 정부군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블루스타 작전(Operation Bluestar)이라 이름 붙여진 이 황금사원 진압 작전으로 인해 정부군은 탱크, 장갑차 심지어 헬기까지 동원했고, 그와 같은 작전의 결과 사원 내의 주요 종교적 건축물들이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어 5일 동안 계속된 진압 작전에서 발생한 사망자의 수에 대해 인도 정부는 정부군, 단순 순례자들을 포함하여 모두 475명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시민단체들은 분리주의자 200명, 순례자 5,000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분리주의자들을 이 같은 기회에 일소하겠다는 인디라 간디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 사건의 여파는 최악의 내전이 발생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진압 작전이었다. 많은 시크교도들은 황금사원에 대한 간디 정부의 공격이 자신의 신앙에 대한 공격이라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가장 온건한 시크교도들조차도 강경파로 입장을 바꾸었고 황금사원 내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순교자들과 동의어가 되었다. 또한 당시 인도 육군의 최정예 부대였던 시크 여단의 장교와 병사들 수천 명이 탈영하여 정부에 대한 무장 투쟁에 참여했으며 공무원이었던 시크교도들은 단체를 사직하는 등, 폭력이든 비폭력이든 항의를 계속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인도의 현대 정치사를 바꾸었던 역사적인 대사건은 황금사원 진압작전이 종료된 4개월 후, 10월 31일에 발생하게 된다. 이는 인디라 간디 수상이 시크교도인 경호원 2명의 총격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이는 블루스타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나타났다. 다음 날인 11월 1일부터 4일동안 힌두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폭도들이 시크교도들을 공격했고, 1947년에 독립한 이래 최악의 종교 폭동으로 기록된 이 반(反) 시크교 폭동에서 델리(Delhi) 지역에서만 약 3,000명의 시크들이 살해되었다. 이는 인도 내의 모든 시크교도들에게 있어 매우 공포로 가득 찬 악몽과 같은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펀자브 지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분리주의자들은 무장 세력화하였고 무차별적인 폭탄 테러, 관공서에 대한 습격, 힌두 사원을 공격하고, 힌두교도들에 대한 납치 등을 자행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중반까지 인도 정부는 15만 명에서 5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면서, 진압을 노렸고 이 때부터 오랜 기간 펀자브 지역은 인도인마저도 기피하는 매우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을 거치는 동안 시크교도들에게서는 매우 적극적이고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져갔고, 스스로를 인도의 2등 시민으로 비하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시크교도들의 해외 이주가 급속히 증대한 이유 또한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인도인들의 해외 이주는 19세기 말 본격화되었고, 이것은 영국의 영토 확장과 현대적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더더욱 용이해졌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2025년을 기준으로 인도는 210개국에 약 3,300만 명,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외 이주자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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