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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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신은 고대 가나안, 혹은 레반트 지역의 주신이었다. 그리고 주로 페니키아 지역의 주신으로 섬겨지고 있었다. 바알은 셈어로 '왕', '주인', '소유자' 혹은 '희생'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바알은 폭풍우와 비, 번개, 풍요의 신이자 태양신이었다. 그런데 페니키아인들과 레반트 지역의 주민들은 메소포타미아 뿐 아니라 모든 신을 "바알"이라 불렀다. "바알"은 곧 기독교나 유태교, 이슬람교가 신으로 여기고 있던 "하나님"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유태인들이 섬기던 "여호와"도 "바알"로 불렀을 정도였다. B.C 2500여 년 경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알려진 가나안 지역에는 수메르 신화의 영향을 받은 페니키아 민족들이 정착했다. 그들은 수메르 신화를 모방한 '우가리트 신화'를 믿었는데, 이때 수메르 신화의 주신 엔릴(Enlil)은 셈족의 폭풍우, 천둥, 비를 주관하는 신인 하다드(Hadad) 신앙과 결합되어 '바알 하다드(Baal Hadad)'라는 주신이 되었다. 이후 페니키아 민족이 지중해에 식민 도시들을 건설하면서, 카르타고 폭풍우의 신인 바알 제폰, 바알 함몬 등 여러 형태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 신앙은 그리스 폴리스들과의 교류를 하게 되면서 그리스의 농경의 신인 크로노스(Cronus)와 동일시되었다. 한편 바알-함몬은 카르타고의 주신(主神)인 동시에 달의 여신이자 카르타고의 수호 여신인 타니트의 남편으로 여겨졌다. 카르타고인들은 바알을 "신의 자손"이라는 의미로 시민들의 이름 끝에 넣기도 하였는데 한니발, 하스드루발, 마하르발 등이 여기에 해당되며 티레의 제왕 이소바알도 여기에 해당된다.

이란 테헤란에서 바알 신상이 등장했다. 친(親) 하메네이 성향의 이란인들은 알라 신에게 바알을 번제를 올리며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전의를 다졌다. 출처 : Wikipedia, Effigy
고대 레반트 지역은 히브리인들이 강성해지면서 현 이스라엘-레바논 국경과 비슷하게 가나안이라 불리는 팔레스타인과 페니키아 지역이 나뉘어졌고, 페니키아의 가장 발달된 도시가 바로 티레였다. B.C 11~10세기, 티레는 왕성한 해상 활동을 통해 지중해에 여러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당시 티레의 위상은 엄청나게 성장해 있었기에 지중해가 티레 해(Tyrian Sea)로 불리고, 페니키아가 튀리아(Tyria)로 불릴 정도였다. 일 티레보다 강성해지는 카르타고조차 로마와 전쟁에 돌입하여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는 이 와중에까지 티레에게 꾸준히 조공을 바칠 정도로, 페니키아 권역에 있어 티레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를 세운 엘리사(디도) 여왕 역시 티레의 공주이자 공동 군주 출신이었다. 그리스에게도 티레인들은 페니키아 문자와 20진법, 조선술 등의 선진 기술을 전해준 도시였다. 티레의 학자들은 천문학을 집중 탐구하여 항해술의 발전을 노렸으며, 티레의 상선들은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오늘날의 영국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천문학과 더불어 선박 건조에 필요한 금속 가공업도 발달했고,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건축술 및 석공예도 발달했다. 고대의 티레는 무역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지중해 권역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한편, 당시의 티레 섬에는 부족한 면적으로 인해 다층 건물들이 세워져 도시에 당도한 다양한 민족의 방문자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고 한다.
후대의 학자들은 티레를 고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라 지칭하기도 한다. 티레 왕국의 전성기는 히람 1세(B.C 980~947)의 치세였다. 약 1,000년 후의 유태 역사가였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ua)는 히람 1세가 티레 섬을 확장했으며 멜카르트, 아스타르테(이슈타르), 바알 샤멤 등의 신전을 세웠다고 기록할 정도로 그는 역사적인 명군으로 기록되었다. 외교에 있어 히람 1세는 같은 시대 이스라엘 왕국의 군주들이었던 다윗과 솔로몬 부자와 친교를 맺어 자주 교류했고,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에 장인들과 레바논의 삼나무 목재를 제공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또한 히람 1세는 블레셋 해적들을 격퇴하여 아라비아, 북, 동아프리카 등과의 교역을 활성화시켰다. 그 중에서도 키프로스 섬과의 교류가 특히 활발했다. 43년에 달하는 히람 1세의 안정적인 치세 동안 티레의 상인들은 하 이집트의 멤피스 등 지중해 각지로 진출하여 공동체를 형성했고, 당시 알려진 세계 곳곳에서 모인 물품들이 강력한 성곽으로 여겨지던 티레 섬의 창고에 보관되었다. 현재로 보면 티레는 세계 최대의 무역항이자 조선업 및 금융업의 중심지였으며, 다국적, 다인종의 사람들이 거쳐 가는 일종의 교통 허브였다. 다만 히람 1세가 승하한 후 계승 분쟁이 이어지면서 티레는 일시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정치적인 안정이 회복된 후, 티레의 왕권은 축소되어 거대한 부를 이루었던 상인 가문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는 원로원의 발언권들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B.C 9세기, 티레 왕국은 다시 출현한 명군인 이소바알 1세(Isobaal I, B.C 887~856)의 치세 때 재차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소바알 1세는 시돈을 포함한 페니키아 전역을 통일하고, 키프로스 섬과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일부까지 점령하는 등 대대적인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 히람 1세와 마찬가지로 이소바알 1세 역시 이웃 국가들과 친선을 유지하여 딸인 이제벨(Isebell)을 북이스라엘 왕국 오므리(Omri) 왕가 출신의 군주였던 아합(Ahab)과 결혼시켰고, 그녀는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정착시키려다가 예후(Jehu)의 쿠데타로 인해 살해당했다. 신화적 요소를 배제하고 생각하면 아합은 페니키아 왕조의 강력한 해상 세력을 배경으로 토속 종교 탄압과 바알 신앙의 국교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민심을 잃고 토착 히브리 세력에게 추대된 예후 세력의 쿠데타에 패배해 결국 목숨을 잃었다. 조금 더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실 아합과 같이 기존 종교 세력과 아합의 세력들에 결탁했던 세력을 견제, 혹은 억압하기 위해 외래종교를 들여온 사례는 많다. 따라서 아합과 티레의 공주 이세벨의 결혼으로 인한 페니키아 세력들과의 융합하려는 행위들이 이해하지 못할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 시대 때부터 우상인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있었다 해도 야훼 신앙 자체는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야훼를 주신으로 하는 다신교를 믿었을지 몰라도 야훼 신앙 자체를 버리진 않았기 때문에 현 유태교가 히브리인들에게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 무렵 티레는 서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떠오르던 신(新) 아시리아 제국에 복속했다. 다만 이집트 신 왕국 때와 마찬가지로 복속은 형식상에 그쳤고, 티레는 광범위한 자치를 누리면서도 아시리아의 보호 하에 활발한 무역과 경제적인 번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B.C 832년, 이소바알 1세의 손자였던 마탄 1세(Matan I)는 사망하면서 아들 피그말리온(Phigmalion과 딸 엘리사(디도)에게 공동으로 왕위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남매는 곧 권력 다툼을 벌였고, 패배한 엘리사는 B.C 824년 자신의 세력으로 함대를 구성하여 티레를 떠났다. 10년 후 그녀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 신도시를 뜻하는 카르트 하다쉬트(Cart Hadasht), 카르타고를 건설하게 된다. 당시 티레의 번영을 증명하는 <구약성경>에는 티레의 심판이 같은 페니키아 계통의 도시국가인 시돈이나 비블로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여러 경전에 걸쳐 자주 언급되고 있다. 티레는 당시 북이스라엘 왕국을 자신들의 가신 국가로 만들면서, 바다와 항해, 도시의 수호신인 멜카르트(Melqart, 몰렉)를 숭배하여 인신공양을 행했다. 그리고 해상 무역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경쟁 상대였다. 페니키아의 비블로스나 시돈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돈의 주민들은 도시의 주신인 아슈타르트(이슈타르)를 숭배했고, 그 밖에 바알 역시 중요한 신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들어서고 그리스 인들이 유입되었으며, 급속한 헬레니즘화가 진행되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이 고대 로마에 정복당하고 이 지역은 로마 제국 영토로 이어진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고대 로마 시대 페니키아와 팔레스티나 일대가 전부 동일한 정부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면서, 페니키아인들의 유태교 개종이 더 가속화되었다. 유태인 사회에서는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출신 개종자들을 어떻게 유태교 사회에 흡수해야 하는지에 관련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오늘날 비교 종교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유태교 사회 내 이와 같은 갈등이 오늘날 초기 기독교의 보급 및 발전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서기 3세기 이후 로마 제국 동부에서 기독교가 점점 유행하기 시작하고 313년 밀라노 칙령 및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기독교 국교화 선언 이후 바알 숭배 신앙은 페니키아에서 몰락하고 기독교가 주류 종교가 되었다. 고대 시기, 유태인들에게 가나안 남부 지역의 원래 주민들이 믿고 있었던 바알 신앙은 가장 큰 경쟁자였으며 교리상 절대 공존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래서 강력히 바알 신앙을 배척하고 그 의미를 격하시켰다. 그래서 성경에는 바알이 이민족의 신으로 등장하여, 바알을 섬기고 있는 것을 타락의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다양성과 포용성이 아닌 배타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 바알 숭배자들에 대한 박해와, 바알 신을 배격하는 것이다. 바알 숭배 신앙에 대한 영향력은 레반트 일대에서 살고 있던 유태인들에게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바알 숭배와 야훼 숭배의 갈등은 극심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야훼 신앙과 바알 신앙의 혼합을 경계했다. 히브리인 입장에서 볼 때 바알 신앙과 동화되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의 고유 문화와 국가 정체성을 뿌리 채 흔드는 행위였던 것이다. 게다가 성적으로 엄격하던 히브리인들의 교리와 각종 난교 등의 성행위를 종교의식 삼아 시행하는 다른 셈족들의 문화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문화였다. 바알은 유태인들에게 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이 같은 현상이 기독교, 이슬람교에도 이어지면서 사탄과 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바알과 같은 신은 특유의 다신 문화와 함께 해오고 있었기에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 세 종교의 입장에서 절대적인 경계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구약성경 내용의 상당수가 수록된 <꾸란>에서는 바알 신은 유일신인 알라와는 대척점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상이라는 것 자체가 우상으로 여기고 악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던 이슬람 입장에서 바알 신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징이었으며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던 당시 레반트는 집단 난교의 상징으로 포장되었다. 사실 현 시대와 가까운 성적 개방 시대는 그 시대부터 존재했다. 간통, 동성애, 미성년 성관계, 미혼남녀 성관계, 소아성애, 근친 성관계 등은 그 시절 레반트 셈족의 문화였던 것이다. 유태교나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나타난 근본주의 사상에는 이같은 난교 문화를 절대 악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 문화의 상징을 바알 신의 문화인 것처럼 보통명사로 굳어졌고 바알은 온갖 악과 난교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최근 제프리 엡스타인의 파일이 잇다라 공개되면서 미국 고위 정치인 및 유명인들과의 유착관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여기에서 바알의 이름이 포착되었다. JP모건 체이스에서 추적한 계좌이체 기록에서 엡스타인의 계좌명이 바알(Baal)이라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엡스타인은 평범한 유태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인물이고, 어렸을 적 이디시어 이름은 유델(Yudel)이었다. 그는 뼛속까지 유태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는 추악한 성범죄들의 주인공이 된다. 타락한 바알을 상징하는 유태인들을 비난하는 이란은 여기에 반미 감정까지 겹쳐 엡스타인과 유태인, 미국을 동일시하여 그들을 난교의 상징인 바알로 표현해서 신상과 오벨리스크까지 만들었다. 어제 11일 이란 이슬람 혁명 기념일에 바알의 동상과 오벨리스크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이란인들은 악의 상징을 제거하는 것을 사실상 바알과 오벨리스크를 번제로 올리는 행동으로 "미국에게 죽음을" 을 외치며 전의를 다졌다. 이번 이란 이슬람 혁명 47주년 기념일은 친(親) 하메네이 성향의 이란인들에게 있어 의미가 남다른 날인 것이다.